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이아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기다렸던 것처럼 라리사는 고개를 빼꼼 쳐올렸다. 왔어? 말을 건네자 집주인이 머뭇거리며 그래. 답을 한다. 그새 머리가 자란 남자는 목가를 문지르며 어색하게 현관을 넘었다. 자신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퍽 서먹하기 그지없었는데, 이를 테면 실내용 슬리퍼가 무민으로 바뀌어 있다거나 입구의 발판이 파도가 밀려드는 모래사장과 같은 것이거나 지난번에 쏟아놓고 간 여행지의 기념품이 화이트우드풍의 장식장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거나 그 위로 사진으로만 보았던 선캐처가 매달려 있다거나── 이미 전화로, 사진으로 다 듣고 본 것이지만 막상 눈으로는 처음 보는 풍경에 집주인이 누군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야, 본디 무욕한 남자는 자신의 집이라는 것에도 특별히 연연하지 않았고 하나쯤 가지고 있는 편이 좋다고 하니 이름을 댔을 뿐 남자에게 중요한 건 작업 공간 정도였으니 아무렇게나 꾸며도 된다고 허락한 것처럼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어서 와.”
어색한 집안의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것이라면 이 집을 꾸며놓은 장본인뿐이라 할 수 있겠다. 볼 때마다 조금씩 커지는 듯한 착시를 느끼는 뜨개물고기인형─개복치과 개복치속 개복치종에 속하는 어류이며 이름은 ‘에고’라 했다─을 품에 안은 채 마중을 나온 이는 고개를 잠시 기울이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무슨 의미니?”
“짐?”
아. 집이 아니라 호텔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이번 기념품이 담긴 가방을 건네면 두 개의 더듬이 같은 머리카락이 기대에 찬 듯 즐겁게 흔들렸다. 이번에 다녀온 곳은 즐거웠어? 어땠어? 뭘 봤어? 누굴 만났어? 가방 속의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내며 담아두었던 질문도 하나하나 꺼낸다. 이미 전화로 다 떠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물어오는 것에 대답은 성실히 해주었다. 아. 이거 예쁘다. 맘에 드는 것이 있었는지 손 안에 하나를 집어 들고는 위로 슬 비춘다. 자색의 눈동자가 데구륵 구르며 제 손끝을 좇으면 반대쪽은 게으르고 엉뚱하게 놀고 있었다. 여전히 걱정일 만도 했다. 돌아왔으니 머무는 동안에는 어디 부딪치지는 않나 지켜보겠지.
그 사이 라리사는 보여줄 날만 기대한 것처럼 이번에 뽑은 사진앨범을 그에게 보이고 바쁘게 움직였다. 냉장고에 아이스크림 있는데, 지금 먹어? 아니면 주스도 있어. 사과주스랑 당근주스랑 포도주스랑. 젤리도 있는데. 젤리는 늘 있지만. 밥은 먹고 왔어? 집주인도 없는데 왜 냉장고는 풍족한지 물을 것도 없었다. 그러지 말고 잠깐 이리 와보렴. 오랜만에 왔으니 얼굴부터 보여줘야지.
굉장히 뒤늦은 이야기이면서 라리사는 그가 사람을 응시할 때 눈이 어디를 향하는지 꽤 나중에 알게 된 편이었다. 빛이라곤 전부 집어삼키고 타인의 기대와 관심도 빨아들인 채, 정작 제가 향하는 길을 불분명하게 흘리기 일쑤였던 그의 눈이 사실은 정말 이쪽을 향하고 있지 않았었더라고, 최근에야 마주 향해오는 시선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아고가 똑바로 봐주는 건 기쁜 것 같아.
얼굴부터 보여달라는 말에 정직하게 그 앞에 서있었더니 손이 부른다. 가까이 가면 익숙하게 복작복작 쓰다듬어오던 손길에 이어 그가 가볍게 안아왔다. 이것도 나중에야 생긴 버릇 같은 거였지. 누군가 안아주는 게 좋아. 내 열 없는 몸에 네가 나눠주는 열이 남아서, 그게 좋아.
그 말이 도리어 그를 머뭇거리게 한 것이 우습다면 우스웠다. 갑자기 멀어지면 금방 허전해지는데. 너는 설마 내가 허전할 줄 몰랐다는 것처럼 이제야.
“내가 이렇게 너를 계속 안아도 되겠니?”
체온이 남잖아. 나는 네게서 아무 흔적도 받아가지 않는데 내 흔적은 네게 남아버리다니, 그건 어딘지 불공평한 것 같아.
소곤소곤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장 하나가 머릿속을 부유한다. ‘그리고 바라지도 않겠지. 남에게 네 무게를 나눠주는 일을.’ 조심스러운 거야. 하지만 어째서? 기대하면 안 돼? 어정쩡한 팔과 미묘하게 벌린 거리, 처음 그와 알고 지낸 이래로 몇 해가 지나도록 달라지지 않은 하얀 얼굴을 응시한다. 시선을 피하는 낯이야말로 익숙했다. 긴 속눈썹, 그 아래 그늘지는 불분명한 시선. 세월을 비껴간 얼굴 앞에서 라리사는 지나간 목소리를 떠올렸다.
「사람은 너무 번거로워. 직접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무게를 쉽게 타인에게 전가해. 그러면서 그것이 최고의 자유인 줄 알아.」
타인에게 무게를 전가하는 건 싫어? 타인의 무게를 받는 것도 싫어? 나는 그게 참 사랑스럽기만 하던데. 비효율과 불합리 속에서 우리는 우리 맘처럼 되지 않는 ‘감정’이라는 것에 휘둘려, 그것에 결국 마음을 내주고 말잖아.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말았다고 우울해하던 너, 어딘지 모르게 속상하던 투. 엿보이던 인간의 편린, 네게서 발견한 소중함의 조각. 우릴 좋아한다 해주었지. 그게 기뻤어. 기대어오는 무게가 기쁘기만 했어. 질릴 줄 모를걸, 적어도 나는.
“이렇게 체온을 남겼다 없어지면 허전할지도 모르는데.”
“허전해지면……, 또 안아주었으면 하고 바랄 거야.”
바라면 되는데── 두고 갈 거야? 쭉 허전하게 둘 거야? 이 말이 너를 얽매는 무게추가 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낯으로 무구하게 본다. 그러면 종국에 그는 말없이 다시 안아주기만 했다. 미지근한 체온에 약간의 열이 감돌 때쯤 떨어지면 그에게야말로 온도가 남지는 않았을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온도란 없어서. 정이란, 기대란 쌓지 않으려 한다고 쌓이지 않는 게 아니라고 이미 알아버려 놓고선.
너는 묘하게 물렀고 나는 무른 틈에 기대를 실었다. 너무 무겁지 않게, 부담되지는 않게. 하지만 가끔은 ‘기대 받는 것도 나쁘진 않구나. 너는 실망하지 않을 테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도록. 나를 믿어주도록.
“바다 밑까지 닿으려면 닻이 필요하잖아.”
이 무게추는 그 닻이야. 그래도 네가 풀길 바란다면 언제든 훌훌 풀어버릴 수 있게 할게. 돌아올 때면 지금처럼 한 번씩 안아주면 돼. 내 기대는 거기에 있어.
「라리사 소워비, 아직 기대하고 있니?」
「지금도 여전히. 실망한 적 없이.」
몇 번을 거듭해 반복했던 물음. 실망했니? 거기에 끄덕이는 순간 상처받을 너를 알았기에 젓기만 하던 고개. 하지만 거짓말은 한 번도 한 적 없어. 너는 네 생각보다 더 상냥하고 다정해. 나는 네가 모르는 너를 알고 있어. 그래서 바라. 이 기대는 앞으로도 실망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고.
기대를 기대해.
러닝 때 못 치른 로그각을 하나하나.
이아고와 1챕부터의 대화를 2챕, 엔딩 후까지 끌고 가 꾸준히 담론으로 제기해서 좋았어요. 우리의 기대와 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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