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라오사 초이
공식적으로 감염자 치료제가 개발되었다는 공표가 나왔을 때 라리사 소워비는 그 첫 번째 수혜를 누릴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손을 들어 자원해놓고 정작 치료제를 맞으러 가는 바로 전날까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는데,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그 어수선함에 많이 휘말려야 했다.
“정말 나아?”
“낫는다고 하네.”
“이제 캐리어가 아니게 된대. 이상하네.”
“뭘 이상해 하고 있어. 괜찮아.”
별 거 아닐 거야. 격려를 받으며 팔을 내밀었다. 혈청과 다를 것 없는 주사를 맞았다.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갑자기 개벽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원래 이런 걸까? 하루 정도 경과를 지켜보자는 말에 따라 그 날은 연구소에서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특별한 거부반응이나 이상은 보이지 않음을 확인받고 귀가조치 되었다.
돌아오는 길, 걷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머리카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신체능력이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폭발적인 근력, 뛰어난 순발력, 그런 것들이 다 사라졌다. 지구력은 당장에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떨어졌겠지. 군인으로서 훈련받은 것들이야 남더라도 어디까지나 ‘인간 수준’이라는 것이다. 기분이 이상했다. 길을 잃은 것도 같았다. 라리사는 그 길로 라오사 초이를 찾아갔다.
“머리를 잘라줘.”
“말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그거냐? 좀 더 선행되어야 할 말이 있을 것 아냐.”
이 해파리가.
머리를 꾹 눌러오는 손길, 익숙한 핀잔이 돌아온다. 나는 지금도 해파리야? 대답은 되물음이었다. 그 말에 잠시 누르던 힘이 사라진다 싶더니 남자의 손이 확인하듯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제 안 움직여? 응, 안 움직이네. 여기 앉아라. 응.
수건 하나를 목에 두르고 축축하게 물이 뿌려졌다. 이윽고 한 줌 쥐는 손길이 못내 신중하다. 라오사는 미용사를 해도 잘했을 거야. 사령관 자리까지 오른 이에게는 부적합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진지하게 권하자 어, 나중에 은퇴하고 할 거 없으면. 심드렁한 답과 함께 사각사각,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얼마나 자르냐? 음, 짧게. 어디까지 짧게. 그냥 짧게, 가볍게. 알았다. 머리카락이 잘리는데 재생되지 않았다. 잘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자라지 않았다. 아니, 자라기는 하겠지. 인간의 속도에 맞춰서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 그러나 더는 전 같지 않겠지. 전 같을 수는 없겠지.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니겠구나. 바닥에 쌓여가는 창백한 푸른색을 응시하는 시야는 여전히 한쪽뿐이었다. 그러나 더는 다른 반쪽 경계로 갈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불시에 이별의 실감이 왔다. 뭍과 물의 경계가 선명하면서 한편으론 깊어졌다. 경계가 나를 밀어낸다. 너는 더 이상 이쪽으로 오지 못해. 네 저울은 완전히 기울어지고 말았다. 돌아가. ……돌아가라고? 돌아갈 수가 있는 거였어? 나는 너무 멀리 왔는데, 아주 멀리 와서 돌아갈 길을 모르겠는데. 이렇게 갑자기 이별해도 되는 거야?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허전함과 불안이 덮쳤다. 공허함이 공포처럼 마음을 집어삼켰다.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서걱서걱 움직이던 가위가 멈춘다. 등 뒤로 미묘한 방황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을 잘라주던 상대에겐 얼마나 봉변이었을까. 가위가 툭 놓이고 뒤쪽의 인기척이 사라진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후두둑, 또 후두둑 눈물만 쏟았다. 그러자 어느새 물기를 닦아낸 서늘한 손이 머리를 당기고 있었다. 이번만 또 져준다. 울지 마. 토닥이는 손길, 너 그 머리 잘 어울려. 조용히 들려오는 목소리. 잘 어울려? 처음인데. 짧았던 적이 없어. 이것조차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는데. 잘 어울려, 괜찮아. ──그렇구나.
정말이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겨우 머리를 잘랐을 뿐인데 많은 것들과 이별해야 했다. 라리사 긴 생에서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던 것과 떨어지고 나자 의문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무엇일까. 인간일까. 괴물일까. 해파리일까. 라리사일까. 바라던 일임은 틀림없었다. 라리사는 스스로 괴물이라 정의했고 괴물인 자신을 도저히 좋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로써 싫어할 이유를 하나 지워내게 되었다. 그렇다면 좋아해야지. 기뻤다. 기쁘면서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을 당장에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대체 지난 세월은 무엇이었던 걸까. 그래서 하염없이 울었다.
“나, 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돼? 나는 뭐지.”
두서없이 나온 물음에 머리 위로 약간의 침음이 흘렀다. 그거 나한테 물어보는 거냐. 내가 대답해야 해? 그러나 라오사 초이의 대답은 늘 주저함이 없다. 라리사 하면 되잖아.
“앞으로 더 좋은 게 많을 거야. 이것도 그런 것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아. ……아마도.”
이제껏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리란 법은 없잖아. 살다 보면 더 좋아지는 게 있어야지. 그래야지. 가령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가족을 갖게 된 것처럼.
라오사 초이와 라리사 소워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참 닮지 않았는데 가령 라리사에게 수용은 타인의 선택이었으나 라오사에게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는 점이 그랬다. 사회가 나를 괴물로 수용한다면, 내가 나를 인간으로 정의한다면. 서로의 생각을 구태여 설득시키려 하진 않았으나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그런 우리에게 네가 받아들이고 내가 선택하게 된 상호간의 합의가 생겼다. 가족이라는 이름이었다.
「라리사, 난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받아들이는 건 네 몫이야.」
태어나면서부터 선택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것들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조금 자랐다고 느낄 수 있을까. 살아있어서 나쁠 것 없었다고 실감할까. 그 손을 잡았을 때, 안아줄 사람이 생겼을 때.
어째서 살아있는지 모를 하루하루가 길게 이어질 때가 있었다. 가끔은 의문조차 사치스러웠고 가끔은 궁금해 하다 슬피 울었다. 아무도 주지 않는 답을 찾아 혼자 허우적거리던 나날, 그러나 수영을 혼자 배우지 못하는 것처럼 깨닫고 보면 우리네 삶이란 언제나 타인과 맞닿아 있었다. 타인의 삶이 하루를, 또 하루를 살렸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삶이란 제법 다채롭고 좋아할만한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더는 상한 콩을 먹지 않아도 되고 더는 스스로 고독할 필요가 없었다. 평생 사라질 일 없을 줄 알았던 게이트가 사라지고 오드가 나타나지 않게 된 세계를 사람들은 적응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곧 감염자는 기피와 혐오의 대상에서 벗어나 그저 조금 아플 뿐인 환자에 지나지 않게 되고 쉘터 간의 이동도 자유로워지겠지. 세상은 마냥 좋은 쪽으로만 변하지 않으면서도 꼭 나쁜 쪽으로만 흘러가지도 않는 법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을 채 다 가라앉히지 못하면서도 라리사는 겨우 이 변화가 내게 좋은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앞으로 더 좋아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라오는 꼭 96살도 넘게 살아.”
그리고 무슨 좋은 일이 더 생길지 같이 이야기해줘.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우리 생이 앞으로도 좋은 일로 채워지길 바랐다.
치료제가 나온다면 if~
커뮤 엔딩에서 여러 가지로 생각할 여지도, 해결되지 않은 떡밥도, 앞으로의 좋고 나쁜 전망들도 담아줘서 좋았어요. 현실적이기도 했고 여전히 남은 갈등요소가 즐겁고.
라오사와도 대화를 많이 하고22 로그를 쓰고 싶었고22 특히 우리 서로 선택한 가족이 되지 찌잉하고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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