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피엠 귀하
큰 괭이 하나, 작은 괭이 하나, 난데없이 이런 농기구 같은 게 어디서 난 거냔 물음은 하지 않는다. 여자에게는 늘 어딘가 비밀주머니가 있기 마련 아니겠는가. 긴 나무 봉을 만지는 순간 반사적으로 봉술 자세를 취하려던 능란은 앗, 이게 아니지. 제 머리를 콩, 때리며 피엠의 자세를 관찰했다. 그러니까 손잡이는 이쯤에서 붙잡아서…….
“서향 씨의 오두막 앞에 공터가 있었잖아. 거길 써도 된다더라고.”
“오오. 그럼 당장 가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씩씩하게 찾아간 것은 좋았으나 펼쳐진 땅은 만파식적의 뒤쪽 밭보다도 크기가 커보였다. 어라, 이거 괜찮은가? 허리가 쭈뼛 서는 걸로 보아 보통 노동이 아닐 거란 예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옆 사람이 이미 밭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 능란의 리본과 같은 색의 장화와 앞치마까지 주어져 이제와 무를 수도 없었다. 어라, 이거 진짜 괜찮은가? 나 이따가 산 내려갈 수 있지?
“그으래서, 뭘 심을 거야?”
“음. 감자나 당근이나 고구마나, 나중에 파내는 재미가 있는 게 좋겠다!”
“좋아, 좋아. 이왕이면 숲에서 쉽게 얻지 못하는 종류가 좋겠지.”
능란이 좋아하는 복숭아는 이렇게 심어놓고 내버려둘 수도 없고 보기에 예쁜 딸기 따위야 야생산딸기 등을 더 잘 알아서 찾아먹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힘으로 개량해낸 구황작물들이 심기에 제격이겠지.
준비를 마친 피엠이 먼저 괭이를 치켜들고 땅을 퍽, 콱, 두두두두두, 드르륵, 갈기 시작했다. 마냥 키가 큰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괭이질을 하는 모습은 들레씨가 보거든 홀딱 반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옷 위로도 어깨와 팔과 등이 울끈불끈 움직이는 게 선명해서─
“잘생겼구만.”
“응? 뭐가?”
“으핫, 그런 게 있어.”
감상도 잠깐이다. 괭이질은 내리치는 순간이 중요했다. 콱, 하고 안에 단단히 박혀야지만 당겨내는 순간에 효과적으로 땅이 뒤집혔다. 속도보다는 힘과 기술, 주로 재빠른 스피드로 승부하던 능란에겐 쉽지 않은 일이어서 처음엔 피엠과 같은 곳을 파도 몇 번이나 괭이질을 반복해야만 비슷한 깊이를 낼 수 있었다.
처음엔 주거니 받거니 떠들기도 했던 것 같은데 집중하기 시작하자 둘 다 말이 없어졌다. 능란은 어떻게 하면 다음엔 더 깊이 땅을 파낼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저기 박힌 돌을 뽑아낼지에만 집중했다. 괭이질 한 번, 한 번이 기계적으로 작동하고부터는 무아지경이었다. 주르륵 흐르는 땀이야말로 뒤집힌 흙 위를 촉촉이 적시는 양분이었다.
몸을 움직이면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법이었다. 운동을 하던 사람으로서 능란도 그 효과를 모르지 않았다. 내일이 막막할 때도, 뭘 하면 좋을지 모를 때도, 과거가 후회스러울 때조차 몸을 움직이다 보면 갈비뼈를 압박해오는 심장박동과 턱까지 차오른 숨 하나로 덮였다. 당장에 이 숨 하나를 쉬느냐 쉬지 못하느냐로 뇌에 산소가 부족해지면 거시적인 고민 같은 건 날아가서 제발 살려달란 생각이나 드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능란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살만해지면 다시 무기력해지는 게 문제였지만. 그래서 피엠의 말이 무엇인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해하는 한편으로는 완벽한 이해란 무리였다. 세상에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할까? 한 배에서 한 시에 나온 형제도 마음이 갈라지는데.
얼굴색이 죽어 있는 플러시, 누군가 있다가 없어진 듯 허전한 옆자리, 스스로를 낭떠러지까지 몰아세우면서 보이는 억지 미소, 얼핏 보여준 그의 내밀한 목소리에는 비수가 깃들어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같이 날카로운 끝은 오로지 스스로를 찌르기 위해서 쥐어진다. 상처 입은 자가 쓰는 가면은 언제나 미소, 웃는 얼굴은 상대의 간섭을 막아내기에 무엇보다 좋은 것임을 능란도 안다. 하지만 그러면 진짜 짓고 싶은 표정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지 않아?
“내가 할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말야. 그래도 아는 척 좀 해보자면…… 나는 슬슬 위기감을 느끼고 있거든.”
자꾸 숨기고 도망치고 아닌 척하고, 내 마음을 내 스스로 부정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러다 보면 까마귀처럼 까막까막, 깜빡해버리는 거야. 잊어서 안 되는 것마저. 한참 굽어 있던 허리를 펴면 우드득, 하고 뼈의 수명이 깎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래도 되나, 하는 아찔함과 함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옆을 돌아본다.
“피엠 씨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만 너무 무리하지 말라구. 전직 코미디언 씨에게 웃기는 걸로 이몸, 얼마든지 도전해줄 테니까.”
웃고 싶지 않은 순간에는 뭐냐, 이 품이라도 빌려줄 테니까 숨어도 좋고. 미래의 파트너에게 의지해봐도 좋겠지? 히죽, 웃으며 능란은 다시 한 번 괭이를 들었다.
겨우겨우 땅을 다 파낸 뒤에는 그 위에 씨를 뿌리고 흙으로 덮는다. 고랑을 만들면서 돌멩이, 자갈, 큼직큼직한 녀석들을 골라내 최대한 보드라운 흙으로만 씨앗을 품었다. 그래야 나중에 싹이 원만하게 나오지 않겠는가.
“이다음엔 흙을 적셔줘야 하는데.”
──아무도 물포켓몬이 없다. 이거 지금이라도 당장 호수에 가서 아무나 잡아 올까? 농담 삼아 볼을 들던 능란은 얌전히 대나무봉의 양끝에 죽통밥 대신 물통을 끼웠다. 이 다음으론 밭고랑에 물이 줄줄 흐르도록 몇 번이나 호수와 밭을 왕복하는 시간이었다. 반복재생이 아닌가 싶을 만큼 셔틀런을 마치고 난 뒤엔 그대로 탈진해 뒤집힌 흙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아무튼, 이걸로, 끄읕~!”
“와아아~”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질 만큼의 시간이었다. 씻을 시간도 없이 산을 내려갈 준비를 해야 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어 바닥에 누워 땀과 눈물을 줄줄 흘리며 능란은 농부로 전직할 생각을 접었다.
꽃가람숲 깊은 곳. 사람의 손길은 거의 닿지 않아 포켓몬의 천국과 같은 그곳에는 숲지기 서향이 포켓몬과 세운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잘 다져진 땅속에는 주렁주렁 보물과 같은 수확이 숨겨져 있다고 전해진다.
함께 힐링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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