𝐓𝐇𝐄 𝐂𝐔𝐑𝐄 : 존재의 증명

20) 어떻게 말하면 좋았을까

천가유 2022. 8. 25. 00:23

For.키치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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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에 너네 얼굴 생각날까봐 곤란해.”

그것만으로도 잘했다고 칭찬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30분보다 더 걸려 나온 네 대답을 듣자마자 드는 감정은 불만족부터였다. 우리가 슬퍼할 게 마음에 걸리면 잘하겠다고 해야지 너는 또 죽는 순간을 생각하고 있어.

그새 수척해진 양 볼을 잘 쥔 채 심통이 난 표정만 지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이 네게 말해주는 것처럼 좀 더 그럴듯한 설득이나 듣기에 좋은 말이나 듣다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만 같은, 좀 더 너를 움직일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나았을까.

나는 이번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만을 쥐어짠다.

나는 죽을 가정 같은 건 하지 않고 있는데, 너는 내 앞에서 몇 번이나 그런 가정을 해.”

한 번 스스로 죽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래? 그만큼 너는 죽음에 가까워? 그럼 나도 널 따라 가정을 해볼까.

……네가 죽으면 스티치를 버릴 거야.”

큰키치도 작은 스티치도 바다에 멀리멀리 보내주고 말 거야. 예전에는 놓을 줄 몰랐어. 놓으면 큰일이 나는 것만 같아서, 잊으면 내가 죄인만 같아서 미련하게도 낡아빠진 인형에 추억을 구겨 넣은 채 꼭 안고만 있었어. 그 땐 그래도 괜찮았어.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그 작은 용량 안에서 추억을 제외하고는 채울 게 별로 없어서 텅 빈 상자 안에 낡은 기억만을 안은 채 곱씹고 또 곱씹고 보냈어. 어느새 원래는 무슨 색이었는지도 잊어버릴 만큼.

그런데, 죽은 사람의 시간은 거기 멈춰 있는데 나는 자라잖아. 아냐는 영원히 9살이지만 나는 24살이었고 25살이 되었어. 더는 9살 친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아. 죽은 부모의 얼굴이란 더욱. 에단도 아스터도, 또 다른 친구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잊혀지겠지. 그 친구들은 서운해 할지도 몰라. 하지만 따뜻한 게 좋다고 했잖아. 추억은 따뜻하지 못한데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은 따뜻해서 마음이 그쪽에 기울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몰라.

팀 오메가에 있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놓아줬어. 9차 때는 특히나 많아서 이제는 이름도 다 기억나지 않아. 아주 못됐지. 서운하게 굴었어. 그래도 어쩔 수 없어. 그들을 다 안고 추억하는 게 내겐 너무 벅찬 일이야. 그보다 지금 살아있는 너희를 더 소중히 하고 싶었어. 더 좋아하는 걸로 덮으라는 말처럼.

그러니까 네가 죽으면 나는 너를 잊을 거야. 잊고 말 거야. 키치 밀러.”

못된 말을 하지. 서운하게 해. 그렇게 해서 내 말을 부정하고 네가 조금 더 욕심을 내면 좋겠어. 네가 죽을 때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죽고 난 뒤에도 살아갈 사람들이 부럽다고, 그 사람들이 너를 두고 계속해서 새로운 인연을 쌓아갈 게 서운하다고, 너를 더 기억하면 좋겠고 더 오래 슬퍼하면 좋겠다고 욕심을 내면 좋겠어. 그렇게는 안 된다고 아등바등 살 생각만 하면 좋겠어.

이제 막 우선순위의 재조정에 들어간 너에게는 진도가 너무 빨랐을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조급했어. 닥쳐오는 위기 앞에서 서두르지 않으면 놓칠까봐.

심박수 84, 행군의 열기와는 다른 따스함, 아무리 덥고 지쳐도 숨소리가 들리는 편이 좋아. 인형으로는 채울 수 없는 거야.

대체품은 싫다고 했잖아. 그럼 좀 더 이기적으로 말해봐.”

대체되지 못하는 존재이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면 여기 남아 기억이 빛바래지 않게 있어줘. 아니면 자리를 내줄 거야? 심술을 부리는 건 누구인지.

네가 죽기 싫고…… 죽지 않겠다고, 그런 말을 하게 만들려면 커다란 곰인형을 사서 너 대신 더 사랑해줘야 좋을지, 스티치도 곰도 버리고 너를 잊겠다고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네 입으로 말해줘.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이야?


이 녀석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고민 많이 했던 로그... 라리사처럼 단순하고 직선적인 생각을 하는 애에게 키치의 병렬구조는 너무 어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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