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나린체육관 챌린저 클래스
포근하고 아름다운 극동의 마을, 나린은 어디로 눈을 돌려도 분홍빛의 벚꽃다발 흔들리는 풍경이 마치 설화 속 도원향을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하필이면 옛날 신선들의 과일이라 불리던 복슝열매 과수원까지 유명하여 된바람 산맥과 바다로 인해 화랑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고립된 위치에 속하기까지 해 여러모로 신비주의에 휘감겨 있기도 했다.
나린 사람들은 마을 안에서도 맛있는 게 많아서 배달도 안 시켜 먹는다더라.
다른 마을의 이미지란 것이 대체로 만파식적을 이용하느냐 안 하느냐로 결정되는 능가에서는 이 한 줄의 감상이 전부이긴 했지만 말이다.
“거기에 더해서 나는 복슝타르트가 맛있는 곳이라 좋아했는데.”
어때, 맛있지? 포켓몬들에게 씩 웃으며 타르트를 자른다. 산맥을 넘자마자 하랑이나 우금과 다르게 안온한 날씨가 반겨주었다. 덕분에 12월이란 계절감을 잃은 채 복슝타르트 한 판, 그리고 파르페가 7개. 포켓몬들을 조르르 모아놓고 체육관 직전의 여유를 즐겼다.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리는 기분이다.
유난히 준비가 바빴다. 오랜만에 형제와 만났다고 땡땡이를 친 게 문제였는지, 벚꽃다발숲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길을 잃어 숲 지도를 만들도록 헤치고 다닌 게 문제였는지 부탁받은 묘원의 효자손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거길 몇 번을 뒤졌는데. 이번 체육관전이 끝나면 진짜 꼭 찾아드려야지. 어라, 이거 ‘플래그’인가?
아무튼 체육관 준비이다 뭐다 어수선하면서도 이번이 마지막 체육관이란 생각에 기분이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2년이 걸리도록 제자리였던 녀석이 3달 만에 여기까지 왔다. 그게 얼마나 현실감 없던지.
“남에게 대기만성이네 뭐네 할 게 아니라니까. 이몸, 그릇의 크기가 얼마나 컸던 건지 스스로 두려울 정도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과장스런 혼잣말을 하다가 벤치 아래로 다리를 길게 뻗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부담이라는 한 단어로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상을 안겨주었다. 생각이 많아지기 전에 미리 스위치를 끈다. 지금은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할 때였다.
“수리 박사님이 리그에 올라갈 자라면 그에 걸맞은 마음가짐을 닦아두라고 했는데 말이지. 지금 당장은 그게 무엇인지 생각해봐도 모르겠어. 그런 건 일단 자격을 다 갖추고 나서의 문제가 되겠지. 그러면 우선 눈앞의 마녀다.”
무녀도 아니고 왜 마녀인가. 이유를 곱씹으며 능란은 다 먹은 파르페 그릇을 겹치고 포켓몬들 앞에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오늘은 여러모로 뉴페이스의 등장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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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이 켜진다. 코트 위를 오른다. 비단 장인이 공들여 짜낸 휘황찬란, 아름다운 색의 비단이 얼기설기 장식된 코트는 언제든 부서지고 무너져도 괜찮도록 만들어둔 억새의 배틀코트와는 딴판이었다. 그 정도로 파괴적인 일은 생기지 않는단 자신감이란 걸까.
발아래로 밟히는 보드라운 비단의 촉감을 느끼며 한발, 한발 정직하게 내디뎠다. 과거와는 달랐다. 떨리고 긴장돼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마친 자가 마음을 호수처럼 잔잔하게 할 때다. 모르는 두려움과 아는 두려움에 대해 말하였었지. 과연 이번의 자신은 어떤 두려움을 직면하게 될까.
그리고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망토를 곱게 접어 배배에게 맡겼다. 한결 가벼워져 허리치마도 풀어낸다. 활동적인 옷으로 갖추곤 제자리에서 통통 뛰었다. 억새를 넘기 위한 순풍이 과연 마녀의 트릭에선 어떤 악수로 돌변하게 될까.
“안녕, 설란 씨. 다시 한번 인사하자구. 이몸, 능란. 푸실마을 도화무늬 기와집의 딸이야. 우리 가문의 도화가 어디에서 왔나 했더니 여기 다 있는 걸까? 덕분에 끝에서 끝인 이곳에서 고향의 향수라도 느낄 것 같은데…….”
당신을 눈앞에 두고는 감상에 젖을 여유도 없겠어. 입꼬리가 장난스레 말려 올랐다. 치마 안쪽으로 걸려 있던 노리개 배지들이 제각기 빛을 받아 반짝였다. 빈 자리는 이제 하나뿐.
“과연 고향을 막 떠날 때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같은 진단은 셀프로 할게, 으핫. 그보다는 리그로 향하기 위한 마지막 배지, 그것을 걸고 설란 씨에게 당당하게 챌린저로서 서겠어.”
──도화만란(桃花萬爛), 당신의 앞에서도 찬란히 꽃피울 수 있기를.
“오, 시작한다. 꼬꼬, 봐봐. 란이 벌써 여기까지 올라왔어.”
도화만란이라니, 자기PR은 참 놓치지 않는다니까. 코트 위의 여자와 얼굴이 닮은 청년이 키득키득 웃으며 녹화를 시작했다. 오늘 만파식적에 방문할 손님들은 어쩔 수 없이 가게의 딸래미를 응원해야 할 것이다.
이때의 교체 용기 잘했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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