𝐓𝐇𝐄 𝐂𝐔𝐑𝐄 : 존재의 증명

22) 파도 앞에서

천가유 2022. 8. 25. 00:27

For. 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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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을 때는 조금 서운할 뻔했는데. 그야 기대란 누군가를 살리는 원동력이지 않던가.

그런데도 나는, 정이 아주 많이 들었어요.

그제야 나는 다시 웃을 수 있었다. 네 목소리에 깃든 열이 따스했다.

기억은 반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어둑어둑한 벙커 안에서 기다리기만 하던 며칠간이다. 내일 나갈지 모레 나갈지, 바깥 상황은 어떤지 아무것도 알려주는 게 없어 벌써부터 땅에 묻힌 것마냥 웅크리고 있던 동안에 너와 자장가를 나누어 불렀다. 그 기억은 하나의 위안이 되어 지금도 종종 너무 조용한 밤이 오면 네가 들려주었던 희미한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렸다.

아가야, 잠들렴. 밀짚에 누워. 이 밤이 깊어지기 전에 잠들렴.

고요한 밤이 싫었다. 오늘, 아니면 내일 밤이 고요해질지도 모른다는 부정형의 기대가 싫었다. 누구의 탓도 아닌데 마음은 무너져 내려서 폐허와 같은 그곳에서 쓸쓸히 밤을 견뎌야 하는 미래가 싫었고 그럼에도 견뎌내 아침을 맞이하리라 상상하면 마음이 참 아렸다.

곧 저 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해가 뜬단다.

견뎌내고 이겨내 살아남은 자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상처를 극복하고 일어나는 인간은 언제나 찬란히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만약 할 수 있다면, 무너짐을 대비하지 않고 무너질 걱정도 하지 않고 견디지 못해도 좋으니 견딜 일 없고 칭송받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그런 무던한 평화를 영위하는 삶을 바라고 싶었다.

그것이 내 어리광이었다. 철 같은 거 들지 않아도 좋으니 기대게 해주는 손 아래서 대책 없는 낙관을 하거나 오지랖을 부리거나, 돌아간 뒤에 기다릴 평화로운 일상이나 시시콜콜하게 떠들며 희망에 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희망을 움직이기에는 아주 커다란 에너지를 요구하는데 이를 테면 공존은 희망과 무게를 같이 하고 배제는 공평한 희망 대신 차별적 희망을 안겨주는 식이다. 게이트 안의 우리는 바라는 희망을 얻기 위해서 죽을 둥 살 둥 노력해도 부족한데 게이트 바깥의 지구 사람들은 우리를 배제함으로써 손쉬운 희망을 얻으리란 말이었다. 생각할수록 조금 억울한 것도 같다.

쉬운 배제를 찾아다녔다. 그 배제의 당사자 됨에도 아랑 곳 않고. 몸소 겪은 입장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감기 환자가 집밖을 나가지 않는 것과 같다. 쉽고 편하다고 하지만 마땅히 합리적이기도 했다. 조금 억울하고 서운하지만 이해해. 당사자인 내가 이해한다고 말하니까 괜찮아. 다른 방법이란 찾을 줄 모르고 순종과 순응을 보였지. 그런데 네게서 처음으로 그게 아닐지도 모른단 말을 들었다. 불편하고 어려워도 모두가 살 방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가능성이다.

-너는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우리에겐 희망을 불어넣으려고 하다니, 모순이잖아.

공존, 전원 생환. 그 두 개를 함께 놓고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가능성을 헤아리는 한편 그러면 좋겠다. 막연한 기대를 갖는다. 기대가 좌절될 준비도 함께한다. 또 한 번 역설의 파도가 덮친다. 그 앞에서 우리는, 너는──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단단은 서툴구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지금에 충실하고,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군다. 내 눈에는 그게 네가 기대하는 방식 같았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간단해. 하지만 마음은 말과 다르게 움직이기도 해서 너는 부정의 기대도 긍정의 기대도 다 끌어안은 채 오늘을 대비해. 그리고 돌아가지 못할 각오를 하지.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으면 좋겠어. 엉망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주 엉망이 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말고. 네가 소중하니까.”

들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게 메아리 같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한다. 그 사이에도 무엇 하나 확신하지 못한 채 파도는 덮쳐왔다. 나는 아직도 네가 왜 바다도 물도 싫어하는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돌아가면 다시 물어봐야지.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달라고 들어야지. 그리고 사헬도 바다도 본부도 아닌, 우리가 아직 모르는 둘 다 좋아할 수 있을만한 곳을 찾아야겠어.

규칙적인 토닥임을 따라 한참 휴식을 취했다. 다 쉬었으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곧 목적지가 닥쳐온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맞을지 여전히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늘 하던 말을 할게.

네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을 할게. 네 기대를 배신하지 않을게. 속상할 걱정은 하지 말고 이번에도 전원 생환으로 돌아오자. 그러면 돼.”

그러면 아무것도 대비할 필요 없을 거야.


아단이랑도 즐거운 대화를 많이 나눠서, 아단이 라리사 앞에서 내심을 털어놓아줄 때가 좋았어요. 여러 가지 방면으로.(캐리어 인권에 관해서도, 여기 사람들 잃기 싫다거나, 다들 돌아갈 곳이 있네요 난 여기뿐인데 하던 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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