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주노

23) 축복이 끝나고

천가유 2023. 2. 15. 02:03

for.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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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밸런타인데이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라도?

A. 어쩜 그런 당연한 질문을!

 

누구에게인지 모를 대단한 분노를 토해내려던 에셸은 곧 음흠흠, 헛기침을 하며 얼버무렸다. 주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주노의 집으로 자리를 옮긴 에셸은 커다란 선물포장을 그에게 건넸다. 그가 상기된 표정을 하고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여는데 어쩐지 지켜보는 쪽이 더 설레고 두근거렸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상자가 너무 큰 것 같아요. 뭘 이렇게 잔뜩.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결코 싫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에셸은 아직도 부족하다구요, 으름장을 놓았다.

테이블이 꽉 찰 지경이었다. 포장된 초콜릿을 늘어놓고 에셸은 뺨이 한껏 빨개져 하나하나 설명했다.

견과류는 아몬드와 호두, 캐슈넛, 헤이즐넛에 마카다미아까지 사용했어요. 과일은 말린 것과 말리지 않은 것으로 나누었는데 바나나, 체리, 라즈베리, 레몬순으로 신맛이 강해지는 쪽이 있고 말린무화과, 말린살구, 말린크랜베리, 망고까지 써봤어요. 이쪽에 술이 들어간 종류도 있는데, 이거 볼래요? 술병 모양이죠. 후후. 입에 넣고 깨물어 먹어도 되고 아니면 주둥이 부분부터 먼저 한 입 먹은 다음에 안쪽을 마시면~

와앗, 술이 들어 있네요?”

굉장하죠? 어른을 위한 초콜릿이라고 홍보하던걸요.”

이날을 위해 술병 모양 틀도 샀다구요. 누구에게 보란 듯한 자랑인 걸까?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설명을 주노가 얼마나 다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다. 에셸도 그가 하나하나 기억해주길 바라고 쏟아낸 말은 아니었다.

다음은 생초콜릿, 이쪽은 차갑게 보관해야 하니까~마시 곁에 두면 될까요? 초콜릿 바는 말이죠. 일부러 단단하게 굳혀서 오독오독하게 잘라먹으면 되고요. , 이쪽의 쿠키는 내일 회사 분들이랑 나눠드세요. 스모어 쿠키인데요, 만들다 보니 남아서.

한 번에 다 먹어보기엔 너무 다니까 옆에는 입을 씻어낼만한 홍차를 준비해두고 한입씩, 아주 조금씩 맛을 보았다. 하나를 맛 볼 때마다 주노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거 정말 맛있어요. 굉장해요. 그때마다 에셸의 코가 5cm씩 더 높아졌는데 그래서 이거랑 이거랑 어느 게 더 맛있었어요? 물어보면 정작 주노는 으음, 고르지 못하겠어요. 둘 다 맛있어서. 이런 답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주노의 입맛 취향을 알아내야 하는데. 우웃, 하고 입술을 톡 내밀면 그가 당황해서 훈기가 도는 방안에서도 땀방울이 맺힐 듯 난처해했는데 그래도 저는 진짜 다 맛있는데. 라며 꿋꿋하게 전부가 1등이라고 주장을 하던 중에서야─…… 늦게나마 주노도 깨닫고 마는 것이었다.

저기, 에셸혹시 취했어요?”

?”

생전 처음 듣는단 것처럼 아가씨는 눈을 동그랗고 커다랗게 떴다. 위키링이라면 바로 알아보았을 표정이다. 발뺌하고 있잖냐-! 물론 주노는 시치미를 뚝 떼고 토끼 발을 내미는 연인의 반응에 앗, 아앗, 아니, 아니면 다행인데. 하고 꿈뻑 믿고 넘어가나 했지만.

──딸꾹.

난방이 도는 방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열 오른 뺨이며 목이며, 숨겨질 리가 없었다.

, 정말 취한 거예요?!”

네에에~? 무슨 말이에요, 주노. 누가 초콜릿을 만들다가 취하겠어요.”

우후후, 후후후후.

마냥 천연덕스럽게 웃지만 지금의 에셸은 평소보다도 허공에 3cm쯤 떠 있는 하이텐션 달링이 틀림없었다.

그야 누가 초콜릿에 취하겠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알고 있는가? 과거에 카카오 열매는 흥분제로 쓰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효과적인 미약이었다는 뜻이다.

으응, 더워라.”

한참 웃고 떠들고 즐겁게 말을 쏟아내다 보니 열이 올랐다. 오늘을 위해 귀엽게 걸치고 온 분홍색 망토는 그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걸이로 향했고 레이스로 꾸며진 목깃 쪽의 리본을 당겨 느슨하게 풀고 갑갑한 단추도 풀자,

주노가 일어났다.

, 갈아입을 옷 필요할 것 같아서.”

집이니까 편하게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더듬더듬한 말에서 당황이 묻어나는 걸 정말 눈치 못 챘는지 네에. 대답하는 목소리만은 경쾌했다.

 

그래서 정말 취했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yes였지만 오늘 사고를 치고 내일 기억이 안 나요! 할 정도로 고주망태가 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냥 좀 기분이 좋고, 그냥 좀 들뜨고, 그냥 좀 신나고, 그게 좀 많이?

주노를 만날 때의 전 늘 그렇지 않나요?

늘 그런걸요.

한입씩 끄트머리를 베어 먹어 전부 맛보고 전부 맛있다고 답해준 뒤 주노는 초콜릿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지금 먹을 것 몇 개만 골라두고 나머지는 주방에 갖다 두었는데 남겨둔 것 중 하나가 봉봉이었다. 누가 남겨둔 거지?

, 주노. 아앙~”

, 아앙…….”

화르륵 귀가 불타는 걸 알면서 에셸은 손끝에 살짝 녹은 초콜릿을 낼름 핥았다. 초콜릿에서도 럼의 맛이 배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저도 한 입 초콜릿이 먹고 싶어졌는데 충동을 가로막은 건 아직 남은 이성이었다.

이 초콜릿은 전부 주노에게 준 거니까, 저는 하나도 먹으면 안 돼요.’

이성일까? 이성인 척하는 취한 사람의 극단적인 사고다. 그러나 이성의 탈을 쓴 사고가 그렇게 만류하자 뾰족하게 튀는 건 또 다른 충동이었다.

그럼 주노에게서 받아먹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충동이지 뭐예요. 그런데 이 에로틱한 충동이 들뜬 머릿속에선 메르헨으로 탈바꿈하여 에셸은 어느새 그윽한 눈을 하고 주노를 응시하고 있었다.

주노가 그 시선을 어떻게 받을지는 정말이지 모를 일이었지만 에셸은 아랑 곳 하지 않았다.

저는요. 밸런타인데이를 다른 특별한 날보다도 조금 더 좋아해요. 왜인지 알아요?”

인데요?”

한 가지로는 설명할 수 없는데요.”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더 벅차올랐다. 자신을 향해 피하지 않고 응시해오는 시선이 좋아서, 사랑스러워서 에셸은 활짝 웃었다. 저의 웃는 얼굴이 좋다고 고백해주는 그 사람을 위해 더욱 화사하게 피어났다.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초콜릿을 쓰는 게 좋아요. 다른 값비싼 게 없어도 아주 작은 초콜릿 하나만으로 전해지잖아요. 남들이 뭘 주는지 고민하지 않고 모두가 초콜릿 하나면 되잖아요. 그 사람을 등밀어줄 작은 용기의 지침이 되어주는 게 달콤하고 맛있는 초콜릿이어서.”

그리고 또, 으응. 열 들뜬 뺨을 손등으로 식히며 재잘거렸다.

그렇게 해서 누구든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날이라서 좋아요.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마음을 더 이상 미루지 못하게 해주는 날이어서, 오늘 하루는 어떤 마음이든 고백해도 된다고 세상이 허락한 날이어서. 그래서 누군가의 좋아해라는 말이 한 번 더 세상을 울리면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 보이잖아요.”

너무나 메르헨 로맨틱한 발상인가요? 그래도 저는, 마음을 전하는 순간이 좋기만 한걸요.

좋아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어서좋아해요.”

좋아해요. 정말 많이. 말할수록 더. 좋아해요.

밸런타인 데이를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 특별할 것도 없는 이유다. 그저 에셸 달링이라는 여자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모아놓은 날이어서, 맘껏 사랑할 수 있는 날이어서. 언제는 꼭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이렇게 잔뜩 사랑하기만 하려고.

사실은, 작년까지는요.”

작년에도 제 초콜릿을 받았죠, 주노?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만.

정말정말 좋아하는 날이지만그날의 저는 독자이면서 시청자고, 3자였어요.”

모두에게 평등한 날이지만 그 기회를 사용하는 건 각자의 몫이잖아요. 저는 좋아한다고 말할 상대가 없었거든요.

정말정말 좋아하는 날면서제가 주인공은 아닌 날이었는데……. 오늘은, 당신을 저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제가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서.”

그래서, 오늘이 저희를 위한 날인 것만 같아서 더 좋은가 봐요.

아침부터 하루종일 부엌에 있던 몸에서는 온통 초콜릿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몸 전체에서 단내가 나 빠지지 않았다. 그 자신이 초콜릿이 된 기분이었다. 초콜릿에 퐁당 빠졌다.

오늘은 초콜릿을 주며 마음을 전하는 날, 그렇다면 저를 주며 마음을 전하는 날.

아까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흡소리가 고요한 집안에서 유독 선명했다.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 이상 가까워지진 않았다. 꼭 참듯이, 아니면 기다리듯이. 누가 먼저 움직일까. 누가 먼저였을까.

입술이 맞닿은 순간 참지 못하고 에셸은 입꼬리를 잔뜩 당겨 올렸다. 그의 입에서는 초콜릿과 럼, 과일과 견과류, 자신이 선물한 모든 맛이 났다. 에셸 자신에게서는…… 아마도 그에게 주고 싶었던 모든 맛이 나겠지.

시침은 어느새 12시를 지나 있었다. 밸런타인의 축복이 끝났다. 그럼 더 이상 고백할 구실이 사라진 연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요. 그냥 하는 거예요.”

질문한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모두 에셸이다. 이제는 누구의 체온이 더 더운지도 모르는 채 꼭 맞붙어 사랑을 속삭였다.

그냥 좋아해요. ……사랑한다고 전했나요, 제가? 그럼 오늘치의 고백이랍니다.”

오늘은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마음만은 어제보다 더 담아서. 초콜릿보다 더 달다는 말이 나온다면 성공이다.

사랑해요. 당신을…….”

어제는 성 밸런타인의 축복이 깃드는 특별한 하루, 그리고 오늘은…… 매일매일이 특별하기만 한 연인의 하루다.


오타쿠 명절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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