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부화로그 5
트레이너와 함께하는 포켓몬은 성장이 빠르다고 한다. 야생에서는 진화하지 못하는 개체가 더 많지만 트레이너가 있으면 간단히 진화해버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포켓몬의 성장촉진제, 이렇게 말해도 될까? 이제는 통론이 되어버린 이야기처럼 트레이너 캠프의 포켓몬들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이는 물론 알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지난밤, 알들이 일제히 부화하고 탄생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지.
능란의 알도 부화시기가 머지않았다. 처음 알을 받았을 때와 비슷하게 표면이 아주 얇으면서도 물주머니 대신 살얼음처럼 섬세한 구체를 능란은 조심스럽게 품었다. 온전히 알 스스로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약간의 충격조차 조심스럽다. 표면에 손가락을 얹으면 박동이 선명했다. 꼼실거리는 움직임, 미약한 웃음소리. 너도 깨고 나오는 순간이 기대되는구나, 나도 그래. 이미 너를 사랑하고 있거든.
한편으로는 그렇다. 인간도 포켓몬처럼 준비가 되었을 때서야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으면 편리했을까?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지금의 이 과정조차 인간이 보이지 않는 알을 깨는 순간인 걸까. 곁에는 막내의 탄생을 기다리는 세 포켓몬이 있었다. 겁쟁이 빠모, 온순한 우르, 의젓한 나몰빼미. 포켓몬은 트레이너를 닮는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고 다녔는데 이 세 녀석 모두 어딘가 조금씩 저와 닮은 게 신기하기도 했다. 어떤 끌림이 있었을까?
능란은 제게 가장 익숙한 숲으로 알을 데려왔다. 숲에서 마주친 아이니 숲이 요람이 되어 탄생하길 바랐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속내가 흐른다. 앞서 떠들던 ‘사건’이 아닌 ‘심정’이다.
“왜 캠프에 참가하기로 한 걸까.”
“마치지 못한 일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아마추어 배지 하나~, 포켓몬과 친해지기~ 그런 게 아니라.”
“시작도 하지 못한 모험에, 마무리를 짓지 못한 도전에 나름의 마침표를 찍고 싶었어.”
“그 일을 어떻게든 매듭짓지 못하면 마음속에 영영 앙금같이 남아서, 어딜 가든 발목을 잡힐 것만 같았거든.”
2년의 도전, 2년의 방황, 정신 차리고 보니 스무 살 나이가 되었지만 겉보기 성인이다. 속은 하나도 여물지 않은 채였다. 지나치게 이른 수확은 후숙조차 불가하다. 능란은 그만 이 미성숙한 이야기에 완결을 내고 싶었다. 그래야만 인생의 새 이야기를 펼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마침표란 어떻게 찍는 걸까. 막상 충동적으로 캠프에 신청은 해놓고 여기 서고 나니까 도무지 계획이란 게 없던 거 있지.”
“결국 캠프 사람들이 주는 기대에 떠밀리듯 체육관에 서고, 그래 놓고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견디지 못해 꼴사납게 내뺐어. 내게 기대 같은 건 갖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어. 차라리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았으면…….”
“이래서야 제자리걸음이 아닌가. 의미가 없었지.”
늘봄에서 그 일이 있고 나서는 진지하게 캠프를 하차할까 고민도 했다. 저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그럴 거면 그만두라고, 누가 한 말이었더라?이대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면 그냥 살던 대로 살자고.
“그런데 그러지 못했어.”
“너까지 받아와 버렸지. 순전히 내 욕심으로, 내 바람으로.”
“그러고 싶었으니까. 하고 싶었으니까. ……그만두고 싶지 않았으니까.”
바람이 부푼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가장 내면에 감춰져 있던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리치 씨나 마메 씨를 보고 무지하게 부러웠다는 거야. 나도 저렇게 이기고 싶었어. 이기는 기쁨을 맛보고 싶었어. 세상엔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배한 채로 끝내고 싶지 않았어.”
“겨우 솔직해질게.”
“내가 맺고 싶은 마침표는 ‘승리’야. 이겨서 결말을 맺고 싶어.”
이겼을 때 기분이 어땠어? 그 질문을 하면서 부러운 눈을 했다. 배틀 코트 위에 선 저 너머의 상대를 보며 대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도 싸우고 싶었다. 잘해보고 싶었다. 다른 복잡한 심정 같은 건 다 접어두고 순수한 갈망, 그리고 욕심. 그냥 끝마치는 것이 아니라 멋지게 끝마치고 싶다.
품 안의 알이 까딱인다. 그것을 더 소중히 품었다. 태어날 네가 나처럼 겁쟁이이면 어쩌지. 그래도 괜찮아. 겁쟁이끼리 손잡고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여전히 내 안에서는 약한 내가 더 커다래서 이대로 또 질까봐, 실패하기만 할까봐 두렵고 겁이 나. 당장 내일 한 번 더 져버리면 그 순간의 패배보다도 이대로 영영 이기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이 파도처럼 덮치고 말 거야. 그런데도, 또 무서운 순간이 오더라도…….”
뭐라도 좋으니 구실이 필요할 때 노트 씨가 내밀어준 눈앞의 보상, 이번에야말로 증명하고 싶은 진심어린 우정, 약속, 사과, 인정, 나약한 겁쟁이를 보호해주는 알의 껍데기를 제 손으로 거머쥐고 나가기로 했다.
“도전하자고 결심했어.”
능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알이 까딱거렸다.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려는 아이를 온 마음 다해서 환영하기로 한다. 벌써 처음 알을 받았을 때의 기억이 까마득하다. 서향에게 받아든 무게가 얼마나 기뻤던가, 또 얼마나 설렜던가.
“몽몽, 알고 있어? 캠프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모모였듯 내가 포기하지 않기로 한 계기는 너라는 거야.”
나 같은 사람은 더 이상 키울 자격이 없는 게 아닌지, 내가 데려와도 잘해줄 수나 있을지 수많은 불안이 자꾸만 붙잡아오는데도 널 만나고 싶어서, 네가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고 싶어서 욕심내버리고 말았어. 그렇게 해서 널 받았을 땐 얼마나 설레고 기뻤는지 몰라.
이길지 질지에 대한 걱정도, 잘 키울 수 있을지 불안도 포켓몬을 좋아하는 마음보다 앞설 것은 없어서 만나기도 전부터 나는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할 거란 예감이 들었어.
그러니까 그만큼 너도 이 세상을 마음껏 욕심내주면 좋겠어.
“어서 와, 몽몽. 어서 너를 만나고 싶어.”
포기하지 않는 계기가 된 몽몽=위위는 정말 이후로 매번 어려운 역할을 맡아줍니다. 기점을 잡기 위한 수많은... 역할을...(위위야 사랑한다!)
일장춘몽에서 연상한 추몽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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