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주노
#.01
오늘도 빈틈없이 올려묶은 리본머리를 하고선 화이트데이에 받은 사탕을 입안에 도르르 굴리며 여자는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날이 따스해져 갔다. 곧 있으면 저 둥근 꽃봉오리가 팝콘처럼 펑 터져 온 세상에 꽃보라가 불어치겠지. 그러면 또 얼마나 예쁠까.
사탕이 달콤해 뺨이 허물어지도록 행복했다. 발그레한 낯은 누가 봐도 꿈꾸는 소녀다. 그래서 행복을 만끽하고 있을 뿐이냐고? 그럴 리가. 겨우 한 달 전에 밸런타인이라고 하는 가장 좋아하는 행사를 치른 직후였지만 또 가장 좋아하는 행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이 여러 개일 수 있느냐고요? 물론이죠.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달링.
본래부터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말하라고 하면 봄을 손꼽아 말했지만 언젠가부터 봄은 그녀에게 더 특별한 울림이 되었다. 그야 소중한 이와 함께하는 시간이라고 하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쁜 법이라지만, 매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녀에게 유독 봄은 365가지 의미를 붙이고도 아직 635가지쯤 더 붙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설렘의 상징이라 할 수 있겠다.
봄이란 말이죠……. 막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상상 속 강단에서 첫 번째 이유를 말하려는 순간이다. 무슨 생각하세요, 팀장님? 몽롱하게 볕을 쬐는 이를 깨우는 건 현실의 동료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에셸은 아직 따뜻하게 주문한 차를 양손에 들고 그만 사무실로 돌아갔다.
#.02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는 문의 메일의 답장이 와 있었다. 긍정적인 메시지가 퇴근길 지친 발걸음에 활기를 준다. [주노~ 이번 주말에 혹시 시간 괜찮나요?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연인의 퇴근은 에셸보다 조금 늦었다. 지금쯤 가장 정신없이 마무리를 하고 있을 시간이겠지.
답장을 기다리는 사이 에셸은 오늘의 썸원을 곱씹었다. 혼자 답을 적을 때는 함께 찍은 앨범을 넘길 생각만으로 가득했는데, 그가 적은 답을 위를 손가락으로 덧그리다 보니 어쩐지 수다쟁이가 되고 싶어 참을 수 없어졌다.
바로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어요? ‘다시 말할 때마다, 방금처럼… 선명해져요.’ 저도 선명해졌어요. 바로 지금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계기도 없이 당신과 보낸 시간을 추억하고 싶을 때, 떠올리고 그 당시의 기분에 푹 젖고 싶을 때, 꼭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마법에 걸리고 싶을 때…… 그럴 때에 당신이 곁에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보고 싶게 만들어버리면 어떡해요, 주노.”
저도 모르게 서운한 목소리가 물씬 터지는 순간, 답장을 알리는 메시지 음이 울렸다. [뭔지 몰라도… 벌써 설렐 것 같아요.] 설레주나요? 제가 꼭 그런 것처럼요? 함박웃음을 지으며 일정을 보낸다. 함께 가고 싶은 곳은요…….
#.03
“컨셉 촬영이요?”
“네에. 해보고 싶었거든요.”
날씨가 좋아 다행이에요. 활짝 웃으며 손을 당기자 한치의 저항도 없이 그가 이끌려 따라왔다. 제가 어디로 데려가는 줄 알고서요. 무구한 신뢰를 받을 때면 이 애정에 책임이 무거워지는 것도 같았다. 그럴수록 되새긴다. 당신에게 더 잘해주고 싶어요. 그 말은 지금도 한치 빛바램 없이 그대로이기만 해서. 실망은커녕 그가 상상도 못한 기쁨을 더 크게 안겨주고 싶어서. 제 욕심이고 오만일까요? 당신이 저로 인해 행복해졌으면 한다면?
“여기는 벌써 꽃이 만발해 있네요. 둔치는 아직도 꽃봉오리가 필 생각을 안 하는데.”
“살비는… 둔치보다 훨씬 남쪽이고, 더 따뜻하니까요. 그래서…, 좋아요.”
저도 좋아요. 방긋 웃으며 말꼬리를 잡자 맞잡은 손의 온도가 올라간 느낌이 들었다. 더 따뜻해져도 좋을 때다. 만개한 꽃, 건너편의 온기, 순식간에 봄이 닥쳐오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봄을 쫓아 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좋아하는 마음이 열을 머금고 달음박질했다. 어서, 어서요.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한가득해요.
#.04
함께한 시간이 어느덧 만 2년, 함께 사진을 찍는 일도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전문 사진사를 앞에 두고선 아무래도 긴장하게 되는 모양이다. 애써 자연스럽게 굴려고 해도 그럴수록 어설프고 숫된 소년만 남았다. 세상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고르라면 이 모습은 역시 후자일 테지. 우리의 사랑이 앞으로 더 좋아지기만 하더라도요. 이러다 우리 웨딩 촬영할 때도 긴장할 거예요? 소곤소곤, 짓궂은 말을 불어넣자 가뜩이나 굳은 얼굴이 잘 익은 토망열매처럼 변한 것은 덤이다.
─조금 더 다정하게 붙어봅시다. 손은 과감하게 뻗고, 그렇지. 아주 좋아요. 그대로 정지!
─저, 저 아직 컨셉 촬영…의 설명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서로의 뺨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이번엔 그가 소곤거려왔다. 컨셉이요? 되묻다가 아차, 절벽 아래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치맛자락도 옷도 마구 날렸다. 비명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낭랑하게 높아지고 하늘로 솟구친 모자를 주워 오는 건 포켓몬의 몫이다.
고마워, 블리스. 쭈뼛쭈뼛 모자를 다시 눌러 쓰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셸은 그의 시선이 다시금 저를 향하는 순간 와락, 팔을 뻗었다. 풀과 소금 냄새, 흠뻑 적셔지고 싶은 그의 체취. 일부러 지어보이지 않아도 함박웃음이 나왔다. 그의 입꼬리도 따라 상승곡선을 탄다. 좋은 표정! 사진사의 목소리, 뒤이어 또렷한 목소리가 바람소리에 지지 않고 울린다.
“얼마나 오래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요!”
#.05
지난번에 우리 답했었잖아요. 함께 하는 시간을 추억하는 방법에 대해서. 주노가 적은 것처럼 많이 말하는 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많이 말하려면 역시 추억을 많이 쌓아두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거예요. 좋았던 것, 행복했던 것. 조금 슬펐는데… 당신과 이야기하면서 괜찮아졌던 것까지 다요. 그래서 새로운 추억만들기의 일환이에요. 인생이라고 하는 시간 여행 속에서 매일의 최선을 다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사진 찍어보기! 후후.
평소 입지 않던 옷을 입고 멋을 부리고, 일부러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장소를 고르고 그 한순간을 필름에 남기고…… 오늘 찍은 사진을 1년 뒤에, 5년 뒤에, 10년 뒤에, 30년 뒤에, 그보다 더 뒤에 다시 보면서 오늘의 기분을 떠올려보면 아주 멋지지 않을까요?
저는 분명 당신을 또 한 번, 선명하게 좋아하고 말 거예요. 그리고 당신도 그래 주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무척 멋졌어요, 주노.
#.06
─저번에 찍은 사진이 도착했어요, 주노.
─당신 덕분에 오늘도 저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행복한 사람만 같아요.
─고마워요, 오늘도 아주 좋아해요.
─아주 많이 사랑하고요.
─당신이 있을 내일이 벌써부터 기다려져요. 내일 만나요:)
주셸이 2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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