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식기 개인로그
동구를 넘어 지상의 바다를 보렴.
하얀 꽃, 보라 꽃, 활짝 피었구나.
하이얀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향기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희게 핀 라벤더, 먼 옛날의 대지.
동구를 넘어 꽃의 물결을 보렴.
포말이 이는구나. 활짝 피었어.
하이얀 이파리 깃털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향기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희게 핀 라벤더, 먼 약속의 대지.
자장가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채운다. 물그릇으로 쏟아지는 빛을 통과해 벽에 물그림자가 그려졌다. 아이가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어서 잠들라고 그 가슴을 도닥여주고 있었으나 온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니 잠이 안 올만도 했다. 여자는 대신 이마에서 툭 떨어진 미지근한 수건을 물그릇에서 차게 식혔다. 그릇이 찰박이자 형체 없는 그림이 따라 모습을 바꾼다. 와아. 아이의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그리 좋을까.
“바다에 가보고 싶어요, 누님.”
“열이 내리면 가주님께 말씀드려볼까요?”
“아버지가 허락해주실까요.”
게다가 누님은 곧 돌아가야 하잖아요. 다 안다고 아이가 작은 입술을 비죽였다. 누님은 늘 바빠요. 아카데미에 가고서는 1년에 한 번씩만 돌아오더니 기사단에 들어간 뒤로는 편지마저 뜸해졌다. 이번에도 제 생일이 아니면 보지 못했겠지. 사랑스러운 어리광에 입가의 점을 따라 호선이 그려진다. 그녀라고 아이와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유그나엘이 나아야 가죠.
“그럼 제가 내내 아프면 계속 옆에 있어 줄 거예요?”
“네가 아픈 만큼 내 마음도 아픈데.”
그래도 괜찮아요? 짓궂은 물음에 아이는 금세 고갤 저었다. 빨리 나을게요. 나을 테니까 누님도 아프지 말아요. 금세 사과해오는 목소리에 마음 한켠이 뭉글게 따스해진다. 보드라운 크림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이마에 입 맞추면 훅 뜨거운 열이 전해졌다. 차라리 제가 이 열을 다 가져갈 수만 있다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열이 아이를 덮친 게 벌써 며칠 째다. 의사를 부르고 기도를 드려도 아이의 열은 도통 떨어질 줄 몰랐다. 이 착한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부디, 신이시여. 자비로운 인베스여. 당신의 아이를 구원하소서. 당신의 아이를 보살피소서. La vare.
자장노래가 지치지도 않고 방을 채웠다.
오르간 소리가 예배당에 울려 퍼진다. 엄숙한 자리는 눈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아이는 흰 꽃에 덮여 있었다. 그 위로 기름을 부었다. 는 신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나신 자리를 따라 성령에게로 돌아갑니다. 주교의 목소리가 오르간 건반을 누른다.
신께서도 무심하시지. 너무 이른 부름입니다. 비통에 찬 목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 중 여자의 목소리는 없었다. 여자는 먼 눈으로 일련의 풍경을 보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여즉 현실감이 없었다. 열이 올라 내내 사과처럼 발그레하던 뺨이 지금은 오로지 창백하기만 했다. 어제는 너무 뜨겁더니 오늘은 너무 차다. 이렇게 몸이 식어서야 바다에 못 가요. 꽃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식은 뺨을 문질렀다. 울음소리는 조금도 새지 않았다. 조금도 새지 않았다.
여자는 생각한다. 물그림자가 드리운 빈 방에서. 구원은 어디에 있을까. 죄는 누구에게 있을까. 그리고 신은.
존재한다면.
물그림자 드리운 방이 푸르고 희었다. 여자의 밤이 온통 그랬다. 그 날부터 여자는 잠들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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