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지저귀듯 시종일관 들뜬 투를 하며 소녀가 돌담 위를 걸었다. 할머니는 아주 똑똑하고 멋진 분이셨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걸음이 이대로 지면을 딛고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스트레아 C 모겐스에게 있어서 그 일은 종아리를 팽팽히 당겨 뛰어오르든 마법을 쓰든 아주 쉬웠다.
“엄마도 아빠도 그리운 표정이었어.”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가 덩달아 그리워지기라도 한 걸까. 청은의 눈동자가 풍성한 속눈썹 아래 끔뻑였다. 고개가 기울어짐에 따라 조막만한 얼굴이 은발에 감춰지면 그 모습은 또 얼마나 가련하고 사랑스러운지. 어디로 보나 사랑받고 자란 티가 듬뿍 묻어나는 소녀였다. 실은 얼마나 영악하고 건조한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는 소녀의 오빠만이 알았다.
“엄마는 내가 아빠를 안 닮아서 다행이래.”
지금도 봐, 아버지를 빼닮은 곱슬머리를 넘기며 짓는 저 표정. 어머니의 말에 ‘겉은 미인인 아버지를 닮아서 잘 됐지만.’의 의미가 들어 있는 걸 알고 하는 거지. 어머니가 저 이야기를 할 때 아버지라면 분명 기다란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 ‘그러게. 안 닮아서 다행이야~’ 답했으리란 것도 소년은 알았다. 화목한 부부다. 덧붙이자면 그 자신은 어머니를 닮은 제 외모에 불만이 없었다. 그야 소년은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그보다도 지금은 눈앞에서 위태롭게 살랑거리는 여동생이 더 중요했다.
아스트레아(Ἀστραία). 별 아가씨라는 의미가 담긴 이름. 어느 먼 신화 속 정의와 천문의 여신이라고도 들었다. 그 이름처럼 소녀는 정의로웠고 영리했으며 별처럼 반짝였다. 어디로 보나 신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종 소년은 여동생이 불안해졌다. 그녀가 어느 날 손에 잡히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인간의 힘으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나같이 근거는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간 오빠는 감성적이란 소리를 듣진 않을까. 불현듯 해의 꼬리를 물고 느리게 저물어가는 빛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쓸쓸한 건 제 기분이었다. 고독이 변덕스럽게 덮쳤다. 막연한 불안, 기묘한 예감, 알 수 없이 술렁이는 기분과 발밑이 출렁이는 것만 같은 불안정. 수면 위를 걸었다. 제가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지면이, 세계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런 내면을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아무리 소중한 여동생이라 해도 나를 알아주진 않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소년은……
──문득, 바이올린 활을 잡고 싶었다. 손끝이 근질거렸다.
“리온, 오빠. 내 말 듣고 있어? 아직도 삐진 거야? 아카데미에서 성을 따로 쓰기로 한 것.”
“그런 거 아ㄴ……, 기껏 잊고 있었더니.”
해 질 무렵의 빛이 사막을 덮은 것 같았다, 소년의 머리색은. 건조하고 메마른 성질이라 오해받기 쉬웠다. 만져보면 촉촉할 텐데.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보며 소녀는 빙그레 웃었다. 새까만 시선이 째릿하고 닿았다.
눈매가 조금 사나울 뿐이지 소년은 여동생을 진심으로 미워하지 못한다. 미워하지만 못할까, 지극히 사랑하겠지. 그 감정을 숨길 줄도 모른다. 그만큼 정직하고 선량하고 또 요령 없는 장남이었다. 단델리온 M 챠콜은.
단델리온(Dandelion)─리온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한 때는 자기 이름에 불만이 있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란 부부간의 애정의 증거라 한다지만 어머니가 연상되는 꽃 이름을 첫째 아이에게 붙이다니. 지나치게 팔불출 같지 않은가?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은 무신경한 누이와 달리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인 장남에겐 꽤나 고민스런 문제였다는 모양이다.
여기에는 ‘그럼 개명할래? 자기 이름을 직접 고르는 것도 좋지.’ 하고 무신경함 1번인 엄마와 ‘에슬리와 리온이 바란다면 나도 이견은 없어.’ 하고 엄마 말이면 대체로 yes인 아빠 탓도 있었을 테지. 종합적으로 소년은 이 가족 사이에서 자라기엔 한 송이 꽃처럼 속이 여렸다. 안타까운 일이라고 여동생은 남의 일인 양 손위 형제를 동정했다.
지금도 겨우 성씨 하나 갖고 세상이 무너질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모겐스가 앞으로 오든 챠콜이 앞으로 오든 뭐가 그렇게 문제라고. 남매가 성을 따로 쓰는 게 얼마나 큰일이라고. 처음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빠도 잠시 머뭇거리며 “그건 꼭, ……이혼이라도 한 것 같네.” 라고 말하기는 했지만(그 말에 엄마는 크게 웃었다. 재밌었나보다.) 이럴 때 보면 아빠와 오빠는 제법 닮았다.
아빠도 과거에는 오빠 같았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섬세하고 예민하고 감성적인, 그만큼 어딘지 조금 불안정한. 지금은 부부는 닮는다는 말처럼 무심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소녀는 딱 지금의 부모님이 좋았다.
그래서였을까. 부모님은 때때로 저희 무심함을 닮은 어린 딸을 무릎에 앉히고 속삭였다.
‘오빠를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돼. 대신에 가끔, 외톨이 같아 보일 때 손을 잡아주렴.’
그 순간이 지금임을 알았다. 소녀는 부모님의 말을 충실히 따라 오빠가 왜 방황하는 사춘기 청소년 같은 눈을 하는지 이해하려는 대신 불안하게 꼼지락거리는 그 손을 움켜쥐었다.
“레아…?”
“가자, 리온.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그는 정말 민들레를 닮아 있었다. 잡힌 손을 향하는 쑥스러운 미소를 보며 소녀는 오늘도 부모님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꼈다.
이렇게 생긴 아이들이랍니다. 아스트레아는 사실 정확한 발음으로는 아스트라이아 하고 하는데 어느 쪽이든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