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신은 여전히 성의 없게 짧았다. 혹시 편지가 귀찮아? 하고 물어본 적도 있지만 돌아온 답은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좀 더 길게 써달라고 투덜거리자 돌아온 건 세로쓰기와 입막음용으로 보이는 과자.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그냥 내가 적응해버렸다. 그래도 조금씩 성의가 깃드는 것 같으니까.
중요한 건 허락을 받았다는 거다. 몇 년 만에 만나는 거지. 3년 좀 넘었나? 오랜만에 보겠네. 여행 준비를 하면서 내가 품은 생각은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뭐라더라. 아들이 상단을 물려받고는 몇 년 만에 그 큰 걸 쫄딱 말아먹었다고? 새벽이면 짐마차가 줄을 이어 들어와 물건을 두고 가던 진풍경이 사라진지도 좀 되었다고, 어렵지 않게 주워들은 소문에 조금 당황했다. 얀 잘 지내는 거 맞아? 편지에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으면서.
화위에 도착해, 걱정을 안은 채 주소를 따라 걷자 으리으리한 저택이 나타났다. 그러나 외관만 번드르르할 뿐 다가갈수록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이 아냐. 대문이 있는 곳부터 청소를 안 한지 오래된 티가 보였다. 사람이 오간 흔적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여기야? 혹시 망해서 이사한 건가. 그리고 얀은 새 집주소 가르쳐주는 걸 잊어버리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여기가 아니라면 얀을 어디서 찾지. 통신석 연결이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차, 아무도 안 사는 줄 알았던 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챠챠.”
“얀!! 다행이다. 집 잘못 찾아온 줄 알았잖아.”
“집은 아니고, 때는 잘못 찾긴 했네요. 건강해요?”
나야 건강하지. 하고 웃으며 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내 시선에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이마를 쿡 찔러들었다. 조금 후줄근해 보인단 것 외에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네.
먼지 쌓인 복도를 신발을 벗고 걸으며 어떻게 된 거야? 상단 망했다면서. 부모님은? 배는 무사해? 질문을 쏟아냈다. 그는 편지에서도 자기 얘기를 전혀 해주지 않았으니까.
처음에는 제법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부모님은 은퇴해서 쉬고 있어요. 상단은 보다시피. 배도 무사해요. 들추려 하지 마세요, 성희롱이에요. 그러나 금세 대답하기도 지겨워졌는지 입에 과자를 물리는 걸로 답을 대신해버렸다. 이거 익숙하네.
당신은 변한 게 없어 보이네요. 들려오는 말에 키도 크고 공부도 많이 했는걸? 조금 으스대며 말하자 들려오는 건 그래도 여전히 작아요. 같은 답. 그러니까 얀이 큰 거래도.
집은 바깥만큼이나 안도 심각했다. 얀 청소 안 해? 제가 그런 걸 할 것 같나요. 생활력이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차라리 작은 집으로 이사라도 하지. 잔소리가 많네요. 얀은 예전부터 좀 물어보려고 하면 말을 돌리기 일쑤였고 난 굳이 답을 회피하는 그를 깊게 캐묻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건 달라지지 않아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보냈다. 다른 방은 더럽단 이유로 그는 굳이 나를 자기 방에서 재웠다. 그럼 어차피 방도 큰데 한 방에서 자지? 내 말에 그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진 적을 것도 없겠지.
다음 날은 하룻밤 재워준 보답으로 그를 잠시 내보내고 집안을 청소했다. 청소라고 해봤자 온 집안의 창문을 열고 먼지를 걷어내고 물걸레질을 한 번 하는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집안의 공기가 확 달라진 것 같아 나쁘지 않았다. 제대로 정리도 안 하고 쌓아두기만 한 쓰레기를 모두 정리할 즈음에는 얀이 양 손에 먹을 걸 가득 사들고 돌아왔다.
기껏 청소했더니. 그는 맨날 이렇게 사먹으며 지낸 건지 익숙하게 반질반질해진 테이블 위로 여러 먹을 것들을 풀어놓았다. 화위의 음식은 엄청 오랜만이네. 이곳은 항구 도시인 만큼 비사우의 조미료를 쓴 생선 요리라든지 여기서밖에 먹지 못하는 독특한 게 많아서 좋아한다. 배를 채우고는 먹은 것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고 얀이랑 야시장에 다녀왔다.
사람이 많은 곳은 여전히,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난 이제 괜찮아. 괜찮아질 만큼 더 강해졌어. 긴장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구경했다. 얀은 망해버린 상단 자식이 이렇게 써도 되는 거야? 싶을 정도로 돈을 아낌없이 썼는데 내 시선에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며 이마만 때렸다. 그가 자존심이 세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긴 말 하지 않았다.
그날 밤에도 얀의 방은 내 차지였다. 이제 집도 청소했는데 왜? 하고 물었더니 내 맘이에요. 같은 답이 들려왔다.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돈에 여유가 있으면 사람을 고용해서 치우거나 하지 그래?”
“기분 나쁘게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이란 거예요?”
“하아.”
그리고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이대로 얀을 혼자 두어도 되는 걸까. 대놓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자 그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꼬집어 왔다. 그 표정은 뭐예요? 당장 취소하지 못해요? 난 괜찮다고요….
“얀, 안 본 사이 성격 더 유치해졌어. 혼자 지내면서 성격 더 나빠진 거 아냐?”
“진짜 멀쩡하거든요…….”
어딘지 처량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놀리기를 그만 두기로 했다. 얀은 가기 전에 나한테 돈주머니를 하나 던져주었는데 열어보고 그 액수에 깜짝 놀랐다. 돌아가는 여비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데? 하지만 여기서 거절해봤자 얀의 자존심만 건드릴 게 뻔하고, 주는 돈은 거절하지 않는 법이야. 주섬주섬 주머니를 챙기자 그래야 내 챠챠죠, 같은 표정을 짓는 걸 보고 풉 웃고 말았다.
“잘 가요, 에슬리.”
──?
“어라, 이제 집사 졸업이야?”
“그런 거 아니니까요. 시끄러워요.”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엔, 이름도 불렸다. 그에게 이름이라니 뭔가 엄청 이상한 기분이네. 뭐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사람 대우를 해준 것 같기도 하고……. 글쎄, 명확하게 뭐라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응.
그렇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에슬리 또한 내 이름이니까.
“얀도 건강해야 해. 또 편지해!”
“내키면요.”
마지막까지 저런다니까. 어깨를 으쓱하다가 키득키득 웃고, 그의 집을 뒤로 하였다. 곧장 들어가 버릴 줄 알았지만 얀은 내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배웅을 해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