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비극을 좋아한다. 에슬리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예술가들은 언제나 비극에 관한 시와 노래를 적었고 지식인들은 인간에게 들이닥치는 비극에 관한 고찰로 몇 백 페이지짜리 두꺼운 책을 쓰길 즐겼다. 가장 비극에 휘말리기 좋은 아무 능력 없이 평범한 인간들은 어떤가. 불행에 심취해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애를 채우거나 그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영웅을 기대하거나 가끔은 자기들 손으로 희생양을 골라내 그를 추대하는 척 은근슬쩍 제물로 바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비극 뒤엔 무엇이 남느냐고? 아무것도 남지 않거나, 그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의 재를 밟고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극을 좋아한다. 그들이 비극을 좋아하는 건 그것이 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여기엔 비극에 무릎 꿇은 이는 이미 재가 되는 일 외에 항의도 하지 못한단 점도 있다. 모든 죽은 자는 말이 없지─. 머나먼 곳에서 벌어진, 혹은 지척에서 벌어진, 그러나 내 것은 아닌 비극. 온 감정을 이입해 안타까워하고 눈물 흘릴 수도 있지만 결국은 남의 일인 비극. 그들이 좋아하는 비극이란 대개 이렇다.
에슬리 챠콜은 비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신파도 딱 질색이다. 그녀는 제 이야기로 눈물을 쏟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를 위한 비극으로 소비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 바라지 않는다고 말할 만큼 거듭 또 거듭 겪었다. 그녀에게 비극은 예술가의 시나 지식인의 고찰이나 옆집에서 벌어진 안타까운─그러나 결국 내 사연은 아닌─일이 아닌 바로 제 집에 난 불이었고 옆 사람이 아이고 어떡하니 참 안 됐구나. 하고 불구경을 할 때 집이 불에 타고 있는 당사자였다. “신이 있다면 그것 참 내가 재밌는 모양이야. 나를 갖고 노는 게 말이지. 어디 그 면상 한 번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리 투덜거리고 짜증을 내며 다 타버린 잿더미 집의 위를 밟고 서던 게 제 인생이었다. 재투성이 꼬마. 비극의 챠콜. 잠깐, 난 바란 적 없다니까? 날 멋대로 소비하지 말라고. 잠시만 방심하면 이 모양이다. 에슬리는 손을 붕붕 내저어 파리처럼 꼬인 구경꾼을 흐트러트렸다.
대신 그녀는 행복한 이야기가 좋았다. 어린애들의 유치한 동화도 좋았다. 아주 조금의 난관이라면 뭐 봐주지 못할 것도 없다. 노력하는 이야기도 좋아하니까. 하지만 결말은 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야 해. 영원을 믿지 않는 그녀에게 있어 완벽하게 닫힌 구조로 끝나는 동화는 안도를 주었다. 이 뒤페이지에 새로운 비극이 기다릴지 혹은 파국이 기다릴지는 생각하지 않고 궁금해 하지도 않을게. 그냥, 그냥…… 행복한 채로 있어줘. 아. 이거 답지 않게 연약한 소리였을까? 어쩌면 모르는 사이 행복에 물러져버린 걸지도. 많이 바뀐 걸지도 모르겠다. 저란 인간은.
그러고 보니 올해 여름은 비가 많이 왔다. 이렇게 비가 많이 와서는 과일이 달지 않다고 과수원을 하는 제이가 말했다. 나무한테는 비가 많이 오는 게 좋지 않아? 물어보자 제이는 습한 날씨 탓에 축축하게 젖은 목수건으로 그을린 얼굴을 닦으며 웃었다. 그의 시선이 종종 마음에 안 든다. 이제 그녀는 어디로 보나 재투성이 꼬마가 아닌데 꼭 저렇게 어린애 보듯이 굴었다. 물론 지금이라면 그의 시선을 인자하다고 표현할 줄 안다. 온 세상이 적 같던 어린 시절과 달랐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않는 거다. 아무튼 제이가 그랬다. 과일이 단 것은 그만큼 나무가 절박했다는 증거라고. 제 몸이 비쩍 마르고 뒤틀리는 인고의 노력 끝에 맺은 결실이어야 단 것이라고. 노력할 것 없이 목까지 축축이 젖어서 배부른 채로는 과일이 맛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그것 참 세상은 요지경이고 사람만큼이나 신도 비극을 좋아한다. 아니면 노오력이란 걸 좋아하든지. 그냥 좀 배부르고 편안할 때도 맛있게 해주면 어디 덧나나. 투덜거리는 에슬리에게 티는 빗물을 욕심껏 삼켜 투실투실 불어서 단맛이라곤 없는 복숭아 하나를 쥐어주었다. 그 복숭아에게선 물러터진 맛이 났다.
신이 보기에 에슬리 챠콜의 인생도 고난과 역경 끝에 단내가 풀풀 나는 비극의 결실에서 흐물흐물 물러터져 맛대가리 없는 과일 같아진 것이 틀림없지. 그러지 않고서야, 그게 아니고서야. "거지같아." ──아아. 다시 생각해도 비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란 짜증이 나고 에슬리 챠콜은 비극을 지독하게 싫어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은 날 불시에, 부조리하게, 폭력처럼 떨어지는 비극이라는 것은 얼마나 ‘극’적인지 울며 동의를 표하는 수밖에 없다.
그 낮은 지나치게 푸르고 희었다. 과분하도록.
새파란 하늘, 새하얀 구름, 연인의 미소, 완벽한 세 박자사이에서 《그것》은 이물질처럼 툭 튀어나왔다. 세계를 북 찢으며 비져 나온 붉은 손은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챠콜이 예의를 운운하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지─시계 하나를 두고 갔다. 검은 모래시계의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시간 안에 루 모겐스를 죽이지 않으면 세계는 멸망한다 -60:00】
오직 에슬리 챠콜의 눈에만 보이는 시계였다. 샛노란 모래알이 하염없이 아래로 향했다. “에슬리?”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투명하고 무구하기만 했다. 보이지 않는 걸까? 색이 다른 두 눈에는 온전히 그녀만이 담겨 있었다.
-58:59 그가 내는 l 발음이 좋았다. 그녀의 귀에는 다른 음에 비해 독특한 굴림음으로 들렸는데 그게 엘버 쪽 사람들의 특징인지 그만의 특징인지 에슬리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소리를 기억하기엔 족했다. 누군가의 대신으로 시작한 이름이 온전히 제 것이 되기까지 무수히 반복해 불러준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이란 가히 그에게 이름불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해준 사람이다. “루.” 비극과 신파로 점철되어 있던 삶에 새로운 구간을 만들어 준 사람. 그는 제 유일이었고 곧 세계였다. 두 손을 뻗자 당연하단 듯 팔 벌려주는 그에게 에슬리는 단숨에 뛰어들었다. 함뿍 호흡을 삼키며 풍겨오는 냄새에 코를 묻었다. 이제 같은 세제를 쓰는데 왜 품에서 나는 냄새는 다를까. 언제쯤 제게는 그의 냄새가 밸까. 갑자기 어리광이야? 머리 위에서 들리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에슬리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품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고 있는 게 서로 좋잖아. -51:25 그도 딱히 부정은 않았다. 그 사이에도 모래알은 하염없이 떨어졌다. 별이 추락하는 것 같았다. 저 알갱이 하나하나가 전부 목숨이다. “있지, 루. 멸망은 아프려나?” 혼잣말이 툭 알갱이 틈에 섞였다. 그가 찡그렸다.
-46:33 재차 말하지만 에슬리 챠콜은 비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유치한 신파도 질색이다. 세계 멸망이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든 첫 생각은 이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였고 이어서는 선명한 악의와 관음을 향한 분노였고 마지막으로는 대충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한 분노였다고 치자. 화가 많은 편이 아니었으나 세상이 늘 그녀를 화나게 했다. 이 분노를 화나게 만든 당사자에게 풀 수 없다는 것도 억울함의 하나다. 그러니 해소할 곳 없는 분노에 열을 올리기보다 에슬리는 차라리 냉정해지기로 했다. 그녀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굳이 악을 행하지 않으나 동시에 선해지고자 하는 욕심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 그녀의 선택에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 손가락을 꺾어버려야지. 왜 내게 뭐라고 해? 원망하려면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든 신을 욕해야지. 아무도 내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어. 그래. 무얼 선택할진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모두가 알았을 테지. 그런데도 뻔한 신파를 보겠다고 이런, 웃기지도 않는. -40:44 “에슬리.” 그가 눈치 챘다. 연인이 이상해 보였나. 에슬리는 억울함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옛날에는 억울하고 서러워도 울 줄 몰랐는데 달래줄 사람이 생겼다고 이렇게 퉁퉁 불어 물러터진 복숭아 같이 볼품없어진 걸까. “왜 그런 표정 지어. 무슨 일이야?” 걱정스런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지금 같은 낮보다 밤에 진가를 발휘하는 목소리이다. 한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누군가와 같이 지새우는 밤은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나도 늘 같은 온기를 주었다. 그 밤이 어제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 아직 실감나지 않았다. 앞으로 40분 안에 납득하라니 무리잖아. 아, 40분도 남지 않았어.
-39:02 포기할 줄 모르는 버릇은 많은 상처를 남긴다. 이 점에서 에슬리 챠콜은 상처투성이였다. 만약 그녀가 과일이었다면 아주 단단히 여물어 알차게 익었음에도 불구하고 병풍해의 자국이 너무 많아 실과처리 되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과일이 아니었고 상처를 낼수록 단내가 풀풀 났다. 이 시점까지 와서도 이렇게 죽어줄 순 없다고 아득아득 이를 가는 모습이 그야 흥미로울 법도 했다. “루, 이거 보여?” 그녀는 허공을 가리켰고 연인은 고개를 저었다. 에슬리는 모래시계를 깨트려보려 했고 깨지는 건 그녀였다. 더럽고 치사해서 원. 그 뒤로도 그녀는 한 20분쯤 시계와 고군분투를 하였다. 어느덧 세계 멸망까지 차 한 잔 마실 시간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하늘은 그러나 어떤 종말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 모든 게 다 거짓이라면? -00:00이 되어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이쯤에서 에슬리는 차라리 제가 미친 거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빠졌다. -16:05 “루. 갑자기 낮이 밤으로 바뀔 순 없겠지?” 남은 차 한 잔의 시간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기로 했다.
주마등이 스치듯 참회의 시간을 갖기에 에슬리는 과거를 돌아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나간 일들을 구구절절 아쉬워하며 그 때 그랬으면 좋았을걸. 같은 감상에 빠질 사람도 아니었다. 제 연인이라면 잘할지도 모르지만. 대신 남은 시간 동안 에슬리는 미래에 하려고 했던 일들을 헤아렸다. 연인은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아 보였으나 순순히 에슬리에게 어울려주었다. 15분, 950초. 1초에 하나씩 말해도 천 개를 채우기에 부족하다. “나랑 하고 싶은 게 천 개나 남았어?” 당연한 말을. 별이 빛나지 않을 때까지 있어주기로 했잖아. 그렇게 답하고 에슬리는 잠시 침묵했다. 세계가 멸망한다는 건 즉 이 별이 죽는다는 걸까? 그렇다면 루는 죽어서는 나와 같이 있어주지 않을까? 내세 같은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처음으로 내세를 생각했다. 죽어서도 루와 함께면 좋겠어. 사랑이 그녀를 유치하게 만든다. 그새 모래알이 한 줌밖에 남지 않았다. -07:07 보통 행운의 숫자라는데 지금은 사특한 악마의 숫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04:57 우리 행운의 네잎클로버라도 찾아볼까? 4분 안에. -03:11 참지 못하고 에슬리는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멸망은 실감나지 않지만 이별은 제 실감 여부와 관계없이 차고 시리게 엄습했다. 불쾌였다. 공포였다. 지금이라도 신에게 빌 수 있다면 제발, 난 죽고 싶지 않다고 외칠 텐데. 하지만──
당신이 죽은 세계에서 홀로 살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러니 답의 번복은 있을 수 없다.
흰 낮에서 검은 밤을 보았다. 노란 태양 대신 은빛 달을 그렸다. 상상이란 위대한 것이다. 그의 뒤로 가상의 밤하늘을 그리며 에슬리는 힘껏 발돋움 했다. 멸망을 등지고 입에 담는 고백이 달았다. 첫 마디는 언제나처럼 ‘있잖아, 루.’
“세상이 끝나는 날에도 사랑해. 사랑해줘.”
한낮에 유성이 쏟아져 내렸다.
어떤 소재 하나를 갖고 써보았어요. 에슬리의 선택이야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지만 거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