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생겼다. 전에도 있었지만 이번 집은 다르다. 에슬리의 집이다. 루와 함께 사는 집이다. 그 말이 몹시 특별했다.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이면서 누가 뭐래도 내 것인 공간. 나의, 우리의 집.
「에슬리랑 같이 살고 싶어.」
우리의 것이었다. 그가 욕심내고 그녀가 욕심낸.
단순히 공간을 갖게 되었단 의미가 아닌 걸 그는 얼마나 알까. ‘우리집’이라는 울림이 에슬리에게 주는 특별함을. 그 순간에는 조금 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슬프거나 기쁜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먼 길을 맨발로 걷던 끝에 찾아낸 더는 걷지 않아도 되는 곳. 옆자리가 비지 않는 곳. 당시의 감정을 말로써 풀어낼 수 있던 건 조금 더 지나서의 일이지만. 그 때는 마냥 벅차올라 발만 동동 굴렸다. 떠올리면 살짝 부끄럽기도 하다.
그에게 같이 살자는 말을 들은 게 작년 가을로 반년에 걸쳐 기사단을 그만 두고 새로운 집을 고르고 이삿짐을 싸고 꼼꼼히 준비를 마친 끝에 베일에 터를 잡은 지가 다시 반년이다. 꽃 피는 계절에 이사해 어느덧 낙엽 지는 계절이 되었지. 그럼에도 에슬리는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옆자리를 더듬었다. 아직 습관이 들지 않았다. 혹은 반대 습관이 들어버린지도 모른다.
대체로 더듬는 옆자리는 따스했고 때때로 비어 있기도 했다. 그러면 약간 허전했지만 기사단에서 머무는 동안 더듬던 공백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정말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이트바테르의 그곳을 손님처럼 오가던 시절과 지금은.
이제까지는 어떻게 그 공백을 견뎌왔을까. 그 때는 그랬다. 견딘다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겼다. 돌이켜보면 참았고 견뎠고 욕심내기 두려워하는 나날이었다. 영원을 믿지 못했다. 안락함과 안온함을 불안히 여기며 견딜 수 없었다. 하루가 행복하면 그 다음 하루는 상실을 준비했다. 상처받아도 좋다는 각오를 한 것일까 덜 상처받고 싶어 겁쟁이처럼 굴던 것일까.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용기는 다 어디 갔던 건지.
사귄 햇수가 벌써 3년, 실감이 나지 않는 건 헤아린 숫자이지 사랑이 아니다. 끝내 에슬리는 한결같은 연인의 애정을 받아들였다. 그와 함께 맞이할 끝이 영원이어도 영원이 아니어도 기꺼이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감정과 감정의 위에 선 사랑에도 불구하고 마음 어딘가에 선을 긋고 있던 것은 그를 향한 배려였을까, 두려움이었을까. 차마 어리광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 사양은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언젠가 미래에, 우리가 그 필요를 인정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거야. 기다리며 미뤄두기만 하던 나날이었다. 뒷짐 져 감춘 손이 밤공기에 식어갈 즈음, 그가 먼저 손을 잡아주었다.
「에슬리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 어딘가에서 내가 모르는 네가 쌓여가는 게 싫은가봐.」
「더 가지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잃기 싫어서.」
이것은 나아지지 못한 걸까. 나아질 수 없는 걸까. 그러나 이 마음마저 긍정하며 기꺼이 고백해야지.
나도 그래, 루. 나도 그랬어. 내가 없는 시간 속 루의 시간을 질투하고 더 가지고 싶었어. 놓치고 싶지 않았어. 이런 마음이 괜찮은지 알 수 없어서 말하지 못했어. 삼키려 했어. 그랬는데――, 루가 말해주었어.
그래서 기뻤어. 몹시 기뻤어.
★
★
★
그 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별이 쏟아지는 하늘과 낙엽 지는 조용한 거리와 어슴푸레한 가로등의 빛과 가을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바깥을 채우고 초를 켜두어 온화한 방의 공기와 책 냄새, 그보다 짙게 밴 차가우면서도 온기를 머금은 그의 냄새와 짐짓 뻔뻔한 목소리와 확신 대신 안심을 담은 눈동자와 너머로 애정어린 눈빛과 설핏 각도를 옮겨 내려앉던 입맞춤까지 일련의 풍경들이 너울져 파노라마 치는 가운데서도 몇 번을 되새기고 되짚어도 돌이켜 다른 말로 치장할 수 없는 가장 진솔하고 꾸밈없는 고백을 들었다.
유치하게도 머릿속에서 불꽃놀이가 터졌다. 세상이 온통 따스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 차는 경험을 하였다. 지금 이대로 세상이 멸망해도 좋다고 여겼다. 아니면 이렇게 시간이 멈춰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랐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그래서는 루에게 닿을 수 없어. 만지고 껴안고 입 맞출 수 없어. 함께 숨 쉴 수 없어.
그래서 에슬리는 이대로 세상이 멈추길 바라는 대신 마음을 내달렸다.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말을 전했다.
지금까지 고백한 사랑과 같이.
앞으로 고백할 사랑까지.
그리고 오늘 밤도 변함없이 또 더없이,
루를 사랑해.
이런 걸 사람들은 영원이라 부르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도 영원을 불신하면서 영원하거나 영원하지 않은 사랑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영원을 부정하다가도 속절없이 갈망하고 말 거야. 영원을 헤아리는 만큼 영원히 갈증내겠지. 세상에 오직 사랑이나 영원, 그 두 단어밖에 없는 것처럼.
그리고는 당신의 손을 놓지 못한 채 반복되는 답을 구하는 거야. 당신은 지겨운 기색 없이 답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