분홍색과 하얀색으로 포장된 상자를 열었을 때, 안에 들어있던 것은 흰색의 면적이 작은 옷이었다. 옷이라고 해도 될까? 등 부분은 분홍색의 리본으로 코르셋마냥 조이게 되어 있고 앞면은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릴 수준으로 짧은 것이 반질거리고 미끌미끌하다. 아인델이 생전 만져볼 일도 입어볼 일도 없는 것이었다. 그 낯선 옷을 들어 살펴보는 표정은 난감함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크게 표정 변화가 드러날 일 없는 얼굴 위로 머뭇거림이, 이어 난처함이. 매끈한 눈썹을 내 천자를 그리도록 모은 채 아인델은 한참 그 옷을 들고만 있었다.
상자의 뚜껑 위에는 압화된 꽃이 자리한 카드가 한 장 올라와 있었다. 사비아가, 아인에게. 선물이에요. 입어주실 거죠? 정말이지, 그 아이는 또 이렇게 곤란한 것을 선물이란 이름으로 포장해오는구나.
안쪽으로 철사가 들어가 오똑 선 부드러운 재질의 토끼 귀와 하얀 망사, 발목부터 리본으로 묶게 되어 있는 눈이 아픈 분홍색의 구두까지.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꼼꼼히 포장된 게 가히 사비아의 솜씨였다.
일단은 입는 데 의의를 두자. 입어달라고 했지 입고 보여달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적당히 카드의 문장을 해석한 아인델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옷을 벗었다. 목까지 채웠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리고 손목의 단추까지 풀고 나면 허술해진 셔츠를 의자 등받이에 적당히 걸친다.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고 바지 버클도 마저 내린다. 속옷 한 장만 남긴 채 거울 앞에 선 아인델은 가볍게 기지개를 켜 몸을 당기고 이어 그 하얗고 작은 옷에 다리를 집어넣었다.
가느다란 망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이 얇고 허술해 다리를 넣는 데만도 제법 시간을 잡아먹어야 했다. 차라리 내 거미줄이 낫지 않겠니. 무게 없는 한숨을 쉬고 말았지. 다리를 넣을 구멍이 제법 아슬아슬했다. 허벅지를 꽉 조였다 가장 윗부분까지 당겨 올리고 나자 겨우 몸에 맞아들었다. 사이즈는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애꿎은 투덜거림을 남기고 가슴까지 옷을 끌어올리고 나니 남은 것은 등을 조일 리본이었다. 조이는 것까진 어떻게 할 수 있지만 묶을 수가 없다. 부를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부름에 응한 파트너의 반응은 첫째로 아연함이었고 둘째로 화끈거림에 마지막으로 체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네가 하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말리겠어. 그렇지? 난데없이 방에 불려와 거울을 앞에 두고 흰 토끼로 변해버린 파트너에게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조여줘, 율. 등받이 없는 둥근 의자에 앉아 그에게 등을 맡긴다. 한참을 힘든 표정을 하던 그는 분홍색의 리본을 손에 감아 아프면 말해야 돼? 간신히 한 마디를 남기고 손에 힘을 주었다. 거미줄 같은 흉터를 제외하고는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흰 등을 분홍색의 리본이 얼기설기 엇갈려 조여들었다. 피부를 단단히 감싸고 옭아매는 그것을 따라 말랑한 살이 접힌다. 아직 괜찮아? 더 당겨도 될지 망설이는 목소리에 이제 됐어. 묶어주렴. 가슴을 압박하는 그 틈 사이로 얕은 숨과 함께 답하였다.
다 입고 나서도 역시 낯설고 익숙해지지 않은 감촉과 재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옷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노출된 피부가 서늘했고 망사와 리본으로 조인 부분이 묘하게 간질거리며 갑갑했다. 묶어 내린 머리카락을 어깨 앞으로 끌어와 내렸다. 이렇게라도 가려야 진정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드러난 피부 위를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스치고 지나 맨살이 드러나 있음을 더욱 의식하게 될 뿐이었다.
묘하구나, 정말. 얼른 갈아입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발을 뻗었다. 리본을 다 묶은 시점에서 이미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손에 구두를 든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뾰족한 굽을 그의 무릎에 올리고 리본이 교차해 종아리의 반까지 올랐다. 양 발의 리본까지도 그의 손으로 예쁘게 묶이고 나면 남은 건 귀 뿐이었다. 이건 내가 쓸 수 있는데. 한 번 시작하고 나면 마지막까지 자기 손으로 해주겠단 걸까. 머리띠를 씌워주는 손길에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들면, 상자가 깨끗하게 텅 비었다.
응, 이걸로 사비아의 부탁은 다 들어주었구나. 차림을 마치고 거울 앞에 한 바퀴 돌아본다. 끝이 살짝 구부러진 토끼귀, 은색의 목걸이가 가슴 사이로 걸려들고 아슬아슬하게 그 반을 가린 옷이 다리 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엉덩이 위로는 앙증맞게 동그란 꼬리와 그 아래로 허술한 망사와 뾰족한 분홍 구두까지. 민망한 차림새가 아니니.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차림새를 살피다 어깨 너머로 망부석처럼 선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떠니?”
다분히 짓궂은 질문과 함께 갸웃, 제법 귀여운 각도로 고개를 기울여본다. 표정으로도 이미 대답은 나와 있었지만 말로써 답이 듣고 싶었다. 순진한 얼굴의 하얀 토끼는 겉모습과 달리 상대를 옭아매기에 여념이 없는 거미 여왕인 듯 했다.
시작은 바니 딜이었는데 중반부터 왜 파트너를 꼬시는 내용이 되었는지 모르겠고 율릭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