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는 달리 여전히 웃음기가 드리운 채 물어오는 그를 보며, 그러니까 이 친구는 제 생각보다 더 천연덕스러운 모양이라고 에슬리는 깨달았다.
「나랑 펭귄 같이 보러 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저는 도움. 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처음엔 어딘지 선을 그어놓은 듯 한 발짝 건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저렇게 능청스러워진 걸까. 정말 모르고 저러는 건지 알고 저러는 건지도 짐작이 가지 않아 에슬리는 그저 눈가에 오른 열을 손등으로 문질러 식히기 바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문득 무구하게 빛나는 연두 빛의 눈동자와 마주치면 가슴 한 구석이 차가워졌다.
『챠콜이 무서운 게 나온다면 제가 다 이겨줄게요.』
내가 무서워하는 게 당신이면 어쩌지? 과연 당신에게 이 말을 꺼낼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녀가 태어나 자란 글래디스 남부, 그 중에서도 이트바테르는 매일 밤이면 축제가 아닌 것 같은 날이 없을 정도로 떠들썩하고 화려해졌다. 밤에 피는 꽃, 혹은 밤을 밝히는 요사스러운 지상의 태양이라 불러도 좋겠지. 해가 지면 붉은 등이 줄줄이 이어져 거리를 밝히고 진한 향과 화려한 드레스로 무장한 여인들이 암거미마냥 사냥에 나서던 곳이 바로 그녀를 키웠다.
뭐,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홍등가의 뒤편, 휘황찬란하게 높은 건물이 빛을 가려 볕도 잘 들지 않는 더러운 빈민가가 맞지만.
에슬리에게 빈민가에서 한 발짝 떨어진 홍등가는 언제나 아름답고 화려한, 꿈속의 도시 같은 곳이었다. 매일이 축제 같은 곳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그녀가 있던 거리가 여느 때보다도 화려해지는 날이 1년에 2번 있었는데 그 중 하루가 바로 신년을 맞이하는 축제날이었다.
딱 한 번, 손꼽아 기다리던 그 날 에슬리는 친구들과 함께 축제의 거리에 뛰어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도는 냉정하게 쫓겨나면서 끝났다.
「귀한 손님들이 가득 오는 자리에 너희처럼 더러운 애들이 끼면 어쩌니!」 라는 이유였다. 분했지만 거기서 더 뛰어들 순 없었다. 그래서 대신 ‘다음번엔 꼭 축제에 낄 거야!’ 친구들과 약속을 나눴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에슬리가 더 이상 그들과 친구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축제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떠들썩한 열기의 그 가장자리에서, 기웃거리다 돌아가기 일쑤였다.
「너라도 좀 더 구경하지?」
「됐어. 사람 많은 곳 별로야.」
후만은 사람이 많은 곳에 섞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감이 떨어진다던가. 후만도 없이 혼자서 저 틈바구니에 끼었다간 절대로 멀미를 할 것이다. 그래서 에슬리도 언제나, 그저 멀찍이서 지켜만 보다 목도리를 고쳐메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축제의 한가운데 서는 건 그녀에게 대단한 동경이었다.
“레타도 같이 안녕을 빌어주자!”
그래서 아마도 굉장히 들떴던 것이리라. 가면을 쓰면 잠시나마 다른 사람이 된다고,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를 스스로에게도 되뇌며 먼저 손을 내밀고 화톳불이 피어오르는 중앙으로 그를 당겼다. 레타랑 축제에 와서 즐거워. 그 말은 조금의 여지도 없는 진심이었다. 함께 축제에 가기로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광장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서툰 춤을 춰도 두 사람에게 눈총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와 ‘다르지 않은’ 순간을 겪는다는 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던지.
영원의 사랑을 맹세하는 장미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신데렐라의 꿈이 끝나버린 다음 날이 되어서 우정을 담은 장미도 선물 받았다. 베일에 도착한 그 때부터 순간순간이 에슬리에겐 그야말로 꿈과 같았다.
“──다음에도 또 올까요…. 다음엔 꽃이 필 때요.”
“정말~? …….”
때문에, 기쁨이 크면 클수록 반대급부처럼 두려움 또한 커져만 갔다. 과연 그가 제 목가의 표식을 보고 나서도 지금과 변함없이 대해줄까.
『제가 못미덥나요?』
그렇지 않다고,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가도 흠칫하고 제 입을 막았다. 몸이 기억하는 두려움이란 쉽사리 지워지는 게 아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자랐던 친구들이, 돌아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던 두려움은, 아직도 그녀 안에 고스란히 남아 시시때때로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네가 누군지 잊어선 안 돼.》
믿고 싶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아있다면 그녀의 입은 굳게 닫혀 열릴 수 없었다. 또 친구를 잃는 건 절대 사양이었으니까.
미안해.
꽃을 한 아름 선물해주겠다던가? 제겐 과분한 말만 해주는 더없이 상냥한 친구에게 전할 수 있던 건 고작 사과 한 마디였다.
『괜찮습니다. 그냥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요.』
언제까지? 그리고 물어볼 수 없는 말은 꿀꺽 삼키고 말았다.
어쩐지 능청스러워진 친구는 친절이라는 이름으로 무릎을 굽히고 저와 눈높이를 맞춘 채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자꾸만 화끈거리고 열이 오르는 얼굴을 에슬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 눈밭에 몸을 던지고 싶은 심정인데.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일 따위 그녀라고 있을까. 똑같이 겪어본 적 없는 일이라면서 저쪽은 태연하게 두근거린다고 말하고 있고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게 어딘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눈이 예쁘단 말에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눈까지 가려버린 채, 에슬리는 제가 생각해도 이상하게 나오는 목소리로 그만 보라고 더듬거렸다. 도저히 아무렇지 않게 그의 얼굴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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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 : 부끄러움 대폭발 중
이 때 사일란이란 사실 때문에 주춤하고 그 사실을 고백하지도 못해서 미적미적하다가 휴식기 사이에 고백하는데 그 얘기를 로그로 못 남겨서 아쉽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