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게 된 아카데미를 나와 그를 따랐다. 누군가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과거, 후만의 이후일까.
따라오라고 멋대로 손을 내밀어놓고 후만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오고, 그러지 못한다면 두고 간다. 라고 등으로 말하고 있었지. 그 때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 역시 누군가에게 정을 주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리라.
반면 에르덴은,
“뭐 하나, 꾸물꾸물. 막상 오려니 내키지 않나?”
“그, 그런 거 아냐!”
무심코 걸음이 느려졌다. 퍼뜩 고개를 들자 그와는 세 걸음 정도 벌어져 있었다. 허둥거리며 그의 옆까지 보조를 맞추자 그는 다시 걸음을 이어나갔다. 걷는 동안 그는 내가 어디서 묵고 어떻게 지내면 될지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친구─라고 쓰고 호구라고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의 집에 머물기로 한 것에 대해 나는 특별히 이의 없었다. 그는 내 기색을 살피는 것 같았지만 멀쩡하게 아내도 있고 딸도 있는 사람이 난데없이 바깥에서 과년한 여자애 하나를 주워와 집에 들이는 쪽이 더 문제 아닐까.
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가 소중히 여기는 가정에 분란의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곳은 지켜보는 걸로 충분한, 완벽한 가정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정도 거리면 된다. 어차피 집(House)이란 머리를 대면 잠드는 곳에 불과하다. 레만이라고 했던가. 머무는 동안 그와 얼굴을 마주할 일은 거의 없었다. 우린 서로의 존재를 없는 취급 하며 지냈고 나는 그곳에 머물며 가끔 에르덴이 부르면 가서 검사를 받는 생활을 했다. 에르덴의 저택을 방문할 때면 힐끔, 그 집을 구경하는 게 소소한 낙이었다.
그랬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죽었어……?”
난데없이 그로부터 곧 자신의 집으로 거취를 옮길 거란 말을 들었다. 이유는 더 이상 레만의 집에 머물 필요가 없어져서. 아내는 죽었고 그의 딸이 나와 바꾸듯 저쪽으로 간다고 했다. 딸 스스로 결정한 거라곤 하지만 저쪽의 입장에서는 볼모와 같을 거라던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찾아간 집은, ……비유하자면 눈 깜빡할 사이 100년은 지난 듯 생기도 활기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고 했다.
그래서 당신 자신도 죽어버리고 만 걸까?
내가 동경하고 그리던 집은 이미 없었다. 그곳은 꽃이 시들어 그 잔해조차 남지 않은 무덤과 같았다. 그는 화내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다만 고요하게 죽어갔다.
꼭 숨만 쉬는 시체 같았다. 뿌리가 잘린 나무처럼 그의 마음이 천천히 가물어드는 동안 나는
불안해서,
불안하고 불안해서,
한 번의 파도에 소리도 없이 모래성이 무너지듯 차갑게 얼어붙은 유리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깨지듯 그가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릴까봐 불안하고 불안하고 불안해서,
기껏 주어진 새 방에 짐 한 번 풀지 못하고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렸지?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하지? 가슴 속에 몰래 품고 있던 동화책을 신이란 작자가 빼앗아들고는 행복한 울타리? 비웃고는 소중한 한 장을 좌악, 찢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가 기운을 차리길 바랐다. 하지만 무얼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나는 무능했다. 그래서 차라리 원망을 했다. 당신의 말은 고작 이 정도였냐고 화를 품었다.
그러다 끝내 어느 아침, 나이프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는 그의 손을 발견하고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게 이번 가출의 시발점이다.
“이러려고, ……이러려고 내게 손을 내밀었어?”
그의 시선을 차마 마주볼 수 없어 바닥을 응시했다.
“기대게 해준다면서, 마음 놓고 의지할 수 있도록, 매달리라고, 말한 건 당신이잖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볍게 찢어지는 느낌과 함께 입 안쪽으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어차피 이 정도로는 아프지 않다. 그보다 아픈 건 다른 곳이다.
“이러다, 또 날 두고 떠나려고, 혼자 두려고…! 그럴 거면 처음부터 손 따위 내밀지 말았어야지. 정말, 싫어. 지긋지긋해……!”
한 마디만, 딱 한 마디만 더 하자고 갈비뼈를 짓누르는 호흡을 가다듬고 울컥 내뱉었다.
“지금의 당신은 조금도 의지할 수 없어.”
그리고는 집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마지막까지 에르덴이 무슨 표정을 했는지는 보지 못했다.
* *
사실 가출이란 표현을 쓴 것부터 웃기다. 언제부터 거길 집이라고 생각한 거지?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짐 하나 풀지 못해놓고 왜 집이라고 했을까. 나는 그곳을 집이라 여기는 걸까. 그를 가족, 이라고 혹시 생각하거나 하는 걸까?
내가? ──주제넘게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스워진다. 이제 곁에 아무도 없어진 그의 곁에 내가 남아서, 뭐라도 되어보겠다든지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품어버린 걸까. 누구에게 낼 화를 착각하는 거야.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어 이마를 때렸다.
어차피 그는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아. 돌아가 봤자 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겠지.
그러면 나는 이제 어쩌면 좋을까. 그에게 멋대로 소리치고 뛰쳐나오기까지 했는데, 돌아가면 그에게서 나가란 말이나 듣지 않을까. 서늘한 표정을 하고 의지할 수 없는 상대라서 미안하게 되었군.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싹해지고 만다. 이곳을 나가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갈 곳 따위 없는데.
비행청소년 마냥 시내를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 해가 졌다. 그의 집으로 거취를 옮긴 뒤 식사 시간보다도 늦게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대로 주린 배를 안은 채 달이 하늘 꼭대기에 걸릴 때까지 배회를 거듭했다.
포기하고 집에 갈 생각이 든 건 이걸로 4번째 시비가 붙었을 때였다. 혼자 돌아다니는 게 만만하게 보였는지 돈 좀 있느냐든지 같이 놀자든지 귀찮게 구는 인간들을 때려눕히자 허기가 더 심해져 어쩔 수 없이 저택으로 향했다.
이 시간이라면 그도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몰래 들어가서 먹을 것 좀 챙기고 짐도 챙겨야지. ──정말 이대로 영영 나가버릴 생각이야? 글쎄, 나도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자문자답 같은 걸 하며 발뒤꿈치를 세웠다. 결론은 미루기만 한 채 막 대문을 넘어 현관으로 들어오자,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왔군.”
왜 여기에? 중얼거리려는 것보다 먼저 그가 이름을 불러왔다. 에슬리. 그에게서 이름을 불릴 때면 늘 어딘지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게 된다. 평소엔 잘 불러주지 않아서 그런 걸까. 움찔하고 화난 기색의 그를 응시한다. 그 분노조차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고 떠올릴 때 한숨과 함께 그의 손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안심을 시켜주려는 듯, 제법 상냥하게 쓰다듬는 손길과 함께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듯 그가 읊조렸다.
“안 떠나. 안 떠날 테니……, 너도. 늦은 시간까지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라.”
내가 내뱉은 말에 대한 답인 걸까? 그가… 생각해준 걸까? 밥은 먹었느냐 물어보는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아직이니 지금부터 먹으면 되겠군. 그 말과 함께 그가 몸을 조금 비켜 문을 열어주었다. 당연하게도 들어오라는 태도에, 아직 내게 문이 열린다는 사실에 돌연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정말 들어가도 돼? 떨어지지 않는 발길에 주저하고 있자 그는 아카데미를 나오던 날과 마찬가지로, 아니, ──맨 처음 내게 손을 내밀어주던 그 때와 조금도 변함없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주었다.
내밀어진 손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응시했다. 깨달았을 때는 얼굴 위로 빗방울이 투둑, 떨어지고 있었다. ……빗방울이라면 빗방울이다. 마지막으로 운 기억이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한걸. 별이 맑은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무척 흐렸던 모양이다. 눈앞이 뿌옇게 변해서 그의 손이 똑바로 보이지 않았다.
끅끅, 억눌린 소리를 내며 더듬거리고 손을 붙잡았다. 억센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힘껏 움켜쥐자 그는 피식 웃으며 반대 손으로 젖은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질질 짜기는. 핀잔을 주는 말투에 안 짜,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 큰 줄 알았더니만 여전히 쥐콩이로군.”
이래놓고 누가 누굴 의지 못하겠다는 건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 함께 손이 머리로 옮겨갔다. 그가 토닥여줄 때마다 이제까지 어디에 다 고여 있던 건지 또 한 번 울컥하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치사하게 이럴 때만 다정하게 구는 사람.
그 뒤로는 기억이 애매하다. 밥은 제대로 먹은 건지 방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눈을 떴을 땐 침대 위에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아─…, 쪽팔려. 이러고 에르덴 얼굴 어떻게 봐야 하지. 사람이 수치스러워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이불을 둘둘 감아 웅크렸다. 이대로 고치가 되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사람은 자고 일어나면 또 배가 고픈 법이고 먹어야 살 수 있다. 포기하고 일어나자 청소만은 깨끗하게 되어 휑한 방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아직 스스로 납득하지 못했다. 이곳을 집이라 여기는 건지 그를 가족이라 생각하는 건지, 동경하던 가족이 깨진 것에 여전히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고 그의 옆에 있는 게 비겁한 것만 같아 있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모양이다. 사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손을 잡고 싶었다고.
내 머리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나는 이곳을 집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제야 깨달은 이야기였지만.
내내 풀지 못하던 짐 꾸러미를 풀었다. 선물 받은 드림캐처를 창가에 장식하고 두꺼운 책들을 차곡차곡 책장에 꽂았다. 버리라는 말을 듣고도 버리지 못했던 십자 모양의 펜던트도 용병패와 함께 서랍을 열어 넣어두었다. 더 이상 잃어버리지 말아야지.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것 무엇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