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피치럼블

056) 12.02. 설담 雪譚

천가유 2023. 12. 30. 01:52

ㅡ이치이 귀하

더보기

 

 

이른 아침, 대체로 사람이 적은 시간대에 자고 일어난 건지 또 안 잔 건지 눈밑의 시꺼먼 게 사라질 날이 없는 녀석을 본 능란은 그러니까, 하고 운을 뗐다.

이치, 계속 그러고 있다간 머리에 김이 날 것 같으니까 잠깐 리프레시라도 하고 오자는 거야.”

너는 도전 끝났다 이거냐?”

오우, 바로 그거란 말씀.”

어차피 여기서 콩둘기처럼 서성이나 하랑마을에서 그러나 다를 게 없잖아. 쓸데없이 움직일 거면 그 김에 의뢰도 해치우자는 거야. 그렇게 남자의 팔을 당기자 웬일인지 그가 순순히 따라왔다. 웬일? 그 표정 그대로 쳐다보자 덤덤하던 남자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힌다.

이미 준비할 건 다 했으니까. 그리고, 같이 가기로 했잖아.”

으핫, 그렇지. 약속했지. 약속을 잘 지키는 남자가 되었구나.”

여자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그가 또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너 뭘 안다는 듯이 그런 말을……,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으나 여기서 꼬투리를 잡아봐야 제 본전도 찾지 못하리라. 결국 입 대신 손이 움직여 동그랗게 말린 머리를 정말 쥐어뜯으려는 양 옹송그리면 여자의 표정이 또 뚱해지는 것이었다. , . 이거 머리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냐? 또 터트리지 말라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사이가 퍽 편안한 공기로 흘러가는 것이 어느덧 캠프에서 동고동락한 지도 10주가 넘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야 온전히 능란 기준으로 말하자면, 여자는 늘 처음부터 그와 친해지려 생각했지만어디가? 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사이에 우여곡절이 많지 않았던가. 아니 그러게, 난 처음부터 친해지려고 했는데 쟤가 먼저……. 이제와서 잘잘못 따지기는 그만이다.

도착한 하랑마을은 일주일 사이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여전히 조용한 눈이 내리고 있었고 마을 가운데엔 커다란 화톳불이 타올랐고, 점점 추워지는 날씨를 따라 관광객이 전주보다 늘었나? 고작 그런 감상이 아니다. 그 며칠 사이에 마을 전체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 것다. 벌써부터 캐럴이 울려 퍼지며 눈 덮인 아래로 페어리 라이트(fairy ligths)라고 불리는 꼬마전구들이 벽과 지붕과 나무를 장식한다. 눈송이와 방울, 사탕과 양말, 진저쿠키, 그야말로 축제가 따로 없다.

과연 딜리버드의 마을이구만.”

요란하기 짝이 없군.”

이치는 크리스마스 안 좋아해? 네 취향은 성탄절보다는 신년이려나.”

1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장식은 싹 빠지고 대신 새해를 맞아 대문 앞에 카도마츠라든지 시메카자리 따위를 두고선 흰떡 두 개를 겹쳐 공양을 하곤 하니까. 그야말로 12월과 1월은 하랑의 두 얼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너는 거기서 새까만 전통복 입고 서 있는 게 어울리겠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의뢰서를 낸 여관을 찾아갔다. 요리사는 음식이 가득 든 바구니를 건네주었다.

눈쓰개들을 찾아 이걸 나눠주고 대신 나무열매를 받아오면 됩니다. 그 녀석들도 영리해서 물물교환을 잘 알고 있거든요.”

, 알겠슴다~”

가자.”

이치는 춥지도 않나? 그거 아무리 봐도 겨울옷은 아닌데. 별로 안 춥다만? 그래, 네 피부 두껍다. 따라 나온 요쿠보에겐 춥지 않게 목에 배배의 털로 짠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오늘의 요쿠보 꼬리는 전나무 가지다. 이치이 몰래 거기에 방울장식도 하나 달아주자 그야말로 루돌프 쥐. 모모에게는 목도리와 산타 모자를 씌워주고 두 사람은 설원으로 향했다.

거대지네와 거대물거미를 산책하도록 눈밭에 풀어두고 남의 지유를 어깨에 얹은 채 설원에 남는 발자국은 큰 쥐, 작은 쥐, 큰 인간, 작은 인간의 것 네 개였다. 마을의 캐럴이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오자 남자의 표정이 미세하게 느슨해졌다.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어쩐지 하랑에 있을 적에 유난히 설원 산책을 많이 나갔지.

여기 좋지?”

가볍게 던진 질문에 그래, 담백한 긍정이 돌아왔다. 그럼 여기랑 는개랑 어디가 좋아? 질문이 장난스러워지자 느슨해진 표정 그대로 남자의 손이 머리를 눌렀다.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는 식이다.

너는 푸실보다 여기가 좋다고 할 거냐? 하랑은 쉬러 오기 좋은 곳이지. 내가 있을 곳은 는개다.”

어휴, 이 애향심 깊은 녀석.”

넌 푸실이 좋다고 할 거냐고. 꼭 답을 듣겠다고 따라붙으면 여자는 그와 반대의 성정으로 글쎄, 하고 모호한 답을 흘렸다. 예상한 답이 아니었을까? 남자가 눈썹을 꿈틀거린다. 그를 둔 채 능란은 하나, , 음식바구니를 보고 찾아오는 눈쓰개들과 물물교환을 했다.

바구니 안에 오랭, 복분, 배리, 이것저것 열매가 채워지는 사이 그가 재차 물었다.

좋아서 답을 안 하는 거냐?”

여자는 프핫 웃었다.

하랑이 좋다고 하랑으로 이사를 올 것도 아니고, 정말 둘을 비교해서 어디가 어디보다 좋다고 할 것도 아니야. 다만…… 너처럼 내가 있을 곳은 푸실이다, 라고 할 건 아니란 거지.”

무슨 말이지?”

캠프가 끝나면 좀 더 여기저기 여행을 다닐 생각이거든.”

어땠어? , 는개를 벗어날 일이 거의 없었을 거 아냐. 다님길 안만 돌아다녀도 많은데 모래톱길에 마루길, 곧 화랑의 마지막 마을까지 가게 되겠지. 다녀본 감상이 있지? 질문에 눈쓰개의 열매를 담던 손이 잠깐 멈추었다. 남자에게서 느릿느릿 답이 돌아온다.

좁게 살았었다는 걸 인지했지. 화랑을 다 돌 일이 생길 줄 몰랐는데 막상 다녀보니 순식간이더군. 막연히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넓은 곳이었어. , 네 감상은 나와 다를 것 같은데.”

나도 너랑 꽤 비슷한 감상이야. 그야 푸실부터 시작해 나린까지 방방곡곡 배달이야 자주 다녔지만 오히려 그래서 무관심하기도 했거든. 말 그대로 배달만 갔다가 홀라당 오는 곳이니까 자세히 살펴볼 생각도 없이 익숙한 곳이라고 넘겼지. 그런데 막상 여행이란 이름으로 다니니까 새롭고 몰랐던 곳이 많아서 즐겁더라고. 이거 아주 즐거웠어.”

눈쓰개의 머리에 마을에서 받아온 트리 장식을 하나씩 장난스럽게 달아주었다. 어떤 녀석은 양말, 어떤 녀석은 쿠키, 또 어떤 녀석은 상자다. 하다 보니 어쩌면 제가 하고 싶은 게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전국이라고 하는 커다란 트리에 하나씩, 다녀온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다.

그런 제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어놓고, 막상 떠들기 시작하자 금세 흥이 난다.

언젠가 푸실로 반드시 돌아올지도 지금은 장담을 못해. 그야 도화무늬 기와집이 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지금 무언가를 확실히 말하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두둥실 떠 있어서. 발길을 멈추지 않고 이러다 더 못 걷겠다고 할 때까지 신나게 걷고 떠들고 싶은 기분이거든.”

너는 상상도 못할 일일까? 바구니를 놓고 여자가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순풍이 망토를 펄럭이고 고요한 설원에 웃음소리가 낭랑히 퍼진다. 공기 중에 자유로움이 떠돌았다. 사람의 발을 당겨 어디론가 홀려버릴 것만 같은 마성의 공기다.

새하얀 눈밭 위를 뽀득뽀득 밟다 보면 햇빛 아래서 여자의 머리카락이 유난히 희게 비추었다. 눈숨기라도 쓰듯 이러다 깜빡 사라지면 찾지 못할 것도 같았다. 그때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나부껴 정지된 설원 위로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 저기 있구나. 발길이 정처 없이 떠돈다.

세상은 정말 넓지!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어. 그 길 위에 떠도는 이야기를 줍고 다닐 거야.”

그러니까 이치──, 까지 이어지던 말이 불현 듯 애매하게 끊겼다. , 방금 좀 많이 들떠버렸는걸. 바구니를 다 채웠으면 돌아가자. 쫓아오는 시선을 뒤통수에 새겨넣고 발길을 돌린다. 수포가 얼어버린 거대물거미와 습기가 촉촉한 거대지네도 잘 회수하였다.

바구니는 만석이었다. 여관의 요리사가 기뻐하며 소르베를 나눠주었다. 이런 풍경에는 역시 하랑사케 한 잔 해야 하는데. 곧 탑에 올라야 할 녀석에게 술을 먹이기도, 두고선 혼자 마시기도 마땅치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차갑고 달콤한 그것을 퍼먹으며 능란은 씩 웃었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캠프도 끝나겠지. 그러면 한 번 더 트리 구경하러 오자. 모처럼이니까 가장 성탄절다운 곳에서 하루 보내보자고.”

 


자꾸 내 멘션을 끊어먹던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