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나온 말은 아니에요. 한 마디, 한 마디가 숨을 조이는 것만 같았어요. 심장이 쿵쾅거려서 그 소리로 머리가 꽉 차서 리브가 무슨 답을 주든 들을 자신이 없었어요.
멋대로 상상하기로는 뭐? 여기서? 지금 당장? 꼭 그런 말이 들릴 것만 같았는데요. 정작 리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대신에 한쪽만 드러난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바쁘게 굴러가며 하고 싶은 말이 전부 표정에 담겼죠. 평소 같으면 크게 터져 나왔을 목소리가 다 어디로 먹혀든 걸까요. 그만큼 제가 당신을 당황스럽게 했을까요?
그야 그렇겠지만.
리브가 자꾸만 저를 허락해주니까 어디까지 허락해줄 건지 그 선을 분명하게 더듬고 싶은 거예요. 리브를 대할 때면 나타나는 오랜 버릇인지도 모르겠어요. 부끄러움이 많은 리브는 솔직하지 못할 때가 많으니까 다가가고 묻고 더듬어 확인하기예요. 눈을, 입술을, 마음을.
-한 번만 눈 감아줘.
이 말 또한 그래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를 받아줄지 허락해줄지, 리브의 괜찮아는 어디까지 괜찮은 건지. 리브가 들려주는 좋아해는… 나랑 키스해도 되는 좋아해야?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이대로 입맞춰버리기엔 아까워. 또 아쉬워.
이런 키스는 싫어.
코끝이 바로 닿을 거리였어요. 그의 얼굴이 아주 가깝게 보였죠. 제 말을 못 이기고는 눈을 감아버린 얼굴이요. 타고나길 살짝 그을린 듯한 피부, 건강한 빛. 가까이서 보면 잔상처자국도 남아 있지만 자잘한 자국들 외에는 매끄럽고 깨끗해요. 긴장으로 질끈 감은 눈꺼풀 아래에는 단단한 눈동자─그 눈동자를 꼭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드는 게 좋았어요. 짓궂은 마음일까─, 꾹 다문 입술은요. 평소보다도 더 힘이 들어가 있어서 긴장인지 겁이라도 먹은 건지. 떨림인지 조금은 설레고 있을지.
……그럴 리는 없을까. 약간의 씁쓸함과 자조를 낼름 삼키고 저는 안대 위로 손을 뻗었어요.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러면 리브는 또 오기를 부릴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괜찮지 않으면?’
……같은 답이 나왔다간 내가 울지도 모르니까.
꼭 5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던 기억이 나요. 그 땐 귀엽게도 뽀뽀해달란 떼를 썼었죠. 하지만 리브가 정말 못하겠으면 무리하지 말라고도 했어요. 그 때랑 지금이 꼭 같네요.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의 그는, 제 괜찮단 말에, 하지 않겠다는 말에 안심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속상하게도 말이죠. 아, 리브에게 속상한 게 아니에요. 제 감정이, 제 수법이 꼭 못된 것만 같아서요. 저는요. 늘 그렇지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은 거지 리브의 마음을 강요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의 이 모습은 꼭 리브가 저를 거절 못할 걸 알고 억지라도 부리는 것 같았어요. 같은 게 아니라 맞을까요.
겉도 속도 아주 강한 리브지만 사실은 무른 면이 있고 사람을 대할 때엔 은근히 겁이 많은 걸 알아요. 여기서 자신이 저를 거절했다간 제가 상처 입을지도 모른다고, 혹은 이걸로 우리 사이가 어색해질지도 모른다고 그게 싫어서 벼랑 끝까지 주우욱 밀려난 채 눈을 감고 있는 거예요.
나란 애는 어떻게 이렇게 치사하고 비겁할 수가!
싫지 않다고 옆에 있어달라고 들려온 말에 한껏 부풀었던 기세가 제 앞에 놓인 얼굴을 보고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다 죽고 말았어요.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에요. 제가 기대한 첫키스는요. 이런 게 아니었어요.
「아이가요? 어떻게 생기는데요?」
마냥 무지하고 또 무구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아빠는 딸아이를 성교육 시키기엔 수줍음 많은 사람이었고 저는 그 때 고작 열넷이었으니까 나중에, 조금만 더 나중에, 하던 것도 이해가 돼요. 그 때만 해도 제게 뽀뽀는 친애의 표시이자 인사에 불과했고 허그도 마찬가지였거든요.
외의 스킨십은 정말 상상도 못한 채였죠. 아주 무지헀거든요!
그랬지만 아이가 언제까지 아이인 채로는 있을 수 없잖아요. 디모넵은 벌써 열아홉인걸요. 저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알게 된 만큼 흥미와 호기심이 생겼고 언젠가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입맞춤이란 걸 해볼까? 상상도 해보았어요.
상상속의 입맞춤은 무척이나 설레고 또 조심스럽고 행복하고 벅찬 기분에 빠지게 했어요. 친애와 인사의 키스와는 전혀 달랐죠. 서로 좋아해서 하는 거구나. 이런 거구나. 꿈을 꾸게 만들었어요.
결코 이런 게 아니었던 거예요.
물론 리브에게 가진 애정이 특별한 색이라는 것을 자각하고부터 상상해본 적이야 있죠. 메르헨으로 충만할 열아홉이잖아요, 이해해주세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부끄러워서 제대로 상상하지 못했어요. 다만 우리가 좀 더 설레는 얼굴을 하고 입술을 맞대었다가 종국에는 서로 웃고 말았다고 행복한 상상을 했죠. 사랑받는 감각이 있었어요.
세 번째로 말하는데요. 지금 눈앞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어요.
그래서 정말 최악이고요.
처음 제 앞에서 눈을 감은 리브를 보았을 땐 두근거리기도 하고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서 양심이 저릿저릿하기도 하고 그래봤자 역시 이런 식으로 하는 첫 키스는 아쉽지 않을까? 정도의 기분이었는데 조금 더 생각하자 최악이 되어버리고 만 거예요.
저는,
결코,
리브의 마음을 이용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미지근한 온도를 머금은 손끝으로 안대를 더듬다가 조심스럽게 끈을 풀고 벗겨냈어요. 지금은 옅어졌지만 여전히 그 깊이가 선명한 세 줄의 상처를 어루만지자 눈꺼풀이 움찔거리고 떨려왔어요.
그래도 리브는 눈을 뜨지 않았어요. 이게 신뢰의 의미였다면 기뻤을 텐데. 지금 당신은 무슨 생각 중일까요. 알 수 없어서, 저는 그래서, 그에게로 몸을 기울여서──
chu.
상처 난 눈꺼풀 위에 살며시 키스하고 떨어졌어요.
“싫다거나 안 된다는 말 정도는 해도 되는데.”
평소엔 잘만 버럭 화내놓고 이럴 땐 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거야. 괜히 속상했죠.
“……리브가 뭘 걱정한 건지 알지만 반대로 여기서 리브가 싫다고 한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되지 않는걸.”
당연해야 할 전제마저 불안하게 만들어버린 걸까요, 제가. 뼈가 시릴 것 같은 실감과 자책이에요. 어리석은 디모넵.
한 차례 시린 바람이 지나갔어요. 그제야 머리가 식었죠. 사랑받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에요. 주는 건 간단한데. 괜찮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던 것도 같은데 사라지고 말았어요. 누구든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대놓고. 카드는 거짓말쟁이.불이 꺼진 거실의 온도가 어쩐지 쌀쌀해서, 바깥은 완연한 봄인데 이곳은 왜 이리 시린지 그에게서 슬쩍 몸을 물리고 구겨진 옷자락을 당겼어요.
당황한 건지 안심한 건지 알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며 사과만은 필사적으로 삼켰죠. 여기서 사과했다간 모든 게 무너지고 말 것만 같았거든요.
“역시 리브가 바라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싫어. 몹시 슬플 거야.”
슬프다고 말하면서 얼굴은 웃었어요.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잔뜩 힘을 내야만 했어요. 사랑은 질 줄 모르고 벚꽃만이 다 져버린 어느 봄의 끝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