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그 선배’가 시비를 털어 왔다. 빌어먹을. 대놓고 차별하지 않는다던 사람은 어디로 간 거야. 뒷배나 서줄 것이지. 차별이란 것은 언제고 기분 좋을 리 없는 것이었지만 대놓고 하지 않는 쪽이 더 기분 나쁘다. 열 내는 이쪽이 도리어 바보 같아져.
언제나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구간에 들어서자 막 자기 말을 돌보던 그 선배와 마주쳤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었지. 눈이 마주쳐 하는 수 없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 선배는, 아니 그 놈은 픽 비웃음부터 내보였다.
-이런, 너무 다가오지 말아주겠습니까? 당신이 오면 말이 흥분해버려서요. 겁을 먹지 않습니까.
느글느글한 목소리에 위아래로 훑어보던 시선, 그 시선이 마지막에 어디로 꽂히는지 뻔히 보여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가렸다.
이 버릇만큼은 고쳐지지가 않아. 걸어오는 시비를 피하고 싶진 않았지만 소동을 피워봤자 내가 손해다. 입술을 깨물고 주의하겠, 습니다. 그렇게 답하였지만 상대는 거기서 물러나주지 않았다.
-동물들도 알아본단 뜻이겠죠. 변이종을.
이죽거리는 목소리에 미간이 좁혀든다. ……아아, 변이종 말이네. 제기랄. 언제부터더라. 단순히 사일란이라고 피하던 것이 변이종 취급으로 변한 것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확실히 ‘우리’는 자연에서 빚어진 것이 아닌, 변이된 존재니까.
대형 변이종의 출몰이 늘고 제국의 영지가 좁아지고 외곽에서 들어오는 피해 소식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리면서 내부에서의 사일란을 향한 적대적인 시선도 더 강해졌다. 저들도 아마 모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걸. 다만 필요한 것이겠지. 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상을 견디기 위해 씹어낼 대상이.
하지만 순순히 그 말에 굽히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들어오지도 않았어.
“하하. 변이종이 두려워 겁을 먹어버려서야 군마라 부를 수 있어? 나라면 그런 말, 절대 타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아~ 아니면 말이 주인을 닮은 건가?”
이크, 또 저질러 버렸다. 내뱉고 나서의 후회였다. 상대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 해진다. 어느새 우리 둘의 떠드는 소리에 주위로는 하나, 둘 다른 기사들이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다. 사람이 늘어나면 내 쪽이 불리한데.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해야 좋을지 재빨리 머리를 굴린다. 또 징계를 먹었다간 정기사로 승급이 늦어질 거다.
그렇게 서로 흉흉한 눈빛만을 주고받으며 대치 상태로 눈치를 살피다 기어코 상대가 언성을 높이려는 그 때였다.
“챠콜 후배. 또 존대를 빼먹었어요.”
“ㄹ… 모겐스, 선배.”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팽팽한 분위기 사이를 부드럽게 비집고 들어왔다. 긴장감이 순식간에 풀리는 신기한 목소리. 무심코 이름을 부르려다 얼른 호칭을 고치자 그가 이쪽을 향해 살짝 웃는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입매와 달리 이상하지, 눈은 차가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눈빛이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그가 말에게 손을 뻗는다. 말은 루의 손길에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착한 말 같이 보이는데요. 한 마디를 덧붙이며 선배를 응시하자 그 사람은 조금 주춤거렸다. 그 틈을 타 루가 등 뒤로 손짓을 한다. 물러나. 고개를 끄덕이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나를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도 루 덕분에 일이 커지기 전에 자리를 모면했다. 몇 번째더라. 이렇게 능숙하게 분위기를 흐트러트릴 만큼, 루는 매번 이런 수모를 겪었던 걸까. 신경이 쓰여 물어보았지만 그는 그저 헤실헤실 웃으며 얘기해주지 않았다. 그가 답해주지 않은 건 이것만이 아니다.
────아카데미가 문을 닫으면서 루와도 잠시 헤어지게 되었지만 그 뒤에도 우리는 꾸준히 편지를 했고 나는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아 아델하이에 다녀오기도 했다. 한 달을 머물고 그의 집을 나오던 날, 다음에 또 놀러오라는 그와 그의 어머니를 보며 이렇게 재회 또한 익숙해지는구나를 배웠다.
하지만 쭉 이렇게 지낼 거라 믿은 건 내 안이함이었다. 「너에게 꼭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 믿고 기다려줘.」 사정은 설명해주지 않고 마지막으로 보내온 2년 전의 편지, 그 뒤로 루는 연락이 끊겨버렸다.
걱정했다. 헤어짐 후의 재회도 당신과 함께 익숙해지고 싶었지만 이런 기다림은 별로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닌지, 혹시 또 나를 두고 가버린 건지. 이대로 루와 다시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처음 1년은 어떻게든 별 일 아닐 거라 버텼지만 무작정 연락이 끊긴 시간이 길어질수록 머릿속으로 나쁜 상상만 들었다.
이런 건 정말로,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서 나쁜 생각을 하는 대신 차라리 원망을 키웠다. 그러면서도 언제든 그가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면 반겨줄 거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아델하이에서 지내면 그가 돌아왔을 때 좀 더 빨리 알 수 있을까? 제국군에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수도로 향하는 동안에 머리 한 편에선 입단보다도 그의 생각이 맴돌았다.
그런데 막상 무사히 입단을 마치고 기사단에 들어가자 정식 기사로 있던 그를 만났을 때의 놀람이란.
──그리고 섭섭함이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어째서 연락은 해주지 않았던 건지 편지에 남겼던 해줄 이야기는 무엇인지, 묻고 싶은 건 산더미 같았다. 원망이나 섭섭함도 잔뜩 쏟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다.
‘변했어.’
같은 사람이 맞을까 놀랄 만큼 2년 만에 재회한 루는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언제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는 과거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미소 뒤에는 무기력함이 있었고 온기가 서렸던 눈빛은 푸르게 식어 있었다. 정식 기사인 그와 나는 함께 할 시간이 잦지 않아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기사단 내에서의 그의 평가가 아카데미에 있을 적과 많이 다른 것은 알았다.
그가 낯설어서, 다가갈 수 없었다. 혹시 곁에 있어주겠단 그 마음까지 변해버린 건 아닌지 확인하기 두려웠다.
이렇게 그를 잃고 마는 줄로만 알았다.
“에슬리?”
“……루.”
오늘은 정말 운이 없는 연속이다. 또 다시 찾아온 발작에, 진이 빠져 으슥한 정원 한 구석에 앉아 있던 내 앞으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에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들었다. 방 안에 있기엔 공기가 답답해서 나온 게 화근이었을까. 이곳은 사람들의 발자취가 거의 없어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지, 돌이켜보면 그러니까 그가 나타난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카데미에 있을 당시에도 그는 이렇게 혼자 정원을 산책한다고 했으니까.
이런 한심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다시금 아래로 향하려는 고개에 그는 걱정스러운 듯 눈썹을 축 내리고 손을 뻗어왔다. 뻗어오는 손에 어딘지 머뭇거림 같은 게 보이는 것 같다면 내 기분 탓일까. 낯선 얼굴 위로 그리운 표정이 겹치는 것 같아서, 생각하기보다 먼저 몸이 움직여 그 손을 잡아당겼다.
풀썩, 하고 순순히 옆에 앉는 그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댄다. 식은땀을 흘린 탓에 차가워진 몸에 그의 체온이 전해졌다.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어줘. 내 마음을 알아준 건지 그는 잠자코 곁에 머물러 주었다.
짧은 시간이었다. 대화는 하지 않았다. 입을 열었다간 지금의 평화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루의 온기가 전해지고 있으면 꼭 그가 익숙하던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아주 조금, 위로를 받았다.
변했어? 아마도. ……그래도, 온기는 변하지 않았어.
내가 더 성장해서 그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에슬리가 먼저 내밀어주는 손은 이런 기분이구나, 싶어져서….」
내가 먼저 내민 손이 어떤 기분인지 물어봐도 될까.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기로, 지켜내 보이기로 약속했으니까. 노력하고 싶어. 소중히 하고 싶어. 언젠가 스러질 것을 알기에 더욱.
《저기, 루는 지금 행복해?》
오늘의 날씨 : 거지같음밤공기가 기분 좋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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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쓸 때 1부 마지막이랑 같이 드려서 루-모겐스 선배 로 드러나는 관계의 변화가 내심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