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션을 껴안은 채 책장을 넘긴다. 이 집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그녀가 읽을 수 있는 건 그 중에서도 몇 권 되지 않아,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직접 가져온 가벼운 풍의 소설이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영 내용에 집중이 되지 않아 팔랑팔랑 넘어가는 책장과 달리 머릿속은 다른 생각이 퐁퐁 굴러갔다. 약초밭에 물은 줬고, 저녁은 뭘 만들까. 두 사람은 언제쯤 돌아온다고 했더라. 귀찮은데 나가서 먹고 들어올까. 아~…, ……심심해.
그 때였다. 느긋한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반사적으로 책을 덮고 귀를 쫑긋 세운다. 발소리가 계단을 올라 점점 문으로 가까워지는 동안 에슬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문고리에 집중했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자 기다리던 얼굴이 나타났다.
다녀왔어, 루? 들뜬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그 앞으로 달려가자 색이 다른 두 개의 눈동자가 놀란 듯 동그래지다 곧 온화하게 휘어진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자연스럽게 받으며 에슬리는 그의 뒤를 졸졸 쫓았다. 짐을 풀고 겉옷을 벗고 그가 오랜만에 돌아온 집을 돌아보는 동안에도 이번엔 어디에 다녀왔어? 어땠어? 즐거웠어? 위험한 일은 없었고? 그간 혼자 심심했던 걸 티내듯 에슬리는 질문을 쏟았다.
느긋한 어조로 하나하나 답을 해주다 아, 이쪽은 기념품이야. 그러면서 그가 쿠키 상자를 하나 안겨주었다. 이어서 짐정리를 마치고 찻잔과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와 소파에 풀썩 앉았다. 무슨 책이야? 상자를 열어 제 입에 쿠키를 하나 넣고는 다가가 묻자 그에게서 이번에 간 곳에서 희귀한 책을 발견했다는 조금 고조된 답이 돌아왔다. 흐응.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가 눈썹을 슬그머니 내리며 잠깐만 보겠다고 눈치를 본다. 너무 궁금해서, 앞부분만 조금 볼게. 이따 같이 저녁 먹자.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에슬리는 옆자리에 앉아 제 몫의 찻잔을 들었다.
이럴 땐 그의 집중력이 놀라울 뿐이다. 금세 거실에는 두 사람 분의 숨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 쿠키가 부서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두 개의 눈동자가 집중해서 글자를 훑는다. 종종 나지막한 감탄사라거나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이며 그의 신경은 온통 책에 가 있는 듯 했다. 자연스럽게 지켜보던 에슬리의 표정은 불만으로 바뀌었다. 얼마나 재밌는 책이길래 오자마자 책부터 펼치는 거람. 그야 여긴 그의 집이고 에슬리로 말하자면 슬슬 손님보다는 집에 둔 화분과 같은 느낌으로 지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본 거잖아. 이쪽도 좀 신경 써달라는 말을 차마 자기 입으로는 꺼내지 못한 채 부루퉁해 있다가 곧 결심을 굳히고 책을 든 그의 팔 사이로 파고들었다.
에슬리? 겨우 그가 책에서 시선을 떼고 의아한 듯 본다. 품 안에서 조금 부스럭거리다 이내 다리를 모아 제법 편하게 자리를 잡고 능청스러운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같이 보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자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손이 머리 위를 가볍게 두드리다 쓰다듬는다.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끊겼던 책장 넘기는 소리가 다시 차분하게 이어졌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조금 빛바랜 책에 적힌 내용들은 그녀가 봐도 이해가 안 되는 내용투성이였다. 대략 무슨 주제로 쓰인 건진 눈치껏 알아차렸지만 딱 거기까지. 결국 하품을 하다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만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고동 소리와 전해지는 온기에 에슬리는 더없이 편안한 기분으로 천천히 수마에 잠겨들었다.
───꿈도 없이 평온한 시간이었다. 눈을 간질이는 빛에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다 잠에서 깨자 어느새 제 위로 담요가 덮여 있었다. 여전히 위치는 그의 무릎 위. 잠들었던가. 창 쪽을 보니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오렌지 빛의 햇살이 온화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등에서는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체온이 있었다. 고개를 들자 눈을 감은 그가 보였다. 눈가를 가린 조금 차가운 빛의 앞머리 위로 해질녘 온색이 덧입혀지는 게 신기해 조심스럽게 몸을 비틀고 자는 얼굴을 곰곰이 지켜보았다. 그 역시 저무는 햇빛이 거슬리는지 찡그린 눈썹에 손바닥으로 햇빛을 살짝 가려본다. 편해진 걸까. 눈썹 끝이 느슨해지는 변화에 제 뺨에도 해질녘 물을 들인 채 키득거리다 시치미를 떼고 다시 그의 품에 기댔다.
깨워야 할까 고민했지만 막 여행에서 돌아와 피곤했을 그를 깨우기란 쉽지 않았다. 이유를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워서. 주황에서 보라로 들어오는 빛의 색이 변화하는 동안 에슬리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