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의 생일 전날 밤은 매해가 그러했듯 무척이나 설레었습니다. 하루 일찍 도착한 친구들의 생일 선물, 자정을 기다리는 축하메시지, 내일을 기대하라는 동거인의 자신만만한 표정. 하루하루가 꽃피는 봄날처럼 행복하고 평온하지만 1년에 한 번 오는 기념일이란 유독 각별해서 그 날 밤 침대에 누우면서도 괜한 설렘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보내온 선물도 매해 그러했듯 잘 도착해 있었습니다, 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지가 언제였지요. 누군가의 생일을 챙기는 당신의 모습이 한 때는 도통상상이 가지 않았었는데, 받은 편지와 선물이 나날이 쌓여만 갑니다. 내일 케이크와 함께 개봉할 21번째 생일선물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문득 떠오른 감상은 이날을 기점으로 제가 첫 만남의 당신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는 겁니다.
트레이너 캠프에서 처음 만났던 당신은 신원불명의 미스테리한 사람이었죠. 사람이 맞는지조차도 의심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사실은 겨우 스물한 살, 캠프의 평균 연령을 따졌을 때 많지도 않은 나이였는데 당시의 제게 당신이란 기묘할 정도로 오래된어른이었습니다.
정작 그 때의 당신과 같은 나이가 되고 만 저는 나이에 맞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 당신의눈에 저는 얼마나 어렸을까요. 지금의 제가 열네 살의 아이를 만난다면 당신처럼 해줄 수 있을까요? 열네 살의 저는, 스물한 살의 당신은, 스물한 살의 저는, 그리고……
……
……
……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구름시티 한복판이었습니다.
한눈에 구름시티라고 알아볼 수 있던 건 그야 실제로 방문해본 덕도 있지만 당신이 들려주었던 이야기 속 풍경과 꼭 닮아있어서였습니다. 과거는 두고 왔다고, 현재에서 잘라내 버렸다고 무감한 빛으로 고개를 돌리던 당신이 어느 날인가 직접 들려주었던 옛날이야기가 그만큼 마음에 남았던 것이겠지요.
소리가그려내던 풍경이 바로 눈앞에 있었습니다. 하늘에 닿을 듯 구름을 뚫고 솟은 높다란 빌딩의 숲, 그 앞으로는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바닷가, 잘 꾸며진 공원과 산책로, 인산인해의 구름아이스 판매대.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의 중심에 우뚝하던 어린 당신까지도 말이죠.
어린 당신?
네. 어린 당신.
찌를 듯한 뙤약볕, 매미가 우는 소리,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아스팔트의 열기, 축축한 숨. 모든 색이지나치게 선명해 이지러질 것만 같은 사이로 한 소년이, 소년 모습의 당신이 서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금세 알아보았습니다. 머리색이 같고 눈색이 같다고 해도 지금의 당신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아이였는데 금세, 한눈에요. 잘 넘긴 연보라빛 머리카락, 몸에 맞춘 반듯한 꼬마 양복, 단정한 넥타이, 한 올 흐트러지고 구겨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듯한 차림새는 작은 발을 꼭 감싼 구두코의 광택까지 완벽하기만 했습니다. 결코 이런 데 어울리는 차림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어린 당신은 한점 흐트러짐 없이 뙤약볕 아래서 무언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가만히 또 지그시 서있었습니다.
꿈일까요? 열네 살의 저보다도 한참 작고 어린 당신을 눈앞에 두다니. 아무도 모르는 당신의 모습이 마치 열어선 안 될 상자를 열어버린 것처럼 두근거렸습니다. 내가 이런 모습을 함부로 봐도 되는 걸까? 란 생각부터 들었지요. 하지만 꿈의 강제성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눈앞의 풍경은 제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저 또한 결국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당신을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자가 점처럼 작던 시간부터 꼬리를 길게 빼 가장 길어지는 시간까지 당신은 아이스크림도 아스팔트도 녹여버릴 것만 같은 볕 아래를 꿈쩍도 하지 않고 서있었습니다. 왜 하필 그 자리에 서있던 걸까요. 하다못해 그늘에 들어가도 좋을 텐데, 창백한 얼굴 위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빳빳하게 넘겼던 머리카락이 풀려서 구불구불하게 내려오도록 어린 당신은 오기를 부리듯 그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런 당신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모두가 지나쳤습니다. 꼭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유령처럼.
그 모습이외로워 보여서, 쓸쓸해 보여서, 탈수가 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 또 대견해서, 기특해서, 안타까워서.
아직은 저렇게 버티고 서 무언가를 기대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당신을 저라도 좋으니 격려해주고 싶어서, 지탱해주고 싶어서 저는 끝내──당신이 기다리던 이가 저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찰을 포기하고 관여를 택하였습니다.
당신의 이야기에 불쑥 등장인물이 되어도 되는 걸까요. 주저하면서도 몸은 멋대로 움직여당신이 간간이 곁눈질하던 구름 아이스를 두 개 사 다가갔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긴장했습니다. 모두가 당신을 지나치는데 당신은 과연 그곳에 있는 걸까요. 나는 당신에게 보일까요?
“안녕하세요?”
“……누구?”
어느 뜨거운 여름, 시간을 넘고 공간을 건너 우리가 나눈 첫 인사입니다. ──다시는 이 날의 아이스크림을 맛보지 못할 테지요.
우리는 나란히 벤치에 앉았습니다. 제 옆에 한참 작은 당신을 보며 저보다 한참 컸던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그 시절의 당신은 한마디로 표현해 ‘관조적’이었습니다. 타인에게 깊이 관여하지 않고 마음을 나누지 않고, 또 정을 붙이지 않으며 얽히지 않는, 연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감상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잡히지 않고 저는 내려앉아 있습니다. 종종 그 거리감을 쓸쓸하게 여길 때도 있습니다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눈앞의 아이는 아직 바람을 타고 오르지 않은 바이올렛 가문의 도련님, 얀이었으니까요.
처음 만났을 적의당신은 수수께끼의 남자 와이 씨였고 이어서는 상냥한 와이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에게서 구름시티 출신, 얀 바이올렛이라는 소개를 듣기까지 돌아보지 않기로 한 뒤를 돌아보고 묻어두려고만 했던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변함없이 채워지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는 있었지요.
무언가를 욕심내는 일, 열망하는 일,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는 일, 누군가에겐 지극히 당연하지만 당신에겐 부재한 것. 그래서 제가대신 바라던 것.
눈앞의 소년에게는 아직 존재하는 것. 꿈이란 참 신기합니다.
뙤약볕 아래서 아이는 종종 아이스크림 가판대를 힐끔거렸습니다. 먹고 싶었던 걸까요? 소소하지만 분명한 열망. 제가 나타나 내밀자 경계하던 아이는 결국 아이스크림의 유혹에 넘어간 듯 받아주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함부로 받으면 안 된댔는데. 조그맣게 흘러나온 중얼거림은 어디로 보나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여서 마냥 귀엽기만 했습니다. 제게는 늘 너그럽던 당신의 시선도 꼭 지금의저와 같았을까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어요? 제 물음에 아이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머뭇거렸습니다. 말해도 될지 모르는 것도 같았습니다. 오랜 인고 끝에 주저하며 나온 답은 ‘기다림’이었습니다.
오래도록, 또 아주 오래도록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을 기다리느라 돌아가지 않고 있다고.
가족인 걸까요? 부모님? 하지만 왜 굳이 이 뙤약볕 아래서 스스로를 혹사시키며 있던 걸까요. 집에서 기다려도 될 텐데요. 다 알면서도 물어봤습니다. 어른이란 약은 존재죠.
당신은 제 물음에 힐긋 웃으며 ‘간절함’이라고 답했습니다. 기도와 닮은 걸까요. 경건하기까지 한 답입니다.
어린아이 모습의당신이 제게 간절함을 말했고 기대를 말했고 바람을 말했습니다.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과거가 분명히 있었군요. 만일 이때의 당신이 혼자가 아니었더라면, 그 간절함에 응답이 돌아왔더라면. 그랬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요?
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언젠가의 당신과 같은 나이가 되어 같은 눈높이를 하고, 당신과 같은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저는 무의식중에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은꿈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버렸습니다.
새까만 눈동자가 달리아 씨가 주고 간 돌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두 눈을 마주 보며 무릎을 굽히고 시선을 맞추었습니다. 당신이 제게 해주었던 것처럼 저도 당신에게.
“앞으로 힘든 일이 많을 거예요. 홀로 견뎌야 하는 일도 많겠죠. 많이 울지도 몰라요. 우는 것마저 포기할지 몰라요. 무척 외로울지 몰라요.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될지도 몰라요. 미래의 당신은 그런 스스로에게 아쉬움조차 느끼지 않고 후회도 연민도, 소중히 여겨야 할 많은 감정의 잔재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그러니 제가 대신 '아쉽다'고 말해도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당신의 ‘그런 표정’을 봐버린 탓일 겁니다. ‘만일 그 때에 그랬더라면.’ 하고 두 사람 나란히생각해버린 탓입니다.
그 때 지나치지 않았더라면, 손을 뻗어보았더라면, 지금의 당신이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마음이 메마르고 비가 오지 않더라도부디 씨앗을 남겨주세요. 언젠가 먼 미래에, 당신을 사랑해줄 사람이 나타나 당신을 흠뻑 적시고 싹을 틔워…… 잊어버린 줄 알았던 행복이 무엇인지 꽃피울 수 있을 때까지.”
어째서 낯선 사람이 나타나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의아함과 경계를 숨기지 않는 풋된 눈동자를 보자 참으려 해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귀여웠어요. 한편으론 마음이 아릿했습니다. 이런 말을 남긴다 하더라도 당신 앞에 놓인 운명이란 변함없는 것이었기에.
우리가 만나기까지 길고 긴 시간을 앞으로 홀로 견뎌야 하기에.
“행복하게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요. 그게 가장 큰 선물이 될 거예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얀.”
오늘은 제 생일이니까 조금은 제멋대로 굴게 해주세요. 이제는 어리광도 잘 부리지 않잖아요. 어리둥절한 당신을 한 번 폭 껴안고 동그랗게 드러난 이마에 키스했습니다. 휘둥그레진 눈동자를 보고 프하 웃고 나니, 아. 어느덧 돌아가야 할 시간인가 봐요.
아이스크림 가판대는 장사를 접었고 행인들은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아주 느리게 지는 해는 하늘을 옅은 바이올렛 빛으로 물들여 갔습니다. 예쁜 하늘이지요.
이걸로 이별이라면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어떤 멋진 말을 해줄까 고민했지만 저는 시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신, 귀여운 아즈텍을 떠올리며 몰래 천기누설을 하였습니다.
“스물한 살의 생일까지 파이팅이에요.”
・
・
・
그리고 저의 스물한 번째 생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아직 얀이 주신 선물은 뜯어보지 않은 채입니다. 일어나자마자 당신에게 이 꿈부터 전하고 싶어서, 세수도 하지 않고 펜부터 잡았어요. 하지만 슬슬 마무리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아까부터 아래에서 맛있는 냄새가 저를 유혹하고 있거든요. 얀도 좋은 아침 되었나요? 다음엔 언제 또 와주시나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땐 꿈 이야기도 좀 더 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