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시윈 세르게예비치 옌
“너도 학교 같은 거 다니고 싶었던 적 없냐?”
한 마디 물음에 기억을 강처럼 거슬러 올랐다. 아마도 한참 옛날, 잘 기억도 나지 않을 시절에는 학교에 다니기도 했던 것 같다. 짝도 있었을까? 단짝은 언제나 아냐였으니까 그 아이였을 수도 있겠어. 그런 주제에 단짝과 나이가 같았는지조차 잊은지 오래다. 보호시설에서 지내는 동안 얻어간 건 읽고 쓰는 것과 간단한 산수 정도로, 겨우 그 정도였음에도 격리시설로 집을 옮기고 그것은 대단히 유용이 쓰였다.
오세아니아 쉘터에서도 중심부는 아니었던 격리시설은 상대적으로 중심부에 비해 낙후된 편에 속했다. 이곳까지 오는 미성년자 캐리어도 많지 않았고 어리고 미숙한, 아직 제 능력이 무엇인지 어떻게 다루면 좋을지도 모를 망아지 같은 아이들을 시설은 엄격히 통제하기보다 방임했다. 시간표라는 것이 있고 규칙과 규율이 있었으나 지키지 않는다고 나무랄 교사도 없는 곳에서 아이들은 불안정했고 9살의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 사이의 텃세에 치이고 감염자와 캐리어의 위험성에 대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다 보면 자연히 행동반경이 좁아졌다. 지식은 아무도 듣지 않는 수업 대신 책을 통해 쌓아올렸고 곧 밖에 나가 뛰어노는 것보다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환경에 대한 적응이었다.
학교에 대한 흥미는 그것으로 그친다. 바깥도, 사람도, 불필요한 관심에서 눈을 돌렸다. 그렇게 상자가 닫혔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흐른다. 상자는 어느새 열렸고 텅 비어 있던 안은 여러 가지로 채워졌다. 새로 만든 인형이 줄을 이었고 직접 찍은 사진이 벽을 장식했다. 훨씬 풍부하고 다채로워진 세계를 스스로를 꾸밀 줄 알게 되면서부터 원하는 게 늘었다.
이번 전쟁이 무사히 끝나면, 그래서 돌아가면 어쩌면 더 싸울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생겼다. 오드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세계 같은 건, 태어나면서부터 게이트와 함께 했던 라리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와 같았는데 그런 미래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제일 먼저 든 걱정은 오드가 사라진 세계에서 예비 오드인 캐리어의 처우였다. 좋게 말하면 처우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처분을 어찌 할지 우선적으로 떠올렸다. 겨우 게이트 너머의 오드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 게이트가 열리지 않아도 오드가 될지도 모를 존재를 내버려둘까.
평생을 다시 격리시설에 갇히면 양반이고 어쩌면 그래, 영웅의 말로는 사살. 그런 최악의 가정까지도 했다.
「그런 생각 마라. 이미 너네는 여기 평생 갇혀 지낸 거나 다름없는데, 다 끝나서 가두는 걸 두고 보라고? 그렇겐 못하지. 차라리 다시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누구도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기껏 싸움이 끝났는데 왜 또 싸워야만 해. 나는 싫은데. 이 이상 싸우고, 쫓기고, 그건 너무 피곤하지 않아?
「나는 죽을 때까지 싸워도 돼.」
누구는 그랬다. 산다는 건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라고.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네가 우리가 갇히고 핍박받는 꼴을 못 보겠는 것처럼 나도 네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혼자 투쟁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거면 조용히 갇혀 있어도 돼. 그런데, 시이가 그런 게 싫다고 하면……」
그럼 어디든 나가자. 우리끼리 살 수 있는 곳을 찾아봐야겠어. 쉘터 바깥으로 나가면 어디든, 캐리어를 위한 땅 하나쯤은 떼어줄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
게이트 너머가 낙원이면 어떨까. 오기 전에는 오만 상상을 다했는데 막상 넘어와 본 땅은 오드에게 다 먹힌 죽은 별밖에 되지 않아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던 어딘가의 구절을 떠올리며 그래, 투쟁. 까짓것 투쟁. 어울리지 않게 싸울 생각이나 해보기도 했다. 싸움은 싫었지만 함께 싸워줄 동료를 든든히 얻어서 벽을 세우든 울타리를 세우든 선을 긋든 좋으니 어디 바닷가 근처에 땅을 얻어서 거기에 집을 짓고 조용히 사는 걸 새로운 목표 삼았던 것도 같았다. 그것만 해도 큰 욕심이었다.
30명은 너끈히 앉을만한 긴 테이블을 만들어서 해변에 설치하는 거야. 이런 곳에서 배달은 꿈에도 못 꿀 테니까 모두에게 각자 음식을 갖고 오라고 시켜서 홈파티를 열어버려. 미카엘라가 이웃이 되어주겠다고 했어. 파란 꽃이 벽을 덮는 예쁜 집이 나란히 생기겠지. 샤오리도 자기 방이 필요할 테니까 방은 3개는 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가끔은 거실에 다 모여서 잘 수 있으면 좋겠어.
어딘가의 책에서 읽은 구절이다. 꿈이란 것도 결국 뇌가 인지하는 만큼 영향을 받아서 안 된다고 생각한 건 상상으로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라리사의 상상 속 미래는 늘 외떨어진 곳에 홀로 있었다. 홀로 있었는데, 이웃을 상상하게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사는 미래 같은 건 터부여서 가정으로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로 좋았다. 불행하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네가 있어서 좋아. 너희가 있으면 돼. 그 이상으로 무얼 바라지?
그런데 갑자기 떨어진 가정이란, 대단히 충격적이어서.
「캐리어가 아니게 되면 뭘 하고 싶어?」
「그 땐……」
──그 땐, 안에서 살아도 될까.
처음으로 그 생각을 했을 때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귀 끝이 발갛게 달아 어쩔 줄 몰랐다. 해선 안 될 말이라도 한 것처럼 온갖 눈치가 다 보이고 발끝은 자꾸만 움츠러들어서, 내가 아주 잘못 말한 것 같은데. 누구를 그렇게 의식해 숨기려 한 것일까.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바닷가에 집짓고 바다에서 노는 그런 거 말고. …일반인이 되면, 하고 싶은 거 없어?」
「……나는, 그러니까…. ……걸어보고 싶은데, ……부딪쳐도 되는, 그런 사람 많은 곳에서.」
왜 그렇게 죄스러운 마음인지, 숨기고 또 감추고. 네 앞에서 꺼낼 수가 없는지. 사람은 자기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이 말은 또 누가 했을까.
「──예전 우리 마을 번화가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가끔 밤 축제 같은 걸 했어.」
할 말을 잃고 망부석처럼 서 있는 사이 머리 위부터 달래는 듯한 어투의 말이 천천히 흘렀다. 고개는 여전히 아래 못 박힌 채 귀만 기울이고 있으면 들려오는 풍경이 널 닮아 참 따뜻했다. 네가 살던 곳은 아주 추운 곳이라 들었는데 그래서 반대로 너는 몸 안에 열을 키운 걸까. 두꺼운 모자를 쓰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거리를 채우는 음식의 김과 사람들의 말소리, 뜨겁게 데운 과일주, 그런 데나 찾아볼까?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어디든 섞여들 수 있는 곳으로. 섞여 들어도 아무런 문제 없는 곳으로, 그냥 그곳 사람처럼. 그럼 어떨까.
뺨을 건드리는 손길에 굳어 있던 표정이 무너진다. 꼿꼿하게 버티던 몸의 힘을 툭 풀면 그대로 네 품에 이마가 부딪쳤다. 두서없는 본심이 흘렀다.
“……왜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고 싶은지, 잘 모르겠는데.”
왜일까. 정말 모르겠어.
“안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어. 잠깐이지만.”
그런데 그게 꼭 잘못된 것만 같아서. 정말 왜일까.
“나는 정말로 많은 게 필요 없는데, 시이나…… 다른 사람들이 있어주잖아.”
그것만으로 나는 정말 많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안에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해버린 거야. 그런 걸 바라기라도 했다가는 꼭 너희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안 될 것만 같은 마음이 드는 거야. 내가 감히 말이지.
스스로도 명확히 하기 어려운 복잡한 마음을, 기분을 한 층만 더 파헤쳐보면 결국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속내라는 것은.
“그러니까, ──마.”
두고 가지 마.
내가 너를 두고 가는 게 아니라 네가 날 두고 갈까봐 겁이 나. 정말 네가 날 먼 바다에 방류라도 할까봐. 괜히 이런 마음 먹고 말았어. 겨우 쥐고 있는 이 작은 세계마저 잃고 말까봐 그게 두려워서, 무서워서…… 더 넓은 세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아.
나는 있지, 너희가 좋아서 그 이상은 정말 바라지 않아. 그러니까 아무도 잃지 않게 해줘.
쓸 때... 공감성수치에 부끄러워서 몸부림치면서... 자캐 부끄러워 자캐 부끄러워 염불 외우며 쓴 로그.
저는 부끄럽지만 자캐에게 솔직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별개로 '캐리어가 아니게 된다면'이라는 이야기를 제일 먼저 라리사에게 해준 건 페어였는데, 그때 처음으로 라리사 스스로도 나 만약 캐리어가 아니게 된다면 외딴 바닷가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어! 라고 자각을 했어요.
그때는 스스로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만약 내가 '너희 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는 것처럼 되었을 때 너희에게 버려질까봐 그게 두렵고 무서웠다고.
나 방생하지 마...
'𝐓𝐇𝐄 𝐂𝐔𝐑𝐄 : 존재의 증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 그리는 곳, 돌아갈 곳 (0) | 2022.08.25 |
---|---|
20) 어떻게 말하면 좋았을까 (0) | 2022.08.25 |
18) 뾰족한 끝 (0) | 2022.08.25 |
17) 허물어지다 (0) | 2022.08.25 |
16) 우리의 영웅 되는 길 (0) | 2022.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