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챕 개인로그
「「그리고 비로소 「우리」가 된다.」」
지평선 너머로 타오르듯 붉은 해가 떠오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라면 움직여도 되겠지. 기실 불침번은 유명무실했다. 잠 못 이루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도 굳이 피곤을 무릅쓰고 깨어 있던 건 꿈속에서는 네 숨소리가 들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들려오는 목소리, 나지막한 호흡, 박동. 오르내리는 가슴. 어둠속에서 그런 것들을 살피다 보면 새벽은 금세 걷혔다.
모래밭을 지나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 사이 몇 번이나 오간 덕에 호수를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손을 살짝 담그자 새벽 공기 덕인지 시리도록 찼다. 잠을 깨운다.
「발만 담그고 와.」
노먼은 수영을 안 해봐서 그래. 어차피 담글 거면 발이든 몸이든 별 차이 없는데. 당사자가 들었으면 기함을 토할 생각을 하며 재킷도 셔츠도 벗어둔다. 등을 가로지르는 얇은 크롭만 남기고 쭉 기지개를 켜면 어렴풋하게 호수 위로 등이 비쳤다. 이곳에 오기 전에 한 헤나가 아직 선명했다. 해파리가 유영하고 있었다.
「아가미 달린 것이 뭍에서 숨 쉬는 꼴이군. 형제여, 어찌 걸맞지 않은 곳에 서 있는가?」
헤나의 지속력이란 대충 빠르면 사나흘, 길면 2주. 라리사는 열흘 정도 걸리곤 했는데 등은 면적이 크니까 좀 더 오래 갈까? 이것으로 날짜를 헤아릴 생각이었다. 헤나가 지워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다 지워지면 얼른 돌아가서 새로 해야지. 다행히 아직은 선명해 보였다.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고작 3일이다. 그런데 참 힘들었다.
“여긴 너무 건조해. 건조하고 숨 쉬기 어려워. ……기분이 자꾸만 가라앉아.”
이상해져.
게이트를 넘자마자 처음 느낀 충격, 그 뒤로 이어지는 풍경의 비현실성. 이유도 알 수 없이 짜증이 나거나 초조해지거나, 숨이 갑갑해 연신 부담을 안았다. 왜 자꾸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잔뜩 꼬인 마음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건 우스꽝스럽고 한심했는데 그러다 보면 많은 것들이 걸렸다.
이런 곳을 낙원이라고 도망친 이들을 연민했고, 그럼에도 결국 낙원 같은 건 없어 볼품없는 삶을 영위하는 이들을 동정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을 돕고 싶으면서 동시에 한편에서는 냉정하게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고민했다. 너희는 우리의 위협이 될까, 되지 않을까. 그럴 때면 참을 수 없이 슬펐다가 인간성의 부재 같은 것을 느꼈다. 달리 괴물이 되지 않아도 인간은 쉽게 괴물이 된다. 이곳이 정말 낙원이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졌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삶의 사람들을 차라리 분리한다면. 조금은 우리의 삶도 덜 비참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내가 네 손을 놓아버리고 안녕하거나, 너와 함께 바다에 빠질 수 있다면.
생각이 오가는 동안 라리사 소워비는 몇 번이고 ‘너희’와 ‘우리’를 오갔다. 상상 속에서 발걸음은 경계의 이쪽과 저쪽을 거듭해 밟았다. 뭍이었다가, 물이었다가. 우리가 되었다가 너희가 되었다가. 그러나 결국 어디에도 치우치지 못하고 위태로운 선 위로 돌아왔다. 갈 곳이 없었다. 이방인만 같은 삶이다.
「라리사는 인간이에요.」
「내가 없어도 너는 인간이야.」
도태종이라고 이뮤니터를 칭하던 오드의 말에 동의할 생각은 한줌도 들지 않았다. 그들이 도태되었다면 너희는, 너는, 나는, ──우리는 우월한가. 우열을 가르는 일이 우스웠다. 편을 갈라 살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러나 공존은 성립되기 어려운 말 같아 보였다.
「우리는 하나다. 하나가 곧 우리고 우리가 곧 하나지.」
공존을 대신하는 일체화. 그것은 결코 매력적인 제안이 되지 못했다. 이 자리에 있는 14명의 캐리어만 보아도 도통 하나가 될 만한 성질이 아니어서 매운 음식을 잘 먹거나 못 먹거나, 단 걸 좋아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흡연자거나 비흡연자거나, 밤과 낮에 따라 깨어 있는 시간도 제각각인데 무엇을 보고 하나가 될까. 모든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면 편안해질까? 다들 숨기는 게 많았다. 그게 좋을 리 없다.
누군가는 그 제안에 흔들리기도 했던 것 같지만 적어도 라리사는 우스울 만큼 간단히 회유를 흘려보냈다. 나는 같이 있고 싶은 거야. 같아지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런데도 오드가 감화시키려는 순간, 거부할 수 없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휘감아오는 느낌이 들었어. 자꾸 불렀어. 이쪽으로 오라고.」
「그래도 안 갈 거지?」
안 갈 거야. 너도 안 보내줄 거야. 하지만 그게 내 뜻대로 되지만은 않아. 침식률이 치솟고 오드의 목소리에 감화되는 무의식을 느꼈다. 본능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강한 충동. 이성을 무시하고 몸의 자유를 앗아가는 그것은 틀림없이 이 안에 존재하는 반쪽 오드의 피였다. 검은 피가 나를 움직였다.
그제야 라리사는 조금 이해했다. 이곳에 오고 난 뒤부터 계속해 느껴지던 숨 막힐 것만 같은 답답함, 그리고 불편함. 모르는 사이 저항과 굴복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를 부르는 이 검은 별의 의지로부터.
‘여긴 너무 건조해.’
건조한 건 여기가 아니야. 이 공기를 건조하다고 받아들이는 네 마음이지.
여긴 바다야. 그리고 너는 이 안에서 숨 쉴 수 있지. ‘우리’가 주었잖아.
마음에 들지 않아?
「빌린 아가미를 다시 뺏기고 싶을 리가 없잖아요?」
나는──, 나는…… 지금 어디쯤에 서 있지?
발밑이 새까맸다. 물속에 잠긴 적도 없는데, 어느새 그것들이 뭍까지 올라와 당기고 있었다. 경계가 허물어졌다. 돌아갈 거야. 나는 돌아갈 건데, 그런데…… 잘 모르겠어. 어쩌면 그건 내 문제가 아닐지도 몰라.
뭍까지 잡으러 온 이것들을 뿌리치는 대신 같이 잠겼다. 검은 호수가 반겨주었다. 발만 담글게, 아니 발도 담글게. 하지만 곧 나갈 거야. 올라갈 거야. 조금만, 시험하고 오는 거야.
이곳에도 바다가 있다고 들었어. 그곳에 가도 될지 모르겠어.
말주변이 부족한 자캐여서 로그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𝐓𝐇𝐄 𝐂𝐔𝐑𝐄 : 존재의 증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 상자 안의 바다 (0) | 2022.08.25 |
---|---|
18) 뾰족한 끝 (0) | 2022.08.25 |
16) 우리의 영웅 되는 길 (0) | 2022.08.25 |
15) 앞으로 이틀 (0) | 2022.08.25 |
14) 오년간 (0) | 2022.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