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부화로그 3
──어라, 이야기 들으러 또 온 거야? 그럼 마저 이야기해볼까.
오늘의 산책은 는개의 밤바다다. 한 번 바람이 불 때마다 비리고 짠 내음이 훅 풍겼고 뒤이어 파도 소리가 철벅, 철벅 들려와 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드가 형성되는 곳이었다. 막 씻고 나와 뽀송뽀송한 머리카락으로 소금 알갱이가 묻어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여자는 모래사장을 폴짝폴짝 걸었다.
그 사이 알은 제법 묵직해져 있었다. 이제 표면을 건드려봐도 말랑말랑하지 않았다. 간신히 말랑말랑 물주머니 같은 알에 익숙해지던 참인데! 빠모가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알을 경계한다. 이쯤부터는 능란도 포켓몬을 타일렀다. 이제 조심해야 해. 알이 직접 깨고 나오기 전까지 우리가 먼저 깨버리면 안 된다는 거야.
알아들은 빠모가 능란의 어깨를 내려와 모래를 밟았다. 사박사박한 발걸음과 함께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잇는다. 그래서 어디까지 했더라? 아아, 그래. 내가 판짱에게 차인 부분부터 말이지.
“그 이야기를 하려면 조금 슬픈 과거로 들어가야만 하는데.”
왜 진화하지 않는 걸까. 그야 진화할 만큼 충분히 성장하지 않아서 그런 거지. 아직 배지 하나 따지 못한 트레이너가 판짱을 부란다까지 키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순서가 반대다. 판짱이 진화해야 배지를 얻는 게 아니라 배지를 모을 만큼 강한 트레이너가 판짱을 진화시킨다. 그런데 그때는, 부란다만 있으면 늘봄 체육관을 돌파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만큼 마음이 조급했다. 또 지치기도 했었다. 빨리 끝내버리고 싶었다, 도전이란 걸. 사실은 그만두고 싶었다. 도전 그 자체를. 이기든 지든 이제는 중요치 않았다.
“왜 도전하는지 스스로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거야. 내가 정말 체육관에 도전하고 싶었던 게 맞는지 하려던 게 무엇이었는지. 지기만 하는 시합은 재미가 없었고 처음엔 응원해주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서. ‘아직도 하는 거야?’ 그런 눈빛이나 받고 있으니 얼마나 위축됐는지 몰라.”
왜 ‘아직도’ 도전하는 거지? 체육관을 방문하고 배틀코트에 오르기까지 사람들의 의문과 불신 섞인 시선을 받는 게 점차 두려워졌다. 나란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것만 같았다. 한 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부터는 공포증에 걸린 것처럼 그전까지 당연하게 하던 것도 어색하고 이상해서 잘하던 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가라, 치치. 몸통박치기!” 그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에도 어라, 몸통박치기가 맞나? 박치기몸통이 아니라? 이렇게, 머리가 이상해질 만큼.
‘왜’ 아직도 도전하는 거야? 그러게, 이 정도로 졌으면 그만둘 법도 한데 관성이었다. 「체육관에 도전해서 배지를 얻는다.」 이 대전제를 지키지 않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어서 거기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 이상 왜? 라는 질문은 하지 않길 바란다.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하면 스스로가 한없이 멍청하고 어리석었기만 하다. 잔인해지고 말 것이다.
“형제는 이미 배지를 6개 모으고도 모자라 챔피언로드에 오르고 결국 여로 님을 이기진 못했지만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오고, 무엇을 보고 어떤 걸 겪고 느꼈는지 산더미 같은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나는 2년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있었어. 그럼 어떤 생각이 들까? 지금이라도 내게 맞는 다른 걸 찾아보자고 생각하기엔 ‘그것마저 잘 안 되면……’ 하고 두려워지고, 지금까지 해오던 일에서 어떻게든 결과를 보고 싶잖아. 이만큼 노력한 보상을 받고 싶잖아. 그래서 고집스럽게 포기하지 못하던 일을 마침내 그만두게 된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고집도 부리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지는 순간에야 놓지 못하던 끈이 기어코 끊어졌을 뿐이다. 판짱에게 왜 진화하지 않느냐 억지를 부린 것은 수많은 전조 중 하나에 불과했다. 불현듯 스스로의 상황을 제 3자의 눈으로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 이룬 것 하나 없는 무능한 소녀가 있었을 뿐이다.
“아, 진짜 그만둬야겠다. 포기하자.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자. 겨우 그 생각이 들었어. 그날부로 다 그만뒀지. 그때는 이미 가게 일을 돕고 있었는데 그 일마저 그만두고 집에서 숨만 쉬었어. 가족들도 암말도 안 하더라고. 그냥 쉬고 싶은 만큼 쉬라고 해줬지. ……그랬더니 말이야. 치치가 화를 내는 거야.”
인간과 포켓몬이 다르다는 걸 이때 또 한 번 실감했다. 어제까지 잘해오던 배틀을 갑자기 그만둬버린 트레이너를 포켓몬의 인지로는 받아들일 수 없던 것이다. 그 당시 판짱이 느꼈을 혼란을 반대로 능란 역시 헤아려줄 수 없었다.
져도 괜찮고 못 해도 괜찮아. 도전하는 것만으로 좋았어. 같이 싸울 수 있어서 좋았어. 그런데 지시를 내려줄 트레이너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판짱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트레이너에게 화도 내고 트레이너를 억지로 일으켜 체육관에 끌고 가려고도 했다. 통하지 않는 언어로 소리치거나 울기도 했다. 그러면 능란은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때론 무작정 판짱을 꼭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그냥 여기 있자, 우리 그거 하지 말자. 하나 된 마음으로 영원할 것만 같았던 둘의 치열한 줄다리기는 두 달을 이었다.
이윽고 추운 겨울이 지나 다시금 죽순이 자랄 계절이 오자, 포켓몬이 포기했다. 포켓몬‘도’ 포기했다. 어느 날 판짱이 스스로 떠나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때 능란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놓아주는 것밖에. 그는 그렇게 판짱의 트레이너 자격을 잃었다.
“차롱숲으로 간 줄 알았지. 치치도 나랑 같이 화랑 곳곳을 배달하며 돌아다닌 적이야 있지만, 그런 비즈니스적인 방문이 아니고서는 그 애나 나나 늘봄도 벗어나본 적 없는 애송이였으니까. 그런데 저번에 나비 씨가 전해준 소식에 헐레벌떡 놀라 가보니까 없던 거 있지.”
새로운 트레이너를 만난 걸까. 아니면 트레이너도 없이 혼자 여행을 떠난 걸까. 어딘가에서 훌륭한 부란다가 되어 있진 않을까? 내 포켓몬이라서 아니라, 치치는 정말 강하고 멋졌거든.
안이 빈 몬스터볼은 지금도 버리지 못한 채 본가에 놓여 있었다. 허전한 자리를 채우는 건 어디서든 건강하길 바라는 기원이다. 거기까지가 판짱의 이야기에서 잘려 나간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너무 자극적이면 어쩐담. 포켓몬 괴담의 하나로 기록되는 거 아냐? 으핫. 그래서…… 무능의 란은 챌린지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한 끝에 파트너 포켓몬에게까지 버림받은 구제불능으로 낙인찍혔고, 재기불능이 되었더란 말씀. 여기까지 실패한 육알 이야기였습니다.”
앗, 지금 알이 까딱 움직인 것 같은데. 잠깐잠깐, 역시 너무 자극적인 이야기 아니었냐니까? 우리 애가 알속에서부터 삐뚤어지면 어쩌지? 큰일이라구!
능란이 왜 이렇게까지 된 걸까의 상황과 심리를 많이 고민해봤는데 대충 6년간 고시에서 떨어졌다면 + 그런데 사실 이게 내 꿈도 아니었더라면, 정도로 이해했어요.
내가 너무 못나고 한심한데 주변에서 힘내라! 하면 그것도 괴롭고 주변에서 왜 그런 것도 못하냐 쯧쯧,하면 그것도 괴롭고 그런데 결국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여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의미가 퇴색되다 보면 정말 하고 싶어서 한 건 맞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휘청휘청...
괴로웠다(이런 걸 겪은 자캐도)(그걸 RP하는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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