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딘테그로 : 혁명의 도화선

10. 약속

천가유 2021. 10. 24. 21:26

 

: 카리스 라이프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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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검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살기라곤 없는 검이다. 부정할 의지조차 없었다. 굳이 살생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 않느냐, 하지 못하느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전자라고 답하리라. 그러나 의지가 어떻든 그의 검이 지나치게 소극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검을 드는 일에 관심이 없던 아카데미 시절, 그럼에도 검을 들어야만 했던 거대하고 흰 문의 앞. 그 때 정했다. 검을 든다면 오만하게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들겠노라고. 날붙이에 자아가 있다면 제 마음을 비웃었을지도 모르리라.

지키는 검이고 싶었다. 굳이 죽이고 싶지 않았다. 타인의 숨을 거두고 싶지 않았다. 생과 사를 관장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라 믿었다. 자아 없이 검끝을 오래도 신에게 의탁해 왔다. 그럼에도 사람을 베어야만 하는 순간은 찾아왔다.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면 여자는 돌아와서 오래도록 손을 씻었다. 함부로 타인의 미래를 거둔 저의 죄를 부디 주께서 모르시길. 그는 두 번 다시 세례의 문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부기사단장의 직책을 맡아 수도의 방위를 서는 장점이 있다면 세크레타와 맞부딪칠 일이 적다는 것이다. 죽음을 오갈 일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을 치안 유지를 위해 썼다. 부단장의 업무로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기도 했다. 기사단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이 안에서 할 일이 주어지는 건 기뻤다. 그저 모르고 살고 싶었다.

아야야…….

어느 날 네가 다쳐왔다. 답지 않은 실수였다. 입술가에 남은 상처는 깊지 않았으나 아물지도 않아 끝내 흉을 남겼다. 다친 네 모습에 숨을 집어삼키던 기억이 난다. 생과 사의 경계란 이토록 가볍고 가늘기만 하다.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었다. 아무도 잃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해하는 일이 두렵던 이유라면 고결한 정의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이란 공평하기에. 돌아올 대가가 두려웠다. 고작 그 정도 두려움이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어딘지 희미했다. 눈앞의 네가 유령만 같았다. 실리는 무게를 어쩔 줄 모르고 굳어 있었다. 다친 건 너인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네게도 검을 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네 각오에 내가 찬물을 끼얹는지도 몰랐다. 방향을 잃은 서로 다른 색의 눈이 끝내 질끈 감긴다.

이런 말, 부단장으로서 부적절할지도 몰라요.”

만일 제게 실망한다면 못 들은 걸로 해도 좋아요.”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욕심을 부리자면 한 사람도.”

누구의 희생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이 결코 승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었다. 신념은 누군가를 납득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걸까요. 죽음을 무릅쓰며 칼을 부딪쳐야 하는 걸까요. 정의의 증명이란 이런 방식으로밖에 이뤄낼 수 없는 걸까요. 죽으면 무엇이 남겨지나요.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있다면 저는 차라리 신념도 긍지도 굽힐 텐데.

그러나 약한 소리는 할 수 없으니.

이런 부단장이라 미안해요, . 다음엔 더 잘할 수 있도록 할게요. 그러니까……

죽지 말아주세요. 거듭 네게 되뇐다.

약속을, 지켜주세요.”

마른 가지에 물 부어져 꽃피우는 그 날까지.

수백 번을 곱씹고 수천 번을 후회한다. 너를 잃었더라면 수만 번 슬퍼했을까.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조차 버거웠다. 인베스여, 제발 저에게서 이 이상 소중한 이들을 거두어가지 말아주세요. 당신 곁으로 부르고자 하신다면 차라리──

잔향으로는 지워지지 않는 피 냄새 짙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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