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부화로그 4
어느새 껍데기가 딱딱해졌다. 이 딱딱한 표면이 살얼음처럼 깨지기 쉬워질 때까지가 가장 중요한 시기다. 곧 있으면 안에서 발차기도 해버릴 수 있다는 거다. 능란은 포대기처럼 만든 알주머니에 우르의 솜을 더 깔고 혹시라도 알이 떨어지거나 충격을 받지 않도록 두 겹, 세 겹 줄을 둘렀다.
애지중지하는 트레이너를 관찰하던 빠모가 어깨 위로 올라와 알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에코처럼 알 안쪽에서도 톡, 반응이 돌아왔다. 벌써 이만큼 컸나, 놀라는 건 트레이너뿐. 겁 많은 포켓몬은 후다닥 도망가버리고 만다. 그래도 얼마 안 가 빼꼼 머리를 빼내고 다시 알을 보러 오는 걸 보면 많이 익숙해진 듯 싶었다.
“요오, 그렇지. 역시 후속편이 궁금한 거지. 어서 오라구.”
천생 수다쟁이에 이야기꾼인 여자는 찾아온 이를 기꺼이 환영했다. 그래, 나도 뒷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들어주라고. 차데스가 내린 건 아니지만 따뜻한 찻잔을 건넨다.
판짱에게 버림받은 트레이너가 그 길로 자포자기해 가출을 하고 그러다 저 화랑 구석, 눈 덮인 마을에서 그 동네 포켓몬의 고발로 검거되어 돌아온 이야기는 푸실마을의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알 만한 소동이다. 덕분에 4대째 연중무휴─라고 해도 그야 몇 번 쉬기야 했겠지─중이던 가게가 문을 닫았던 만큼 늘봄까지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멍석말이로 혼쭐이 난 뒤로도 나는 구제불능의 쓰레기라고 가게용 쓰레기통에 거꾸로 머리를 박은 채 질찔 짜기도 며칠, 마음을 추스른 여자는 그 뒤 무언가를 놔버린 사람처럼 나사 하나가 풀린 채 실실 웃으며 다니게 되었다. 관성의 양면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관성처럼 진달래의 체육관을 오갔듯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다. 빠진 것이라곤 옆자리 하나 정도.
“꿈은 없고 희망도 없고, 딱히 뭘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사는 게 재미없는 건 아닌데 그냥 뭘 해도 재미없이 지냈어.”
라한 씨랑도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지. 오늘이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오늘과 다른데도 그것 참 지루하기만 한 나날이더라고. 나와 다르게 뭔가 이루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을 보면 참 반짝이고 눈부시고 예쁜데 이젠 그걸 부러워할 힘조차 나지 않아서 옆 사람을 보며 ‘좋아 보이는구만.’ 이러고 말 뿐이었다니까.
이른 나이였음에도 세상 다 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런 기대도 재미도 없이 그렇게 쳇바퀴마냥.
“그러던 중에 모모를 만난 거야.”
오, 갑자기 이야기가 좀 흥미로워져? 자기 얘기인 줄 알아들은 빠모가 뽀르르, 어깨를 타고 오른다. 그래그래, 네 얘기야. 그 조막만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능란은 빠모에게 볼을 던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구하던 순간에 던진 거냐고? 그럴 리가. 그 땐 정말 구해주기만 했어.
모래과 바위로 이루어진 땅에서 모래색으로 모여 지내던 빠모 무리들이야 배달을 오가면서 자주 보곤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평소와 다르게 무리의 저 뒤쪽을 힘겹게 따라오던 복숭아가 있었다. 웬 잘 익은 나무열매 하나가 구른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그게 정말 굴러서 절벽 쪽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나무열매였으면 지나쳐도 됐을 텐데 녀석의 귀가 쫑긋해지는 순간 스치듯 선명한 비취색이 보이면서 그게 색이 다른 포켓몬이라는 것까지 생각이 미쳤다.
순식간이었다. 매달려 있던 8개의 죽통밥이 덜그럭거리면서 떨어지고 구르는 동안 대나무봉을 길게 잡아 떨어지려는 빠모를 건져냈다. 순간 자신의 몸까지도 균형을 잃는 바람에 아찔할 뻔했지만 도화무늬집 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간신히 미끄러지려는 절벽을 다시 기어 올라왔을 때 빠모 무리는 이미 저만치 앞에 모래먼지를 날리며 달렸고 이 뒤떨어진 녀석은 무리를 잃고 말았다.
작고 어린 빠모는 무리를 따라 달릴 줄 몰랐다. 놓쳤으면 허겁지겁 따라가기라도 해야지, 바람 한 번 불 때마다 동료의 발자국이 순식간에 지워지는데도 멀거니 서서 보기만 했다.
그게 왠지 마음에 남았다.
“너도 따라가야지. 어서.”
──뒤처지지 않게. 버려지지 않게.
나처럼 되지 않도록.
그런데 녀석은 기껏 엉덩이를 두드려 재촉해주는데도 따라가기는커녕 능란의 손에 붙어 올 뿐이라는 거다. 어어? 어? 당황해서 떼어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진짜 안 갈 거야? 나랑 갈 거야? 몇 번을 물어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는 한지 못 하는지. 나는 너를 키울 생각이 없어. 너를 키울 자신도 없고. 아무리 밀어내려 해도 빠모는 능란의 침대 밑이나 옷장이나 가방 따위에 숨어들며 떠나질 않았다. 피엠의 말이 맞았다. 능란이 빠모를 선택한 게 아니라 빠모가 능란을 선택했던 거다.
오죽하면 집안사람들도 네가 키우라고 하고 마을에 나가면 다 “란이 새 포켓몬이니?” 물어볼 지경, 결국 능란은 체념하고 빠모에게 볼을 던졌다. 싫으면 지금이라도 피해야 해? 중얼거림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는 법이 없었고,
“뺙!”
빠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씩씩하게 두 팔 벌려 볼을 받아들였다.
텅 비어 있던 볼이 무거워지는 순간,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고 지루하던 능란의 마음에도 묵직함이 남았다. 그게 조금, 세상에 남았단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다시는 포켓몬을 키우지 못할 줄 알았는데 정말 세상일이란 하나도 뜻대로 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사실은 그게 무척이나 고마우면서도 솔직하지 못한 여자는 빠모의 볼을 마구 주무르기만 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이 녀석도 그냥 뛰는 게 귀찮았던 건 아닌지 싶은데.”
뺘,
뭐야. 그거 항의야?
뺘아, 빠.
네에, 능모모 씨. 억울하면 사람 말 배워오세요. ─앗, 따가. 너어!?
삐!
양볼에 축전된 전기가 찌릿, 하는 순간 알이 또 한 번 까딱였다. 표면에 미세하게 실금이 가기 시작한 걸 트레이너는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능모모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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