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이시헌
──눈, 같아졌네.
별 것 아닌 듯 입을 열었을 때 네 표정은 어땠더라. 사실 멋쩍어서 쳐다보지 못했다. 한 번쯤 말해야지 했지만 말할 기회가 나지 않았다. 그야, 알려봤자 좋을 것도 없었고. 쭉 모르는 채여도 상관없지 않을까? 한쪽 눈을 두고 온 것이 기실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자유함은 비단 눈만이 아니었으므로.
그래도 너에게는 내 입으로 말해주어야지 생각했던 건 아마도 우리가 처음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적, 그 첫 단추에서부터 시작된 관계 때문이다.
「……눈 색. 너도 말야. 다르네. 내 눈은 있지, 원래 이 색이 아니었는데…….」
의사 선생님이라고 주변에서 말하는 걸 들었다. 마침 네 눈도 서로 다른 색이었다. 그 때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생각이 길게 이어질 줄 몰라, 다짜고짜 널 붙잡고 제 하고 싶은 이야기나 늘어놓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멋대로 내 존재를 네게 끼워 넣은 셈이다. 너는 책임감 강한 이였으니 원치 않은 것이었다 하더라도 성실하게 내가 준 무게를 감당했겠지.
관심이 좋았고 애정이 기뻤다. 오랜 시간 존재함에도 존재하지 않는 마냥 유령처럼 떠다니던 내게는 있을 터를 옮긴 뒤부터 쏟아지던 한 번의 말, 하나의 시선, 별 것 아닌 사소한 것들이 달기만 했다. 네가 늘 나를 제 나이로 봐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면서도 스스로의 어수룩함을 알았다. 미숙하고 서툴고, 그래서 주는 애정이 마냥 달기만 하던 아이.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네게서 돌아오던 것이 뚝 끊겼다.
너도 명색의 금단증상으로 고통을 받았다면 알았을 텐데. 한 번 주어지던 그것이 영문도 모른 채 거두어졌을 때 드는 쓸쓸함을. 그럼에도 무작정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지 않았던 건 그 몇 년 새 쑥 자라기도 했으며 네 거리감을 누구보다 나는 이해해야 한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원망해도 돼.」
그러니 언젠가의 내가 너에게 멋대로 주었던 무게처럼, 반대로 네 무게를 내게 실어주어도 된다고 했다. 나는 그저 너와 무게를 나누고 싶었다. 바보 같은 맹목이어도 상관없이 애정만을 담아서.
답이 없는 문제를 마주했다면 차라리 원망하고 편해져. 왜 조금 더 비겁해지지 않아? 차라리 우리를 탓하면 될 텐데. 창백하게 죽을 날만 기다리는 낯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너를 죽게 둘 수 없어. 어떻게든 네가 나아지길 바랐다. 그래서 곁으로 갔다. 그만 해. 그만 해도 돼. 자책도 원망도 내려놓고 우리 조금 가벼워지기로 하자. 자장가를 불러줄게.
몇 번의 밤이 지났을까. 창문 너머로 구름이 흘러갈 때마다 달그림자가 파도처럼 일었다. 사각의 타일 위로 드리웠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것에 들릴 리 없는 파도 소리를 들었다. 우리 또 바다에 갈까. 하릴없는 이야기를 하며 그 바닥에 발 딛고 서면 침잠하고 있었을까? 아니, 네가 손 잡아주었잖아. 그렇게 가라앉지만은 않아. 이제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눈, 같아졌구나.
꺼려지던 눈색을 좋아할 수 있게 된 건 네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향을 잃고 나서도 지금 이 눈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우리 더 닮게 되었잖아. 이럴 때 보면 유난히 더 비슷하지. 스스로의 소모는 아무래도 좋기만 하면서 네 상실에는 더한 무게를 싣는 것이. 손길을 기꺼이 받는다. 그 손 안에서 나는 인간이었다.
「너희들이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게 돼.」
네 말은 어떤 것이든 귀 기울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만은 정말로 어려웠다고 말한다. 네가 우리를 아끼고 있다는 걸 알아. 네가 나를 인간으로 본다면 그래도 좋겠지. 네 기준의 나는 인간일지 몰라. 그래도 역시, 나는……. 확신하지 못함일까. 그 반대는 아니고? 아니, 이 이야기는 됐어.
내밀어진 손, 물끄러미 응시하는 건 시선 쪽이었다. 표정이었다. 내게 먼저 손 내미는 너는 이제 스스로 일어날 만큼 기운이 생겼어?
──이제 괜찮아?
누구든 사람은 무릇 시간 앞에서 일어날 힘을 얻기 마련이었다. 시간이라는 것만큼 야속한 단어가 또 있을까. 똑바로 일어서든 비뚤게 일어서든 죽지 않고 살아만 있다면 시간은 사람을 덤덤하게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그래서야 오래되고 해묵은 상처를 딱지로 덮어두기만 할 뿐이다. 언제든 긁히고 떨어지면 아물지 않은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
그래서 네가 나아지길 바랐던 것 같다. 무엇보다 너 스스로 나아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으니. 남을 원망하는 것도 자책하는 것도 그만두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던 목소리를 듣고 움직였다. 대단치 않은 것을 했다. 그저 이야기를 듣고 곁에 있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아. 먼저 떠나지 않아. 부르면 갈게. 곁에 있을게. 네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앞으로도 나는 경계 위에 있겠지. 너희와 같아질 수는 없다. 그러니 언제까지든 영원히, 네 곁에. 그런 약속은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먼저 떠나가는 건 너일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서운하긴 할 거야.”
어딘가에서 네가 건강하면 충분해. 이왕이면 행복하기도 하면 좋겠어. 나는 있지, 너희가 모두 행복하면 그걸 내 행복 삼을 거라서 네가 행복하지 않으면 나까지 행복하지 못할 거라고 또 멋대로 의미를 안겨주고 무게를 실어버릴 거라서, 그러니까 앞으로 너는 행복할 거라고,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이왕이면 있잖아. 너무 멀리 가지는 마. 가까이 있어줘. 이렇게 말해도 돼? 이 온기를 잊지 않도록.
“손을 잡는 건 일어서기 위해서만이 아니잖아.”
영원하지 않은 시각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밤이 지나고 날은 또 밝겠지. 각자가 각자의 길로 나아갈 시간이었다. 네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걸로 괜찮아. 그래도 있잖아…….
때가 온다면 별이 쏟아지는 밤에 함께 바다를 거닐러 가지 않을래. 네 기억 속의 그 검은 바다를 아름다운 것으로 뒤바꿀 멋진 마법이야. 다시금 잊지 못할 기억을 새기기 위해. 너는 손잡아주면 돼. 내가 그 바다에 쓸려 유령이 되지 않도록.
그렇게 다시 만나자. 그리고 행복하다고 말해줘.
“지금, 조금 더 잡고 있어줘.”
조금 미래에, 눈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면~
시헌이랑도 대화 많이 나눠서 로그로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아쉬움을 하나 달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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