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더레코드 이야기
이삿짐님의 사인 커미션 잘 어울리고요.
“신디. 브랜드 모델 제의가 들어왔는데~”
“뭔데?”
“이거 한번 봐봐. 캐치 프레이즈는 「마녀가 되고 싶은 너에게」. 선명한 색깔을 강점으로 내세울 틴트 브랜드래.”
너랑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은걸. 매니저의 안목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그러게 드라마는 미루자고 할 때 그 말도 들을걸─. 건네진 자료를 몇 장 넘겨본 것만으로 신디는 이 브랜드에 누구보다 잘 어울릴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과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미지가 그녀가 새로 만들어야 할 이미지와 잘 맞는단 것도 알아차렸다.
그래, 슬슬 이미지 쇄신을 해야 할 때지. 괜찮네. 해볼게. 신디의 승낙에 매니저는 바로 반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대.”
“조건?”
“브랜드 PPL을 겸해서 드라마에 출연해달라네.”
“──하아?!”
내가, 그 꼴을 보고, 또 드라마에?
신디아 페리 캐럴. 3살 때부터 모델 활동을 시작해 벌써 경력이 20년이나 되는 초 유명 모델! 그러나 화제성이란 양날의 검과도 같아 그녀를 쫓아오는 무수한 스포트라이트의 이면에는 그만큼 짙은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었다. 어렵게 말할 것도 없이 팬과 안티가 동시에 많다는 뜻이다.
안티가 무어라 떠들든 신디는 크게 타격을 입지 않았다. 면전에서 떠들지도 못하는 말들은 들을 필요도 없다. 실질적으로 중요한 건 자신을 찾는 무수히 많은 러브콜, 그리고 자신이 이뤄낸 성과와 결과.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100명 있다면 좋아하는 사람을 10000명으로 만들면 되지. 한 때 맨허튼의 가장 커다란 전광판에 자기 얼굴을 내걸었던 만큼의 오만한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싫어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 때의 이야기지. 자신을 좋아해주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안티가 극성이면 제아무리 강철 멘탈의 신디라 해도 금이 간 유리구두를 신고 달리듯 위태롭고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디에겐 지난 2년이 유독 그랬다. 「연기 못하는 경력 17년」, 「그래서 왕자는 어떻게 꼬실래?」, 「마법이 풀린 신데렐라」, 그 외에도 이곳에 담을 수 없는 온갖 추잡하고 찌질한 꼬릿말이 다 붙었지.
애초에 거긴 촬영장부터 꽝이었다. 어떻게든 신디를 이겨먹을 생각밖에 없는 조연들과 신디와 스캔들이 나고 싶어 안달난 못생긴 남자주인공, 이제 성인이니 과감한 노출은 어떠냐며 고작해야 성년 한 달 지난 애를 팔아먹어 제 주가 올릴 생각인 감독에 은근히 무시하고 깔보던 스태프들까지.
후반부 가서는 개판이 난 촬영장 분위기 덕분에 신디가 대사를 틀리게 해도 컷 소리 한 번 없었다.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커리어에서 빼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 드라마는 여러 면에서 신디에게 최악이었는데, 무엇보다도 학업을 위해 2년이나 활동을 쉬었다가 막 돌아와 이제부터 찬란한 활동만이 기다리리라 꿈에 부풀었던 갓 스무살의 기대를 무참히 부순 것은 정말이지 용서할 수 없었다. 대체 누가 나 망하라고 고사를 지낸 거야?
이후 신디는 모든 것에 무료하고 심드렁해지고 말았다. sns로 안티와 싸우다가 주간지에 박제가 되든 술집에서 제 주량도 모르고 꽐라가 되어 새벽 3시에 매니저를 소환하게 만들든 그러다 뒷골목에 오바이트를 하고 하고 그게 다시 일거수일투족 꼬투리가 되든 말든.
보다 못한 소속사 사장이 휴대폰을 빼앗고 당분간 자숙하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기어코 카메라 앞에서 “그래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은퇴해버리죠!” 그런 폭탄선언을 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나 세월이란 어찌저찌 아픔을 가라앉혀주기 마련이어서 시간이 좀 흐르고 땔감이 사라지자 신디에 대한 이야기도 금세 시들해졌고 그 자리엔 다른 가십들이 채워졌다. 다들 가십거리만 좋아한단 말이지. 인간에 대한 환멸과 불신을 누적하면서도 신디는 얌전히 다음 일을 기다렸다. 어쨌든, 그녀는 모델 일이 좋으니까.
그랬는데, 겨우겨우 기존의 이미지를 쇄신할만한 딱 맞는 일감이 들어 왔는데 거기에 1+1으로 드라마 출연이 걸려 있다고?
“감독이 누군데? 미친 거 아냐? 설마 요 2년 사이 어디 오지에라도 다녀와서 내 소문을 전혀 못 들은 게 아니고서야, 이 발연기의 신디를 드라마에 채용한다고?”
“오, 신디. 네 연기는 정말 최악이었지만 그렇게 자학하듯 말하지 말아줘.”
“꼴도 보기 싫어!”
“뭐, 주연으로 쓰겠단 것도 아니고. 애초에 주연의 개념이 없는 일일연속극이야. 공동주연으로 친다면 메인 인물만 30명이 넘지. 네가 혼자 모든 극을 이끌어갈 필요는 없다는 거야. 게다가 배역도 봐. 세상물정 모르는 온실 속 화초 같은 아가씨. 그냥 화보촬영 하듯이 사근사근 웃기만 해도 먹힐 거라니까?”
“이 신디아를 고작해야 쪽대본에 벼락치기 촬영이나 하는 일일연속극에 출연시키겠다고?”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고, 네 비위 맞추기 정말 어렵다.
매니저의 얼굴에 적힌 말을 무시하고 신디는 그녀의 손에서 빼앗듯 시놉시스를 펼쳤다. 무슨 시나리오인지는 어디 한 번 보자고.
“그러니까…… 제목은, 『포켓몬스터 디 이노센트 Zero』. 어라, 이거 몇 년 전에 인기몰이 했던 그거 아냐? ──그 후속이라고. 흐음.”
오퍼가 들어온 작품은 장수 시리즈 중 하나였다. 매번 방영될 때마다 인기몰이를 해서 고정팬층도 있을 정도의. 할리우드의 유명 시리즈들과 비교할 수야 없지만 보는 사람들은 이것만 찾아본다고도 했다. 매니저의 말처럼 메인 시나리오가 있기보다는 일상의 옴니버스극이어서 연기 난이도도 높지 않았고 덕분에 많은 신인들의 등용문이 되는 작품이었다. 신디가 신인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가상의 지방을 여행하면서 펼쳐지는 모험과 청춘, 화합과 성장의 스토리라고 간략하게 스토리가 적혀 있는데. 너무 루즈하지 않아? 일일연속극이란 건 원래 사랑이나 치정이나 그런 게 빵빵 터져야지. 그런 장르는 아니라고? 알겠다니까.
“내게 오퍼가 온 캐릭터는…… 얘구나. 에셸 달링.”
어릴 때 큰 사고를 당한 뒤 그 트라우마를 감추며 살아가는 상냥하고 다정한 아가씨라. 본인은 이제 트라우마 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당당할 거였으면 장갑은 왜 끼고 살아. 남들 눈이 뭐가 어떻다고. 이것도 다 가식 아냐?
“오, 신디. 아직 맡지도 않은 캐릭터를 깎아내리는 것도 그만 둬.”
“남이사.”
신디에게는 존경하는 모델이 있었다.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뒤에도 자신의 몸을 당당하게 내보이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모델이다. 만약 신디에게 화상 흉터 같은 게 남았더라면 그것을 숨기기보다는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이마저도 사랑하라고 차라리 강요를 했겠지. 신디는 그러고도 사랑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몸이더라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에셸이란 캐릭터는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걸까? 그렇다면 왜 장갑으로 손을 가리지?
게다가 저렇게 마냥 상냥하고 다정하기만 할 건 또 뭔데. 자기가 무슨 성녀야? 무슨 일만 생기면 달려가서 오지랖을 부리고 동화에나 나올 법한 착한 말만 해버리고.
“너도 카메라 앞에서 그런 거 잘하잖아. 아직도 대중은 ‘천사 같은 신디’를 기억하는걸.”
“오, 맙소사. 새벽 3시에 먹은 걸 뒷골목 전시한 알코올 쓰레기 신디가 아니라?”
감독도 알만 하네. 내 그런 이미지를 써먹고 싶어서 스카우트 한다 이거지. 잠깐, 그런데 이번 틴트 브랜드는 상냥하고 천사 같은 면이 아닌데.
“더 읽어봐. 그 배역, 오컬트나 고스트를 좋아한대.”
“설마 겨우 그것 가지고 오컬트=마녀라고 하는 건 아니지?”
“글쎄, 감독 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어쨌든 마냥 상냥하기만 한 게 아니라 오싹한 연기도 해야 한다는 건데. 역시 못한다고 할래, 신디?”
자기가 가져와놓고 이제 와서 빼기야? 째려보는 시선에 매니저는 아니아니, 내 말은 그게…… 하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할래. 하면 되지. 감독도 다 생각이 있어서 날 불렀겠지. 뭐, 정 안 되면 내 흑역사 커리어에 한 줄 추가해버려.”
“가끔 나는 네가 배포가 센 건지 대책이 없는 건지 모르겠어.”
“칭찬 고마워.”
그럼 승낙하는 걸로 저쪽에 연락할게. 매니저의 말에 대충 손을 흔든 신디는 다시 한 번 주어진 배역을 훑어보았다.
특이한 리본머리, 과보호하는 파트너 포켓몬, 어린 나이에 팀장을 맡을 정도로 유능한… 커리어우먼, 이건 좀 맘에 드네. 홍차를 좋아한다. 난 커피 파인데. 감독이 바라는 방향……, 장갑을 벗고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기를. 스스로 완성형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캐릭터가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진정한 ‘치유’와 ‘성장’을 이뤄내는 모습이라.
“──완성형의 인물인 줄 알았던 캐릭터에게 생기는 균열. 균열에서의 회복.”
내가 그런 섬세한 감정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애당초, 상처라는 건 어떻게 치유하고 이겨내고 하는 게 아니잖아.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딱지가 앉고 시간이 지났을 때 적당히 묻어버리고 털어내면 그만이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신디는 조금 전 자신의 생각과 지금이 정 반대된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어느 쪽이 진짜 자신의 의견일까.
구깃, 반으로 접힌 시놉시스를 던지고 소파에 가로로 길게 누운 신디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TV를 켜 아무 채널이나 돌렸다. 마침 나온 채널에선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듣기 나쁘지 않네. 쿠션을 껴안고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제대로 된 사람은 무지와 비웃음을 견뎌낼 수 있는 법. 누가 뭐라든 항상 자신을 잃지 마세요.」
“자신을 잃지 않는단 게 뭔데.”
정말 장갑을 벗는 게 정답이야? 장갑을 벗는 게 성장이야? 에셸 달링,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어느 게 맞는 너인 것 같아. 너는 너를 사랑해? 아니면 너보다 가족을 더 사랑해?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에게 너를 맞추는 것으로 행복해? 다른 사람들은 너를 얼마나 알고 있어?
흠 잡힐만한 곳은 미리 새하얀 면으로 덮어, 그걸로 완벽해진 것만 같아. 너는 네 가족을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지. 가족도 친구들도 모두 너를 사랑하고 평화로워. 그야말로 지금 이미 ‘흠 잡을 곳 없는 아가씨’인 너에게 장갑을 벗는 일은 불필요하지 않아? 지금도 너는, 그대로 너는, 너 자신인데.
처음엔 바보 같다고 무시하더니 이제는 장갑을 벗지 않는 캐릭터를 두둔하기에 이르렀다. 변덕스러운 마음을 꾹 안은 채 신디는 다시 한 번 시놉시스를 펼쳤다. 몇 번 더 읽다 보니 대충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알 것도 같았다. 지금 현재에 충실하고 만족하고, 열정적인. 이대로 살아도 아무런 문제없는 축복받은 인물.
완성형의 캐릭터 같다는 말도 납득이 되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에셸은 찻잔 안의 고요와 같았다. 공고하게 세워진 평화로운 세계 안에서 그녀는 이미 완벽하기만 한데.
“뭐, 그래도 남의 말만 따르는 바보 같이 착한 아이는 아니라는 거네. 그야 원하지도 않는 결혼은 싫지.”
먼저 건드린 건 어머니와 할머니 쪽이 아닌가. 도망친 에셸은 죄가 없다. 그리고 만들어진 이 한 발짝의 변화가 그녀를 찻잔 바깥의 세상으로까지 이끌겠지. 그리하여 더 넓어진 세계에서 새로운 필요와 욕망, 의지와 바람이 생긴다면──, 그 바람이 장갑을 벗겨내고 숨길 수 없는 자신을 드러나게 만들까?
신디는 그걸 꼭 성장이나 회복이라고 보지 않았다. 하지만 틀림없는 변화이기는 했다. 변화란 언제나 열정과 애정을 동반한다. 과연 이 메르헨 아가씨에게도 러브 라인 같은 게 생기려나?
“러브 씬은 자신 없는데.”
뭐, 지금으로선 등장인물 중에 그럴 듯한 인물도 안 보이고. 일단은 감독의 ok가 먼저다. 매니저의 연락을 기다리며 신디는 채널의 볼륨을 키웠다.
「난 이방인이에요. 적법하게 들어온 이방인. 뉴욕에 사는 영국 사람이에요. ♬」
주셸은 오프레에서도 끝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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