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루
[1]
어김없이 맑은 밤이었다. 이 시기의 밤은 언제나 맑은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비가 많이 내리는 시기나 건조한 시기가 해마다 돌아오는 것처럼 10월 7일, 오늘은 맑은 날로 정해져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오늘이 더 ‘특별한 날’인 것만 같았다.
함께 집을 고를 때 두 사람이서 주목했던 부분 중 하나로 지붕이 있었다. 베일은 이트바테르보다 남쪽이고 따뜻한 바다가 가까워서 겨울에도 눈은 거의 내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덕분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삼각으로 된 지붕을 찾을 필요는 없었지만─이트바테르의 지붕은 삼각이 아니라면 눈의 무게를 견딜 만큼 튼튼해야만 한다. 어디든 저 북부보다야 나을 테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 지붕은 함께 별을 본다는 행위와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중요했다.
재밌는 건 막상 그렇게 골라놓고 차츰차츰 지붕에 오를 일이 줄어들었단 점이다.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고심해서 고른 2층의 창이 아주 넓었다. 지붕을 열고 망원경을 꺼낼 수도 있었다. 막상 함께 사는 집이 생기고 나자 지붕에 오르지 않아도 아늑한 실내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어디에서 보내는지 장소보다도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중요했다.
마지막으로──, 어느새 5년이기도 했다. 담요 하나로 추위를 이겨내며 별을 헤아리기에는 예전처럼 어리지 않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변화였을까.
좋아하는 허브 티백을 넣은 머그컵 두 잔을 들고 그가 천천히 걸어온다. 카펫을 밟아오는 부드럽지만 묵직한 발소리를 들으며 에슬리는 무화과의 껍질을 벗겼다.
꼭지 부근을 갈라서 잘 익어서 무른 껍질을 살살 문지른다. 적당히 껍질을 제거하면 반으로 쪼개 그에게 건넸다. 베일은 해가 길고 따뜻한 만큼 과일이 달고 맛있었는데 특히 이 시기의 무화과는 향기롭고 달았다. 신비롭게 생긴 내부 전체가 열매보다는 꽃에 가깝다니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후, 후. 머그 컵을 식히며 고개를 돌리면 별들이 흐르고 있었다. 커다란 창밖으로 별의 일주운동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있지, 루. 이 시기마다 돌아오는 혜성이……. 별에 관한 이야기를 재잘거린다. 아는 이름들이 늘었지. 그러고 보니 이 땅의 만물이란 별의 파편에서부터 비롯되었다던가. 신화에서는 인간을 돌로 만들었는지 진흙으로 만들었는지를 두고 떠들곤 하던데 별의 파편도 따지자면 광물, 신화란 다 어딘지 현실에 기반하는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누가 그랬더라. 우리는 모두 별의 아이라고 하던 말이 제법 로맨틱하지 않나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모두가 별에서 태어났으면서 모두는 다르다. 어떤 별은 나무가 되고 어떤 별은 물고기가 된 것처럼 어떤 별은 사람이 되고도 서로 달랐다. 서로 다른 가운데 나는 어떤 사람일까. 향긋한 허브티에 그새 입맛이 길들여졌다. 그 안에서 단맛을 짚어낼 정도로 예민해지기도 했다.
에슬리는 복잡하게 사는 편이 아니었고 스스로를 이렇다 저렇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신 누군가와 비교해보면 알기 쉬운데 가령 가장 가까이 있는 연인, 루 모겐스는 그녀와 상당히 달라서 나란히 놓고 보면 에슬리 챠콜이라는 인간을 정의할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그레 웃는다. 문득 괜시리 쑥스러워져 다시 창으로 고갤 돌렸다.
한쪽이 감성적이라면 한쪽은 이성적이고 한쪽이 낙관주의라면 한쪽은 비관주의다. 한쪽이 현실적이면 한쪽은 이상적이고 한쪽이 냉정하면 한쪽은 감정적이 되었다. 이렇듯 다르다. 재미있게도 이런 양분화는 경우에 따라 반대가 되기도 했는데, 두 사람이 같은 걸 고르는 경우는 언제나 서로가 걸려 있을 때였다.
어떤 감정의 극점이 겹쳐지는 것만으로도 닮아버린다는 것이다.
다르거나 닮은 그 안에 서로를 향한 이해와 노력이 있었다. 곁에 있고 싶은 마음, 함께 살아가는 내일을 위한 용기, 상대를 향한 친애, 또는 사랑, 어떨 때는 욕망, 혹은 갈증. 그 복잡하게 뒤섞이는 감정의 총체.
모으다 보면 결국 드넓은 하늘 아래에서 나를 정의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당신을 향한 감정의 결이다.
이 감정들을 사랑이란 한 마디 단어로 다 담을 수 있을까. 나를 정의내리기도 어려운 와중에 에슬리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말로써 정립하기란 어려운 문제였다. 오랫동안.
“내가 루에게 품은 이 감정을, 사랑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면 좋을까.”
매번 같은 말을 한다고 해도 그 말 하나하나에 다른 중력을 느껴. 그럴 때마다 에슬리는 움직였다. 말보다 행동이 좋았다. 손을 내밀었다. 그가 잡아주기까지 기다렸다. 언제든 닿을 거리에 머물렀다.
기다리는 시간은 싫지 않았다. 기묘하지.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그 시간이 두렵지 않은 건. 그 동안 헤아렸다. 함께 보낸 시간, 홀로 보낸 시간. 천칭을 들고 고개를 기울인다. 기묘하게도 가까이 있으면 더 닿고 싶고 떨어져 있을 때야 비로소 두렵지 않다. 어째서일까. 아마도 그건, 영원을 헤아리는 만큼 영원히 갈증내야하기 때문이라고.
[2]
머그 컵만큼의 온기가 손 안에 머물렀다. 그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쭉 뻗어 마주 잡아오는 손바닥 안을 간질이며 파고들었다. 손가락이 시작되는 그 부근을 더듬다가 이윽고 꾸욱 깍지 껴 잡는다. 손바닥끼리 맞닿을 때가 에슬리는 유독 좋았다. 조각이 맞아떨어지는 것만 같아.
아직도 이런 날이면 코끝이 간질간질해 자꾸만 눈을 굴리거나 콧잔등에 주름을 잡거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겸연쩍곤 했다. 창문을 열어 찬 공기라도 삼킬 걸 그랬나.
“그냥. 오늘은 더 말하고 싶잖아. 좋아해, 오늘 더 많이 좋아하고 있어.”
말해놓고 도망가고 싶은 건 이럴 때마다 불쑥 튀어나오는 버릇이다. 아마도 그건, ‘잡아줘.’라는 속마음.
하늘이 한 바퀴 돌 때마다 사랑이 따라 돌았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해가 지면 별이 뜬다. 반복되고 쌓이는 시간 속 어느 풍경을 살펴도 옆자리에는 그가 있었다. 수북해진 앨범을 넘기며 얻는 안락과 안도, 오늘의 감정이 내일도 이어지리라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
5년은 어느새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을까. 인간의 수명에선 강산이 반쯤 바뀌어버렸을 긴 세월, 그러나 아직 저 하늘의 별을 헤아리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길면서도 짧은 시간을 앞에 두고 별의 일주를 보았다. 우리의 사랑도 저 별의 일주만 같다면.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역시 있잖아, 여행을 떠나자. 루. 별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새로운 것을 보고 싶어. 새로운 곳을 걷고 싶어. 앨범의 다음 장을 채우고 싶고 이 세상에 우리의 발자취를 더 남기고 싶어. 당신이 있어서 사랑하게 된 세계를 더 많이 겪고 싶어.
살아 숨 쉬는 한 어쩔 수 없이 욕심쟁이가 되고 만다. 내게 주어진 이 삶을 포기할 수 없어서 조금 더 행복하게 사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어서, 바란다.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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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 멀어져가는 별의 꼬리를 잡고 우리 조금 더 사랑을 하자. 이 별이 한 바퀴 돌 때까지, 그렇게 돌아오는 사랑을 하자.
어느새 루슬리가 사랑한지도 5주년이에요~ 그리고 제 루슬리 로그 카운트도 이걸로 꼭 50개다. 뭔가 안 올린 게 있었나? 5주년에도 함께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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