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이 돌아간 뒤 우리는 학교에 남겨지게 되었다. 처음에 리리의 인형과 싸우는 어린 여자애를 보았을 때는 이게 또 무슨 일인가 했는데 저 여자애가 마왕이라고?
그 마왕 일당이랑 전면전이라도 벌어지는 걸까. 2라운드 돌입일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들이 별관으로 도망치면서 큰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좀 더 큰 전투를 각오했는데─마왕과의 전투라니 어딘지 RPG 게임 같은 느낌이다─, 그쪽도 모든 힘을 되찾은 게 아니어서 그런지 일단 후퇴한 모양이다.
덕분에 마왕 일당이 별관을 차지하고 우리가 본관을 차지하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곰 여왕이랑 왕을 봉해두었으니까 이제 완전 안심~ 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왕이 남아서 조금 걸리긴 했지만, 당장 서로 크게 싸우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나자 생각보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뱀파이어가 된 탓에 햇빛 보기는 조금 힘들었지만 대신 밤이 편하니까 상관없고, 복작복작하던 사람들이 다 돌아가서 허전했지만 안이랑 리리가 있어서 그렇게 외롭진 않았다. 이대로 느긋한 것도 좋네~ 라며 여유를 부리려고 했는데──,
까먹고 있었다.
햇빛 보기 힘든 것만 문제가 아니라는 걸.
“배고파.”
“유령이?”
“그러게.”
단순히 배가 고픈 게 아니었다. 뭔가 초조하게 목이 마른 느낌. 유령인 걸 자각하고 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갈증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딱 잘라 말하자면, 피다.
피가 마시고 싶었다.
“피는 매점에 있다고 했지?”
위치는 브라운 아저씨한테 들었다. 그치만 브라운 아저씨 본인은 미술실에 콕 박혀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오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안 들려주었다. 몰래 뚫어둔 비상구라도 있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러면 공유 좀 해주지. 애초에 뱀파이어로 만든 것도 자기면서.
아니, 궁시렁 대 봐야 별 수 없다. 지금 급한 건 매점으로 피를 구하러 가는 거지. 일주일에 200cc라고 했는데, 200cc면 어느 정도 양이지? 살아 있을 때도 헌혈 한 번 해본 적이 없어서.
일단 가서 확인하자고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
“안은 배 안 고파? 아니면 막 피가 마시고 싶다거나.”
“별로.”
“그래? 개인차가 있는 걸까. 난 아무래도 피 안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라고 묻는 것 같은 그를 뒤로 하고 어느새 손에 익은 전기톱을 챙긴다. 처음엔 제대로 들지도 휘두르지도 못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제법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매점엔 좀비가 있다고 했으니까 조심해야지.
“어디 가게.”
“매점. 거기 냉장고에서 밥 찾아오려고.”
내 말에 미간을 좁히던 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하고 묻자 자기도 따라간다고 했다. 매점은 위험하니까 혼자 가는 건 좋지 않다고.
되게 무심한 것 같은데 상냥하다니까. 배시시 웃고는 그와 함께 교실을 나와서 아래로 향했다. 학교 안에는 더 이상 곰도 마왕의 부하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냥 안전하진 않았다. 착하고 마음 약한 리리가 오는 유령들을 죄다 받는 바람에 좀 위험한 애들도 있고, 덕분에 나도 아직 학교를 전부 둘러보진 못했다.
그 둘러보지 못했던 곳 중 한 곳이 바로 매점이다. 거기 좀비 떼 있다고 들었단 말야.
학교에 유령에 도깨비에 뱀파이어까지 있으면 됐지, 좀비는 대체 뭐야.
“조심해.”
“웅.”
위잉위잉, 전기톱에 시동을 걸고 안이 문을 발로 뻥 찼다. 그러자 안에 있던 좀비들이 화들짝 놀라며 이쪽을 본다.
어──, 저기 미안. 너무 거칠게 들어갔어?
뭔가 먹고 있던 걸까. 진열대를 뒤지던 좀비들은 마치 수업 땡땡이 치고 나왔다 걸린 학생 마냥 멋쩍은 기색으로(내 착각일지도 모르겟지만) 이쪽을 보다가 우오아어어아 하면서 덤벼들었다.
“물리면 감염. 조심해라.”
“네에~”
한 박자 늦게 깨달았는데 시체 썩은 냄새가 매점 안에 꽉 차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어휴, 얼른 다 썰어서 치우고 청소해야겠다. 부릉부릉하는 전기톱을 들고 힘차게, 덤벼오는 좀비의 몸을 가른다. 좀비물에 나오는 좀비들은 느리고 굼뜬 녀석이랑 좀비 주제에 재빠른 녀석이랑 있던데 다행히 여긴 전자 같았다.
느릿한 녀석들이 내게 닿기 전에 전기톱으로 팔을 자른다. 목을 치기에는 힘이 부족해서 그 다음에 차근차근 다리를 잘라 쓰러트리고 목을 베려고 했다. 그 사이 안은 이미 전기톱을 부웅 휘둘러 가볍게 목부터 쳐냈다. 와아, 사장님 나이스 샷.
무기가 있어서인지 걱정만큼 위험하지 않았다. 금세 좀비들을 정리하고 무사히 목적의 냉장고를 차지할 수 있었다.
“짠~”
냉장고에는 신선한 음료수가 가득 들어 있었다. 병을 따서 안이랑 축하의 짠을 하고 한 모금 마신다. 비릿한 맛과 동시에 달콤하단 느낌도 들었다. 피를 달콤하다고 느끼다니 으엑. 기분이 이상해진다.
“안은 피 마시는 거 이상하거나 싫지 않아?”
“그닥.”
그닥인가. 적응력도 빠르지.
아직 모든 기억을 되찾은 게 아니라서 그럴까. 어렴풋하게 죽었다고 인식을 하면서도 현실을 채 다 받아들이지 못한 느낌이었다. 내가 죽었다고 인정하는 건 마치 목구멍에 콕 박힌 생선 가시를 억지로 삼키는 것만 같아서, 인정하지 않은 채로 있기도, 인정해버리기도 힘들었다.
리리에게 말하면 기억을 모두 되살려줄 테지만 조금만 더 도망치고 싶은 미적거림일까. 지금 이렇게 피를 마시는 스스로도 쉽게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게, 이거 사람 피잖아. 바로 얼마 전까지 나도 사람이었는데.
“조급해 할 거 없어. 이제 집은 안전하니까.”
“……응. 그렇지.”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의 말처럼 어차피 앞으로 남은 시간은 무한에 가까우니까, 지금 벌써 급하게 굴 필요 없겠지. 내일도 모레도 이런 하루가 이어질 테니까.
좀비 덩어리들을 낑낑거리고 쓰레기봉투에 담아 소각장에 내다 버렸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매점을 환기시키고 더러운 걸 다 치우고 나자 다시 번듯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피는, 이제 좀비도 없으니 냉장고에 두기로 했다. 가끔 마시고 싶어지면 또 찾아와야지.
청소를 다 마치고 나자 담벼락 너머로 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닿자 지나치게 눈부시다. 언젠가 이 빛이 전보다 더 눈부시게 느껴지는 것까지 이해하게 되면, ───그 때쯤 되면 적응했겠지. 죽은 것도, 피를 마시면 살아야 하는 것도, 이제 엄마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것까지.
---------
부연설명을 덧붙이자면 10억을 준다는 이야기에 학교로 모인 각양각색의 사람들 사이에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섞여 있었는데, 량이는 유령이었습니다. 학교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기억이 모호한 상태였는데 산 사람들은 한 번 죽을 때마다 현생의 기억을 잃고, 죽은 사람들은 한 번 죽을 때마다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는데 5번 죽으면 산 사람은 학교에 오기 전의 기억을 다 잃고 죽은 사람은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구조.
에서 량이 같은 경우에는 조사하던 중 거울에 손을 대면서 도플갱어와 몸이 뒤바뀌는 바람에 이후 쭉 도플갱어가 된 것도 모자라 미술실의 흡혈귀에게 물려서 유령+도플갱어+흡혈귀인 채 학교에 남아 살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와아.(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