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블렛 H. 베리
구름이 둥글던 어느 날. 진하게 우린 아쌈. 잔의 테두리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며 각설탕을 두 개. 종종 우유를 타기도 한다. 이럴 때도 흰색을 좋아하느냐 네가 짓궂게 묻는 날도 있었다.
「그런 게 아니래도요.」
하루는 얼 그레이. 베르가못을 섞어 독특한 오일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차는 네 장미정원에 잘 어울렸다. 다음엔 장미잎을 말려 띄워볼까. 정성들여 키운 꽃이니 만큼 어울릴 것 같았다. 실론, 잠 못 드는 밤을 위한 블렌딩. 로얄 블랜드, 우리의 자리를 빛내기에 걸맞노라 웃던 이름, 계절이 바뀌고 해를 지나는 동안 아스칼론의 단내에서, 너의 정원에서, 뤼봉의 라벤더 밭 한가운데서, 어느 날이고 변함없이 테이블 하나. 의자는 두 개. 마주 앉아 차를 나누었다.
별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아카데미 졸업 후 수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되어 아테레의 극을 관람하고 돌아와 네게 감상을 말하거나 몇 번째인지 모를 구혼을 거절하는 편지의 문장을 보이기도 하고 스케마의 수확물을 선물하는 날도 있었다. 온통 새하얗게만 핀 라벤더 길과 그 양편에서 인베스의 축복이라 감동하던 농민들, 새하얀 머리카락의 벗을 두고 수군거리는 가문의 사람들, 사이에 끼어 민망한 낯을 하는 동안에도 너는 여상했다.
7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랬다. 여러 얼굴을 보이는 동안 우리의 온도는 찻잔의 안도 밖도 아닌 테두리만큼의 온도였노라고 회상한다. 지나치게 뜨겁지도, 그렇다고 식지도 않은 꼭 알맞은 높이와 온도. 서로를 편하게 여겼으리라. 그래, 관계를 두고 단순한 이야기를 말하자면 비에모드 데 라반둘라는 로블렛 H. 베리를 좋아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저뿐이겠느냐만은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좋아한다고 말해볼 수 있었다.
가진 적 없는 색을 질투한 적은 없지만 네가 가진 색을 애틋하게 여겼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네 색을 의식하지 않고 너를 보고 있었다. 네 모든 면이 알고 싶었던 과거의 나는 어느새 그 시작을 잊어버린 채, 우리는 하나의 시간 속에 융화되어 있었다.
그러니 벗이라 할까.
마주 댄 이마가 부드럽게 좌우로 움직이면 그 간지러운 감촉을 따라 희미하게 눈을 떴다. 사실을 말하자면 네가 좁혀온 거리감에 조금 놀란 감도 있었다. 벗이라 칭해놓고 모순된 말이나 우리의 거리감이란 것이 그랬다. 기뻤을까.
시야 너머로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들어온다. 강하다 여겼다니.
“그 말은…… 역시 어제 일로, 베리에게 제 점수를 잃은 건 아닌가요.”
부단장으로서 말이죠. 억울하단 듯 조금 울 것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슬퍼하기엔, 네. 아직 일러요. 자책은 조금, 조금 많이 하기도 했지만. 인베스의 자비하심이 그의 자녀를 지켜주셨는걸요. 하지만.”
그렇네요. 네 손을 붙들 듯 쥔다. 이와 같은 일이 앞으로 반복될 것을 생각하면 그 미래가 두려워요. 강건하고 비정한 부단장은 되지 못할 속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이 바랐던 것처럼, 남의 마음을 짊어지지 않도록 도망이라도 칠걸 그랬나봐요.”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들의 무게를 이미 제 마음에 올려놓은 지 오래다. 한 사람이라도 비었다간 허전해지고 말. 감당 못할 욕심이라 해도, 무리한 바람이라 해도 이제껏 무엇 하나 붙잡고 욕망하려 한 적 없던 저에게 이 한 번의 욕심이 안 될까.
맞잡은 두 손을 끌어올려 그 손끝에 가만히 입술을 붙이고, 네가 먼저 잡아준 호의에 기대어 약은 꾀를 부린다.
“생각보다 강하지 않은 저라도 함께 가주신다면. 제가 짊어질 우리 영혼의 무게까지도 나눠주겠나요?”
자유로움을 꿈꾸던 당신을 이 수많은 관계의 얽힘에 붙잡아, 부자유하게 만드는 일이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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