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 로그는 TRPG 시나리오 세상의 중심에서 RELIVE의 스포일러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For. 루 모겐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루의 생일 축하합니다."
주먹만 한 케이크 위에 푸른 불꽃을 보이는 초 하나. 두 사람이서 쓸 땐 조금 좁다고 느껴지던 테이블이 성가실 정도로 넓어 보인다. 하긴, 그때도 두 사람이 쓴다기엔 테이블 위에 차려지는 요리가 한가득이긴 했다. 누가 보면 4인 가정이었지.
[전업주부 남편은 안 된다는 건가?]
여상하게 지나가던 그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리움도 울컥 떠오른다. 만약 그때 정말 당신의 말을 받아들여 결혼이라도 했더라면, 아들 딸 하나 낳고 오순도순 사는 행복한 가족의 미래라도 있었을까. 역시 무리다. 어울리지 않아.
지금이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2인용의 테이블 하나 꽉 채우지 못한 채 무언가 빠져버린 모습이 말이다.
결여缺如.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빠져서 없거나 모자람.
초가 다 녹기 전에 불을 끄고 에멘탈 치즈를 연상시키는 케이크 위로 포크 날을 세웠다. 부드럽게 잘려 나간 그것을 입에 넣는데 먹으면서도 무슨 맛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늘 이런 식이다. 미각이 죽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오는 걸로는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 먹었다. 루의 생일 케이크를 남길 수 없잖아.
「있잖아, 루. 지금도 날 사랑해?」
그때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부정이 듣고 싶었다. 우리의 사랑이 고통뿐이라면 고통밖에 줄 수 없다면 차라리 그만두자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조금이라도 덜 괴로워진다면 편해진다면, 사랑하지 말아 달라고 빌 수도 있었다.
있지, 그땐 말하지 못 한 얘기가 있어.
「날 사랑해주지 않아도 돼. 더는 그런 건 바라지 않아.」
“하지만 나는, 나는 앞으로도…… 계속 당신을 사랑할 거야. 사랑하지 않는 법을 몰라서.”
역시 그때 같이 죽어버리는 쪽이 영화로서는 제대로 된 결말이었을 거야. 텅 빈 세계에서 홀로 살아가는 소녀의 뒷모습 같은 거, 오픈 엔딩이 얼마나 취향을 타는지 모르고 하는 말이라니까. 사람들은 꽉 막힌 엔딩을 좋아해. 우린 실패했어.
그러나 투덜거려봤자 이제 와서 정말 죽거나 하진 않는다. 그와 약속했으니까. 영원한 사랑을, 씩씩한 내일을. 영화의 크레딧은 내려간 지 오래인데 에슬리 챠콜의 내일은 응당 있어야 할 것을 잃어버린 채 흘러가고 있었다.
접시를 정리하고 포장도 풀지 않은 선물상자를 기존의 상자들 옆에 쌓았다. 침대에 풀썩 누워버리자 이다음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타인을 위한다는 말은 다 거짓이다. 결국엔 자기만족. 그래서 에슬리는 네 행복을 바라는 것으로 자기위안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남자를 위해, 이기적이고 안타까운 연인의 소원을 이뤄줌으로써 속죄하고 싶은 제 욕망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어둠이 안락했다.
정말로 우리의 인생이 영화나 드라마, 무언가의 허구였다면 이미 엔딩롤이 올라도 한참 전에 올랐을 것이다. 영화라면 그가 제 목을 조르며 울던 즈음에서 1편이 끝나고 ‘속편 제작 중’ 같은 쿠키가 지나갔겠지. 그 다음에 3-4년 있다가 2편을 개봉하는 거야. 기억하지 못하는 루프도 그 정도 지나갔을까? 그 정도면 다행이고.
그래서 어찌저찌 속편의 결말은 죽은 연인의 시체 앞에서 우는 여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서서히 페이드 아웃, 쿠키가 필요하다면 더는 후속 제작의 여지도 없이 장례식 장면이라도 나오고 말까? 적당한 슬픔, 적당한 갈등의 해소, 적당한 여운. 그렇게 끝나 마땅한 내용이지만 인생은 그렇지 못했다.
휴가를 내고 간 여행지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과 교회 사람들의 대 난투극. 난투라는 이름이라도 붙으면 다행이지, 정신 나간 사람들의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졌다. 사건이 종료된 뒤 사람들은 뭐라고 증언할까. “교회 사람들이 하루를 반복시켰어요!”, “목사를 죽이면 내일이 돌아온다고 했어요!” 맙소사. 집단환각증세나 정신병으로 치부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나 더 얹어 볼까. “저 여자가 말해줬어요! 옆의 남자도 똑같은 말을 했어요! 저 사람들 말을 들었더니 내일이 돌아왔다고요!” 옆의 남자도 똑같이라니. 그래, 시체라도 옆에 있긴 하다.
대단히 곤란한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럴 때 경찰이라는 신분이 도움이 됐다.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저쪽이 수상하단 걸 알게 됐거든요.” 그런 몇 마디 설명이면 납득을 해주었다. “정말 하루가 반복됐습니까?” 질문에는 애석하게도 긍정, 그는 거짓말이 서툴렀다. 덕분에 싸잡아서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뻔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여자는 사람을 죽이지 않은 덕에 별 조사는 받지 않고 풀려났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돌아와서는 휴가를 냈다. 휴식 같은 건 원하지 않았지만 따라붙는 꼬리표가 너무 길었다. 범죄자를 감시 명목으로 함께 산다고 할 때부터 이상했어. 그래 놓고 여행지에서 폭동에 휘말려 죽었다고? 저런, 불쌍하기도 해라. 괜찮을까? 제정신일까? 제정신이어도 제정신이 아니어도 그거 참 이상하겠어. 사실은 그 남자가 범인 아냐? 그래서 자기 손으로……
의심, 의혹, 동정, 조롱, 하지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쪽이 미치기엔 더 좋았다. 기절할 때까지 자신을 혹사시키 듯 쉬지 않고 운동하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이대로면 근육이 파열될 거란 의사의 권고에 따라 딱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어 보던 여자는 결국 수면제를 찾았다. 그 뒤로는 수면제 없이 못 자는 몸이 되었다. 현대의학 만세.
인간은 참 편리하게 만들어진 생물이다. 어떨 땐 모든 것이 비극적일 만큼 선명하게 기억나다가도 어떨 땐 머릿속에서 멋대로 편집을 거쳐 제 형편에 좋은 기억만 남기기도 한다.
에슬리 챠콜의 머릿속도 그랬다. 체념하고 순응하고 이타심을 긁어모아 전부 당신을 위한 것이었다고 납득하다가도 어떨 땐 모든 것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지금의 삶이 스스로에게 벌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모질게 굴다가도 괴로워서 도망치고 싶어서 제 목을 틀어쥐었다. 돌아온 탕아가 되어 성상 앞에 무릎 꿇고 신의 자비를 바라다가 신을 저주하며 돌아 나섰다. 조금씩 꾸준히 정신이 이상해져만 갔다.
그래도 죽지 않고 버텼다. 누구를 위한 삶이었을까.
버티고 버틴 끝에 딱 1년, 돌아온 그의 기일이자 생일. 퇴근길에 케이크를 샀다. 딸기가 올라간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였다. 딸기가 정말 맛있는 건 2-3월쯤이라던데 12월은 너무 일러. 그럼 네 생일에 또 먹으면 되겠네. 그럴까. 그래, 2달 뒤에. 그럼 2달만 더 버틸게.
관성이었다. 언젠가 반복되는 12월 14일마다 케이크를 사오던 게 몸에 밴 탓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의욕이 났다. 케이크를 고르고 선물을 포장하고, “생일이신가 봐요.” 점원의 물음에 처음으로 웃었다. “네, 남자친구요.”
그날 오랜만에 집을 청소했다. 깨끗해진 테이블에 케이크를 올리고 홀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다음날에는 장을 봐왔다. 낡은 프라이팬을 닦고 오믈렛을 해 먹었다. 조금 짰던 것 같다. 내일은 소금을 줄여야지.
어째서 살아가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마다 12월 14일을 기다렸다. 그날 하루를 위해 364일을 버티는 삶이었다. 가끔은 이 모든 연극이 지겨워서 그만두고 영원한 잠에 빠지고 싶었지만 약속이니까 버텼다. 벌이라고 달게 받았다.
사는 것이 고통스러울수록 그에 대한 속죄가 되는 것 같아 기묘한 자기만족에 빠지다가도 끝내 제 행복을 바라주던 목소리를 떠올려 행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행복해지는 것만큼은 어려워서 그에 대한 미안함만 늘어가던 나날이었다.
딱 그런 나날이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그의 생일날 역시도.
다르지 않게 지나갈 줄 알았다. 언제나처럼. 그런데 잿빛 도시에서는 볼 일이 없는 오로라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부리 없는 새가 창밖을 두드렸다. 그 순간 에슬리 챠콜의 마음에 환희가 차올랐다. 영혼을 거두는 저 새가 드디어 내게도 안식을 주러 찾아온 걸까. 사위가 어둠에 잠겨 저의 손끝 하나 볼 수 없는 순간에도 공포는 마비된 감각이었다.
푸른빛으로도 보이고 은의 색 같기도 하고 그저 얼어붙은 흰색 같기도 한 거룩한 신의 옷자락에 조금이라도 닿고 싶어서, 오직 기대에 차 기꺼이 새를 맞이하려고 했다. 그때,
──똑똑.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나는 네가 이 세상에 무지하면 좋겠어.」
「중심을 잊고 다른 사람들처럼 굴었으면 해.」
“그 말은 거짓말이었지?”
“왜 그렇게 생각해?”
“내 중심은 당신인데, 당신을 잊는다는 건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잊으란 거잖아.”
어떻게 그래. 루는 내가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걸로 충분해? 아니라고 말해보란 듯 달콤하게 현혹한다. 반성이라곤 그새 잊어버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했잖아. 언제까지나 영원히.
욕심부리지 않는 법도 사랑을 말하지 않는 법을 모른다, 여전히. 앞으로도.
사랑한다면, 그래서 살아간다면, 앞으로도 함께해. 두근거림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여기, 이 자리에서.
손끝이 흉터를 더듬었다. 두근거림에 안도하길 몇 번. 결국엔 그의 말을 반쯤 이뤘다. 에슬리는 무지해지기를 택했다. 어째서라거나 왜라거나 질문하기보다 조금 더 사랑하기로 했다. 불안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두려워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얌전히 순종한다. 신이시여, 이 또한 거룩하신 당신의 뜻이라면 의심하지 않고 따르겠나이다.
12월 15일로 넘어가는 자정, 잠을 잊고 긴 밤을 맞았다. 우선은 함께 먼지 쌓인 선물의 포장지를 열었다. 무엇을 샀는지도 까맣게 잊었다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과자를 발견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맨 첫 선물상자 안에서는 비둘기 모양 열쇠고리가 나왔다. 사이좋게 고리를 나눠 걸었다.
오랜만에 먹은 그의 요리는 변함없이 맛있었고 밤마다 털어 넣던 수면제를 끊었다. 대신에 옆 사람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한동안은 그에게서 떨어지기 싫어 곤란했다. 누가 곤란했는지는 말을 아낀다.
나란히 누워 손을 맞잡을 때면 잃어버렸던 퍼즐이 겨우 제자리를 찾은 것만 같았다. 중력을 잃고 떠돌던 모든 밤의 끝을 지났다. 마침내 고요한 밤이었다. 또 거룩한 밤이었다.
이곳에 세상의 중심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시작은 [있지]지만 끝은 [영원히 영원히]를 틀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5년 2개월의 상흔을 해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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