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부터 쏴아아, 하고 빗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날짜를 확인한 에슬리는 슬슬 바위사막에 우기가 찾아올 시기임을 떠올렸다. 어제 오랜만에 용병단에 연락을 해본 탓일까.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사막에서 한참 먼, 정 반대편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몸의 기억이 남은 모양이다.
아카데미 바깥의 정세는 어수선한 것 같았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찾기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사막에서 벼려진 감은 곧 피 냄새를 맡게 될 것이라 예고해주었다. 이곳에서의 평화로운 생활도 머지않은 모양이다. 기껏 마음에 들었는데.
창가에 달라붙어 잠깐 고민하다가 제 옆에서 새근새근 잠든 룸메이트를 보고 창문 열기는 참기로 한다. 곤히 잠든 친구를 엘버의 찬바람으로 괴롭힐 수는 없지. 대신 유리창에 얼굴을 붙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남색으로 물든 밤하늘은 비는커녕 구름 한 점도 끼지 않아 오색으로 빛나는 별과 달만 선명히 보이고 있었다. 내일도 이곳은 맑을 것 같네. 그리고 춥겠지. 막연하게 짐작을 하며 목을 긁적인다. 옆에 타인이 있는데 목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건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같은 편이 되어주겠다고 손을 내밀어준 이가 있었다. 제 또래의, 저와 같은 사일란 여자 아이. 홀린 듯이 잡았던 기억이 난다. 마주 잡은 손은 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음에도 훨씬 따뜻하고, 훨씬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룸메이트 제안도 거절하지 못했다.
그 때는 제가 가진 문제가 단순히 목의 표식만이 아닌 걸 잠시 잊고 멍청하게 들떴지. 한숨을 내쉬려다 타이밍 좋게 창문 위에 붙이고 있던 손가락 끝이 움찔하고 떨렸다. 컨디션이 좋지 않더라니. 룸메이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 에슬리는 그 고른 숨소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든 채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야 하지? 아무도 없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만한 장소. 산은 곤란하다. 【그 때】의 그녀는 무방비함 그 자체니까. 혹시 들짐승이나 재수가 없어 변이종이라도 나타났다간 가볍게는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귀찮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은 에슬리는 지금이 늦은 시간임을 감사하며 일단 무작정 건물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오늘 밤은 평소와 달리 조용한 것 같았다. 낮에 국군이 다녀간 탓일까. 미처 돌려주지 못한 담요를 두르고 발자취가 남지 않은 곳을 따라서 아카데미 건물 뒤편,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는 곳까지 도달해 이끼 낀 바닥에 숨을 죽이고 웅크리자 기다렸다는 듯 손끝부터 저려왔다.
───찾아올 격통을 각오하는 건 몇 해가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쩌다 한 번씩, 특별히 규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길면 두 달에 한 번, 짧으면 2주 만에 찾아오기도 하는 아픔.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그저 사일란이 지닌 불량이라는 증거 중 하나가 아닐까 막연하게 짐작할 뿐. 미리 입안으로 진통제를 털어 넣어도 효과를 보는 일은 적었다. 곧이어 손발이 차갑게 마비가 되는 감각을 느끼며 에슬리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으, 우…… 읏, 우윽……ㅅ. 큭.”
엘버의 새벽 공기는 살을 엘 만큼 춥다는데 식은땀이 맺히는 걸 보면 이게 추운 건지 더운 건지도 분간이 가지 않는다. 다만 느껴지는 건 뜨거움. 제 뱃속에 누군가 풀무질이라도 하는 양 날 끝이 벌겋게 달아오른 바늘 수십개가 제 몸을 안쪽에서부터 찔러들어 고통스러워진다. 다들 언제나 이런 통증을 느끼고 사는 걸까? 통각에 둔한 몸은 왜 이럴 때만 평범해진 척 아픔을 호소하는 걸까. 참으려고, 참아내려고 했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에 탁하게 갈라진 비명소리가 잇새로 샌다. 비참해, 제길. 이럴 거였음, 태어나질 말았어야지. 상처가 날 것을 빤히 알았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담요 안쪽으로 제 팔을 감싼 천자락을 풀어내고선 손톱을 세웠다. 평소보다 몸 상태가 안 좋은 기분에 목덜미까지 벅벅 긁어내보지만 시원한지 아픈지 통증은 사라질 줄을 몰라 축축한 이끼 위에 엎어진 채 짐승의 그것과 닮은 억눌린 울음을 흘렸다.
아무리 목의 표식을 감추고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고 싶어도 때때로 찾아오는 이 기괴한 통증이 그녀를사람들 사이에 섞여들 수 없는 존재임을 고했다. 너는 불량품이라고, 이상한 것이라고 고통이 깨우쳐주었다. 발작을 겪고 나면 머리카락의 노란 빛도 더 강해졌다. 얼룩덜룩하고 더러운, 사소한 하나하나가 그녀에게는 콤플렉스였다.
이곳에 와서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고? 호의를 받고 있다고? 그걸 누가 모를까. 하지만 주어지는 호의와 그녀 사이에서 에슬리는 언제나 선을 느꼈다. 넘을 수 없는 선. 혹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 친구라고 말해주는 상냥한 사람들, 기대도 된다고, 의지해도 괜찮다고 내밀어주는 손들, 하지만 그런 것에 익숙해져버려선 안 된다.
「난 널 두고 갈 거다, 에슬리.」
「그 땐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든 혼자 남을 수 있도록, 혼자 남아도 괜찮도록 익숙해져야만 한다. 그게 후만의 훈육이었다. 그는 에슬리에게 불필요한 애정을 주지 않았고 그에게 의지하도록 두지도 않았다. 용병으로 산다는 건 그랬다.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삶. 정을 붙이지 않는 삶. 그는 널 두고 죽지 않을 거란 말 대신 내가 죽어도 넌 괜찮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 그가 그녀를 실베니아로 보낸 건 알 수 없는 의도였지만.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의도라고 하는 편이 맞을까.
아카데미에 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변화』그런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 머리를 만져오는 것이 어색하고 긴장되었지만 잠자코 있을 줄 알게 되었고, 손을 내밀면 맞잡을 수도 있게 되었다. 껴안아오는 체온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따뜻한지를 배웠고 함께 하는 시간이 어색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음을 배웠다.
옆에서 잠드는 사람이 생겼다. 어리광부려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친구라고 해주었다. 고대하던 축제에 함께 갔고 다음을 새롭게 약속했다. 치료해주는 손이 있었고 걱정해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런 머리카락임에도 예쁘다고 해주었다. 서툰 그녀에게 배움을 베풀어주려는 사람이, 혹은 반대로 고맙단 말을 해주는 사람이.
……굶주려 있던 애정이라는 것이, 호의라는 것이 제 메말랐던 사막 위로 비처럼 콸콸 쏟아졌다. 그것은 굉장히,
그녀에게는 아주 굉장히 두려운 일이었다.
───멀리서부터,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
우기가 찾아오면 단단한 줄로만 알았던 바위도 속절없이 깨지곤 한다. 모래로 된 바닥은 진탕이 되어 사람들을 꿀꺽 삼키고 안전하다고 생각한 바닥은 갑자기 와르르 무너졌다. 건조하게 뺨을 긁던 바람이 축축한 것으로 바뀌어 달라붙어서는 그대로 몸뚱이를 무겁게 만들었다.
사막에서는 비가 내릴 때 도리어 행동하기가 어렵다. 낯선 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에슬리는 빗물이 흘러내리도록 비스듬한 천막을 세우고 비가 그칠 때까지 얌전히 대기했다. 이 비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비라는 것은 바라지 않던 것까지 휩쓸어간다.
“혼, 자 있기… 싫어.”
감춰두었던 것을 드러나게 만든다.
“……싶, ──하아.”
간신히 지독하던 통증이 가시고 웅크린 채로 가만히 열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이런 비참하고 나약한 모습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데. 동시에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주길 바랐다. 달래주길 바랐다. 불쑥 든 욕구에 이러니까,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것이라며 혀를 찬다.
호의라는 것이 얼마나 얄팍하고 부질없는지 잘 알면서. 어떻게 한 순간에 날아가고 말았는지 경험했으면서. 무엇을 또 기대해버리는지.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소중해지면 소중해질수록, 그들을 좋아하게 되면 좋아하게 될수록, 그 반대 상황이 되었을 때 겪을 두려움도 따라서 커졌다. 들키고 싶지 않다. 또 다시, 이상한 눈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믿지 못하느냐고? ───12년 전에도 난 믿고 있었어.
……몸의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땀이 식자 한기가 감돈다. 풀린 천자락을 본래대로 다시 묶자 목덜미부터 뜨끈뜨끈한 열기가 전해졌다. 또 얼마나 긁히고 부은 거지. 두르고 있던 담요는 이끼와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돌려줘야 하는데. 짜증과 신경질로 범벅이 되어 담요를 다시 어깨에 묶고는 어느새 날이 밝기 시작한 양지로 발을 내디뎠다.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있다. 이 변화는 제게 독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누그러져 기대고 싶어진다.
당신은 이걸 위해 날 실베니아로 보낸 걸까?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지라고 한 건 당신이면서.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어. 원망을 내뱉다, ……품안의 펜던트를 으득 쥐곤 아침 일찍부터 현재로선 가장 보호자에 가까운 이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곧장 오라고 했으니까. 단지 그 말을 지키기 위한 것뿐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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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기 싫다는 내심을 깨닫고 싶지 않았는데,
깨달았는데도 혼자면 더 비참하니까.
라는 심정으로 영 서툴고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어리광도 부릴 줄 모르고 뭐든 혼자 참아내는 게 익숙하던 16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