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너지지 않을 거야. 나는 끝까지 갈 거야. 나는 괴물이야. 우린 괴물이야, 아인델. 그래도 끝까지 가야지. 혼자 걷게 된다고 해도 가야지. 미안하다는 말은 안할게. 너는 분명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해 줄 거니까.”
그 때, 어둠속에서 들려오던 너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덤덤하고 차분하고 침착하고, 동시에 많은 것을 집어삼켰던 극도로 억눌린 목소리를. 네가 잘 참는 아이가 되길 바랐던 게 아닌데. 힘들 땐 힘들다고, 도움이 필요할 땐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길 바랐는데.
그 때, 하지만 너는 힘든 건 내가 아니라고 도와줄 테니 돕게 해달라고, 내 생각보다도 더 굳건히 서 말했을까.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아이가 너를 돕겠다고 해주었을까.
그 때, 나도 한 번쯤 말해보는 게 좋았을까. 도와줘. 구해줘.
「고마워. 다 괜찮아. 걱정 마.」
「그 동안 수고 많았어. 우리의 트리플에이. 견고한 철벽. 나의 동행자.」
아주 조금 서운함을 느꼈단다. 더는 너와 함께 걸어갈 수 없음에. 네 곁의 동행자가 되어줄 수 없음에. 그래도 동시에 안심했던 것 같아. 내 견고함은 네 안에서 영원히 네 마음을 지키고 언제든 네가 다시 일어날 힘이 되어줄 거라고 오만하게 믿었단다. 그렇게 너를 믿고 너와 내 유대를 믿었어.
───그리고 계절이 흘렀지.
예수, 너는 아직 걷고 있니? 이제 걷지 않아도 될까. 걷는 걸 멈춘 넌 무얼 하고 있을까. 내가 너를 만나러 가도 될까? 더는 동행자가 아니더라도, 그저 네 맞은편에 앉기 위해서.
* * *
검은 빵모자를 눌러 쓰고 얼굴의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쓰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갸우뚱 확인한다. 머리카락은 겉옷의 안쪽으로 밀어 넣고 소매는 반을 접어 단추를 잠갔다. 머리카락을 가리고 얼굴을 가린 것만으로 색이 죽어 그렇게 주목을 사진 않을 것 같았다. 응, 이 정도면 되었겠지. 다녀올게. 인사를 남기고 현관을 민다. 제법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무르익은 여름 공기가 지면을 달구고 있었다. 무성해진 푸른 잎들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이 아스팔트 위를 섬세하게 수놓았다. 빛과 그림자가 이지러지며 뭉쳤다 흩어지길 반복하는 길 위를 걸었다. 빛이 있기에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 진 곳에 어둠이 뭉치고 어둠 위로 다시 빛이 떨어진다. 검은 것과 흰 것이 공존하고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한 데 뒤섞인다. 「가이드가 빛이라면 센티넬은 어둠인가요?」어린 시절 입에 담던 질문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다시 답하라면 아니. 센티넬 또한 빛이고 가이드도 어둠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불완전하고 쉽게 흔들리고 흔들리기에 무너지지만 무너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가 센티넬이고 가이드고 인간이기에.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미완성의 존재이기에.
그렇기에 괴물이 될 수도 있고 괴물이 다시 인간이 될 수도 있지. 단지 그럴 수 있을 뿐이다. 결코 이상하지도 잘못되지도 않은 아주 담담한 가능성.
「우리는 인간이야.」
「우리는 괴물이야.」
「아니,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우리가 인간이어도 괴물이어도, 그냥 우리는 우리란 것만으로 행복해져도 돼. 행복해져야 해.」
발치의 돌멩이를 가볍게 발끝으로 찼다. 데굴데굴 구르는 돌은 빛이 묻었다 어둠으로 가려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끝에 다다라 멈춘다. 『6지구 중앙 도서관』 그녀의 목적지이기도 했다.
아주 오래 쉰 기분이었다. 태어나 자라 어느 정도 인지를 갖고 움직이게 된 뒤로 아인델은 이렇게 오래도록 쉰 기억이 없었다. 생소하고 조금 맥이 풀리기도 했다. 이렇게 자신이 추구하던 ‘끝’을 볼 줄은 몰랐다. 물론 지금이 진실로 그녀가 이상으로 품은 끝은 아니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더는 하지 않아도 좋았다. 나머지는 너희가, 너희 몫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스스로의 손으로.
그러니 오늘 이 자리를 찾은 것은 이제껏 함께 걸어준 동행자에게 내가 돌아왔으니 같이 걷자고 말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넓은 도서관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입구부터 종이와 잉크의 냄새가 물씬 그녀를 반겨주었다. 이 중 어디쯤 그가 있을까. 문학 코너의 모퉁이를 돌며 책장과 책장 사이를 걷던 아인델은 이윽고 창문도 없이 그늘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등을 발견했다. 책을 읽고 있을까 가까이 가보니 백지의 노트를 펼쳐놓고 멍하니 있는 것 같았다. 그 양옆으로는 여러 동화와 소설들이 쌓여 있었다.
제가 다가오는 기척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모습에 아인델은 작게 웃으며 그의 옆자리 의자를 끌어 앉았다.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고 슬쩍 턱을 괴었지.
“무슨 생각 중이니?”
첫 마디는 놀랍도록 가볍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제 가벼운 첫마디가 무색하게도 그는 우당탕 소리를 내며 의자를 뒤로 넘기며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아, 아인델? 얼마나 놀랐는지 비뚤어진 안경을 바로하지도 못한 채 넘어진 자세 그대로 혼잣말이 물 밑 듯 쏟아졌다. 여기도 자기장이, 홀로그램인가. 아냐, 환각일지도 몰라. 혹시 내가 잠이 들었나. 꿈? 미치겠군. 아연실색하게 힘이 풀린 그를 두고 아인델은 미안함마저 느끼고 말았다. 내가 잠시 잊어버렸구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손을 뻗었지만 그가 주저하며 잡지 못했다. 겨우 일어날 마음은 들었는지 책상을 짚고 서는 그를 못내 서운하게 보았다.
“만질 수 없을 땐 만질 수 있는 척이라도 하더니, 만질 수 있으니 못 만지겠니?”
“그게, 만졌다가… 안 잡히면 어떡해.”
서운함은 그의 말 앞에서 고이 접혔다. 내가 네게 서운함을 논할 처지가 아니구나. 멋쩍게 제 머리카락을 꼬아 귀 뒤로 넘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기장에서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은 얼굴이었다. 곱던 얼굴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어. 제 때 치료를 못한 탓일까. 이번엔 속상함을 느끼며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주며 상처 난 곳을 손등으로 문질러보았다. 흉이 남은 그 부분이 까칠하게 닿았다.
저의 손이 닿는 순간 그는 또 다시 헛숨을 들이켰다. 따뜻해. 중얼거림에 따뜻하단다. 누그러진 답을 돌려주었다.
그제야 겨우 실감이 든 모양이다. 몇 번이고 어색하게 깜빡이던 눈이 겨우 그녀를 마주 보아주었다. 과연 네 첫 물음은 무엇일까. 어떻게 돌아온 거냐 물으면 뭐라고 답해주어야 하지? 사흘보다는 조금 늦고 말았구나. 우스갯소리를 할까.
정작 그에게서 들려온 것은 생각하지 않던 것이었다.
“안아 봐도… 될까?”
어정쩡하게 펼친 팔, 긴장한 듯 굽은 손끝. 엉거주춤한 그 몸짓에 소리 없는 웃음이 터졌다. 응, 물론이지. 손바닥에 못자국이 없으니 확인하려면 그게 제일이겠구나.
닿지 못해 닿는 척을 해야 하던 순간이 있었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면서도 한쪽은 빛 속에, 한쪽은 그림자에 머물러야 했던 순간이 있었다. 만질 수 없다는 실감이 들지 않도록 일부러 미세한 간극을 두고 모른 척을 해야 했던 그 회한을 다 지우듯 그의 팔이 제 위로 조심스럽게 둘러졌다. 그렇게 조심할 것 없어. 사라지지 않아. 속삭이며 아인델은 반대로 그 허리를 힘껏 껴안아주었다.
“내 생각은 많이 했니? 보고 싶을 때면 떠올려준다더니. 얼마나 많이 떠올리곤 했을까.”
세상이 평화롭게 되었을 때 나는 너를 떠올렸는데. 앞으로 너는 어떻게 지낼 생각인지 들어야 할 것 같았거든. 평화로운 세상에서 평화롭게 사는 법을 너보다 잘 아는 이를 나는 알지 못한단다. 그래서 네게 배우러 왔어. 느릿느릿하게 읊조리는 말을 따라 그의 팔에도 겨우 힘이 들어갔다. 꾹 조여드는 그것이 꼭 어린아이 같아 아인델은 한 번 더 숨을 삼키며 웃었다.
혼자서라도 걸어가기로 한 내 듬직한 동행자. 보고 온 끝은 어땠니?
완벽하게 성공했지. 그런데 혼자 자축할 수밖에 없어서 아쉬웠어.
그럼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함께 축하 파티를 할까.
……좋아. 잔뜩, 축하하자. 너가 빠진 축하 자리는 역시 말이 안 돼.
“보고 싶었어, 아인델.”
“나도 그렇단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우리 이번엔 나란히 걷는 대신 마주 보고 앉아 축배를 나누기로 하자. 그리고 더는 우리가 필요 없게 된 세상 속에서 함께 쉬기로 해. 인간이어도 괴물이어도 좋은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부활 후 관계캐들에게 한 명 한 명 찾아가는 로그를 쓰고 싶단 큰 꿈이 있는데 무리 같다.(낡고 지침)
그치만 "오랜만이네, 아인델." 하는 예수를 보고선 쓰지 않을 수 없었어요. 소중한 내 동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