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시윈 세르게예비치 옌
「두고 가려는 게 아니라…… 네가 자라길 바라는 거야.」
애정이 물처럼 쏟아지고 관심이 햇살 드리우는 곳에서 나는 자라고 있었다. 29살 먹도록 여즉 덜 자란 줄기가 늦은 기지개를 켜듯이 더 넓은 세계를 향해 가지를 뻗어나갔다. 누군가는 당연히 누려온 것들, 평범한 인생. 보통 사회에서 배워야 했던 많은 것들을 늦깎이처럼 하나하나 익혀갔다. 혼자서라면 하지 못했을 성장에는 너희라는 지지대가 있었다. 너희 바람을 따라 모두가 그러했던 걸 나 또한 누리게 된다.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이 당연하게 주어지면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알고 욕심내게 되었다. 그러자 이 사치스러운 순간이 신기해, 신기루만 같아 이러다 천벌이라도 받으면 어쩌지 겁이 났다. 다시 그 아무것도 없는 작은 상자로 기어들어가는 벌이다. 그럴 바에야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는 지금 안은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밀어내려던 내 앞으로 드리우는 네 표정이, 기쁨으로 물들어 있어서.
“그런 건 어때, 라리사.”
묵은 잠에서 벗어나 검은 재를 치우고 보이는 선명한 색에 나는 따라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아마도 행복해서 울어버리고 말 거야.”
20년을 꼬박 채워둔 바닷물 같은 눈물을 한참 쏟아내다가, 다 울고 나면 그만큼을 다시 보충해야 한다고 너를 잡아끌고 바다로 향할 거야.
“──모체가 죽는다고 오드가 사라지지는 않는대.”
하늘은 여전히 붉었고 태양을 가릴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없으니 당연히 비도 내리지 않겠지. 못이며 호수며 바다며, 물은 존재하는 모양인데 그 증발한 것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수증기마저 ‘하나’가 되기라도 했을까.
이곳은 메마르기에 참 좋은 환경이었고 네 불을 쓸데없이 소모시키기에도 좋았다. 앞서 걸어가는 등을 보고 있으면 덥수룩한 검은 머리카락이 꼭 검은 연기 같기도 해서 바람에 연기가 날리면 날릴수록 네가 작아지는 것도 같았다. 불길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할 것도 없이 보였다. 너는 지쳐 있었다.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
「알아. 알고 있어.」
알지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죽음을 각오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요즘 들어 부양받는 것 같다고 너는 종종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무슨 부양이냐고 괜찮다고, 뿌리치고 저 앞으로 혼자 걸어가 버리기나 했을 네가 걷는 대신 그 자리에 멈춰서. 당장에 다 내려놓고 자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어서 널 재워야 할 것 같은 한편으로는 잠든 네 가슴에 귀를 가져다 제대로 뛰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느 날 그렇게 잠만 자던 네가 영영 눈뜨지 않는 풍경을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지쳐서 더는 무리라고, 깨우지 말라고 한다면 나는 또 다시 미아가 된 기분에라도 빠지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쉼 없이 네 주위를 맴돌았다. 손을 쥐었다. 아직 이 세계를 놓지 않도록, 이어져 있도록. 그래도 조금 더 노력해주었으면 했다.
시대는 언제나 그래왔다. 인간은 인간으로 대체될 수 없는데도 꼭 대체될 수 있을 듯 사회가 인간을 소모시켰다. 죽기 싫다는 기분마저 꺾어내 영웅을 무릎 꿇리고 그 목을 쳐내는 일이 흔했다. 그렇게 다 깎여나간 인간에게는 마지막으로 꼭 한 평의 땅이 주어지지.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잡히던 대로 읽던 책 중에서 참 알기 쉽게 쓰였던 그것이다. 내게는 지금도 앞으로도 이만큼의 땅이 꼭 알맞겠구나. 생각하던 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기다리는 집이 있었고 기다려줄 네가 있다. 그러면 네 곁에서 나는 내 역할을 찾는다. 네 불길이 너무 크게 타올라 너마저 해치지 않도록, 반대로 너무 사그라져 춥지 않도록. 신중하게 애정을 안고 관심을 기울여, 네가 그랬듯이.
내일이 오는 게 두려운 한편으로 당장 눈앞의 더운 태양이 저물길 바랐다. 사람은 꼭 소모되지 않더라도 말라갈 수 있다. 여긴 너무 건조해. 중얼거리면서도 까끌거리는 침을 삼키고 말을 계속했다.
“기껏 캐리어가 아니게 되는 미래라는 것을, 20년을 보내온 ‘나’를 두고 가는 생각도 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기대가 꺾였다고 해서 그렇게 실망스럽지는 않아. 상상한 것만으로 아주 좋은 꿈을 꾸고 온 기분이라서.”
‘안의 세계’에 들어가 보통 사람에 편입해 사는 삶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게 세계가 조금 열린 것 같았어. 그걸 기뻐해도 된다고, 네가 가르쳐줬어. 그래서 나는 더 미래를 꿈꾸게 되었어.
그러니 우리 같이 살아남기를 애쓰자고 말해.
해가 저물면 달이 뜨고 이세계의 밤은 낮의 열기만큼 시리도록 차가웠다. 모포를 둘둘 두르고 아직 멈추지 않은 행군을 계속했다. 오늘도 네가 너무 지치지는 않았는지 잠은 잘 잤는지 눈여겨본다. 정신을 여기 두지 못하고 툭하면 산만하게 부유하던 건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즘은 네가 더 심해 보였다. 그럴 때면 나는 더 떠들었다. 실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담고, 네 불이 꺼지지 않도록 부채질을 한다. 그리고는 상상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돌아간 뒤의 미래를.
일어나지 않는 아빠를 늦잠재우자고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움직인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도 너는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정말 깊이 잠든 것인지 깨어날 줄 몰랐다. 그래도 불안할 건 없었다. 일어나고 말 테니까. 샤오리의 머리를 리본으로 묶어주고 네 몫의 아침을 남겨둔다. 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에 간식거리와 장난감, 사진기를 담고 우리는 먼저 집밖을 나간다. 현관에 달린 차임이 영롱하게 울린다. 한 번 더 울릴 즈음이면 돌아오겠지. 문을 열면 집안에는 온화한 차향이 감돌고 불과 물이 한 데 섞여 가장 사람이 살기에 좋은 온도를 맞추고 있었다. 오늘 찍은 사진을 자랑하고, 내일은 너도 함께 가자고 조르고. 그러면 우리 바다는 그만 가고 어디 다른 곳이라도 놀러 가자고.
바람이 머물다 간 해변가, 하늘을 점령하는 붉은 구름. 수평선 너머 산등성이가 계절을 따라 옷을 갈아입으면 축제날이 다가온다. 나가자. 함께 나가. 형형색색의 설탕과자, 잠을 깨우는 북소리, 그 날만은 뜨거운 과일주도 눈 감아 줄 수 있다. 대신 같이 마시기야. 미래는 너무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온도로 그려진다.
“파토르가 사진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는데, 찍고 싶은 게 생겼어. 돌아가면 제일 먼저 모여서 사진을 찍자.”
우리의 희고 푸른 집에 장식할 첫 번째야.
러닝타로 볼 때 이번 커뮤에서 유사가족을 많이 얻을 거라더니... 집도 가족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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