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 모겐스
넓은 창을 통해 빛이 쉼 없이 쏟아졌다. 베일은 비가 내리는 날에도 흐려질 줄 모르는 하늘이라 처음에는 대단히 신기하기도 했는데, 어느새 그 풍경에도 익숙해져 쏜살같이 지나가는 비구름과 그 뒤에 프리즘 영롱한 햇살을 구경하러 창가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는 이 풍경이 좋더라. 여름에만 볼 수 있는 이거.
해가 갈수록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이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바라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지 알았다. “어째서 태어난 걸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걸까.” 쏟아지는 모래알처럼 그녀를 괴롭히던 고민은, 그 쏟아진 바닥으로 들어가 거름이 되었고 그 날의 고민이 지금의 결실을 이루었다고 이제와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민하길 잘했어?
라고 누가 물어본다면 얄미운 소리 하지 마! 하고 주먹을 꾹 쥐고 화를 낼 테지만.
이제 다정할 줄 안다. 아무런 이유 없는 호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베풂, 그것을 동정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혹자는 그런 말도 하지만, 그건 악의가 만드는 지옥을 못 본 녀석의 배부른 말이지. 누군가가 주는 선의가 에슬리 챠콜을 지옥으로 만든다 해서 그녀는 결코 상대의 선의를 내동댕이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상대의 다정함과 선의 하나를 붙잡은 채 지옥에서 기어 나올 자신이 있었다. 그야,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과거의 내 선의가 너를 지옥으로 보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어라, 그렇게 들렸어? 흐음~ 어땠으려나.”
루의 선의가 지옥 같기도 했었지. 장난스런 답과 함께 가슴에 툭 머리를 기대면 그에게서 어떤 답이 들려왔을까. 언젠가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다. 그녀가 그를 처음으로 인식하고, 그를 눈에 담았던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 그리운 기억이다. 여름을 맞이하여 다시 산뜻한 길이로 돌아온 끝을 기다란 손가락이 만지작거렸다. 자르니까 아쉬워? 질문을 던지면 그건 아니고. 금방 답이 돌아온다.
“루는 더 안 기르네?”
“기르면 좋겠어?”
“어느 쪽이든 좋아하는걸. 그냥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서.”
처음 만났던 그 날로부터는 어느덧 10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거 알아, 루? 소곤거리자 그가 뭔데? 하고 고개를 기울여온다.
“자주 말했잖아. 내 곁에는 오래 머물러주는 사람이 없다고. 모두들 나를 두고 가버린다고. 그 중에서 가장 나랑 오래 같이 있던 게 후만이거든.”
남자에게 받았던 목걸이는 지금도 방의 서랍장에 보관 중이었다. 과거에는 차라리 잃어버리길 바라기도 했던 것을 지금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소중히 하고 있었다.
“결국 후만마저 죽고 나서, 이제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곧 루랑 알게 된 시간이 그 시간을 뛰어넘게 되겠어.”
소곤거림을 마치고 입을 다물면 쑥스러움과 수줍음으로 자연히 두 뺨이 여름철의 익어가는 과일처럼 붉어졌다.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쩌지 못하고 에슬리는 괜히 실없이 웃으며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일어났다.
최근, 그와 함께 거울사막을 다녀왔다. 사막에 대한 이미지라고는 모래, 모래, 모래, 바위, 건조한 바람, 찌는 듯한 태양, 몬스터, 그리고 또 몬스터, 온통 이런 심상이 전부였는데 무척이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막인데 물이 있어? 눈이 동그래지던 그녀에게 그는 무어라 설명해주었더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시릴 만큼 청명한 파랑과 하양. 마침 날씨도 좋아 푸르른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졌고 어디로 이어지는 모를 너른 하늘을 꼭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이 반사하여, 위도 아래도 온통 하늘인 것만 같았다. 소금의 흰 빛, 산란하는 반사광, 파문을 그리는 물결. 발목까지 잠기는 수면에 맨발로 내려와 내리쬐는 햇볕이 더운 줄도 모르고 걸었다.
세상이 아름다운 건 당신이 있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려주는 것도 역시 당신이야. 풍경을 만끽하고 그를 만끽했다. 해가 저물어감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풍경은 기적처럼도 보여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그녀조차도 이런 풍경은 신이 그려내는 게 틀림없단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역시 신에게 소원 같은 건 빌지 않을 거지만. 그녀가 소원을 빌 대상은, 바라고 갈구할 상대는 여기 눈앞에 있다.
몸을 일으키자 지척에서 시선이 마주쳐, 이제는 거진 습관처럼 눈꼬리를 휘어 접으며 키스했다. 부리를 부딪치듯 쪽 소리를 남기면 능청이란 녀석은 둘이 합쳐 2배가 아니라 4배로 늘어나듯 연인 또한 여보란 듯 키스를 받아주었다.
“예전엔 많이 무서웠거든. 이러다 결국 루도 날 떠나고 말 거라든지. 난 또 혼자가 될 거라든지. 영원 같은 건 없다든지.”
이것도 자주 했던 말이지? 하고 색이 오묘하게 다른 그의 눈을 보았다. 그의 두 눈의 온도차가 좋았다. 여전히 좋다. 이건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이 변하지 않는 당연함을 쌓아서 나아가겠지. 그만큼의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새삼스러움을 쥔다.
“어느새 그 두려움조차 이겨내고 말야, 루와 계속해서 겪어본 적 없는 내일을 향하고 있어. 정말 경이로운 일이야.”
경탄어린 투를 따라 검은 동자가 흑요석처럼 예리한 빛을 낸다. 우리의 사랑에 이름을 붙인다면 별처럼 많은 이름을 붙이고, 페이지를 매긴다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이야기가 될 거라 했잖아. 가본 적 없는 길을 걷는 건 여전히 두렵고 머뭇거려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있다면 사실은 길 같은 건 없다고 해도 걸어갈 수 있겠지?
올바른 방향이란 건 결국 우리 자신만이 알고 있을 거야.
“앞으로도 나와 계속 있어줄 거야? 간 적 없는 길을 함께 걸어줄 거야?”
늘 루에게 하고 싶은 말, 전하려는 말은 단 하나뿐인데 말야. 사랑한다는 그 말. 그런데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앞에 해야 할 말들이 참 많아. 이렇게 수다쟁이인 줄은 몰랐는데 루에게는 내가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 꼭 말하고 싶은가봐. 그렇게 해서 잔뜩 사랑해주고 싶은 거야. 그리고, 그 다음에는──
“대답을 들려줘.”
한껏 어리광을 부리고 말아.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전하는 게 부끄럽지 않도록 만들어준 당신에게, 소원을 말했어.
어느덧 1400일째 사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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