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올리버
#.01
『상대와 사랑에 빠지면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이 구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싫다.』
누가 한 말이었더라. sns 중독자였던 과거답게 유명한 파랑새 거주자의 말을 인용하며 여자는 손안에 든 것을 쉼 없이 굴렸다. 1분 1초,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초조함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10년 전의 여자라면 그의 말에 하트를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사랑이 밥 먹여주진 않잖아요. 사랑에 빠진 것만으로 실질적인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는데 마치 모든 일이 원만하게 끝날 것처럼 연출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전 영 취향이 아니네요.
10년 뒤 33살, 머지않아 34살이 되는 여자로 말하자면 사랑에 빠지는 걸로 엔드롤 해버리는 영화 따위 안일하기 짝이 없다는 혹평을 할 수 있었다. 그래, 사랑에 빠지는 것만으로 실질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왜 사랑하는 마음 가지고 인간이 달라지지 않더라는 중요한 현실이 영화에는 담기지 않는 거죠? 아니면 제 사랑이 부족한가요? 올리버는 잘만 했는데. 그 사람의 10년 전을 보라고요. 완전 사랑이라고 하는 페로몬에 지배되어서 두 발로 허공도 디딜 것 같았잖아요.
그런데 왜 난 그게 안 되냐고요!
“아-아-아, 정말. 신디아 캐럴, 정신 차려. 넌 신디야.”
사랑이란 거, 그리고 연애라는 거,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기 전보다 하고 난 후가 오히려 불쾌한 기분을 더 많이 당면하는 것도 같은데 이게 맞는 거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고 말이다. 그렇다고 올리버에게 “당신도 이랬어요?” 물어볼 만큼 미치진 않았다. 그러니 그저 앓느니 죽지.
그 사이 휴대폰에 신착 메시지가 도착했다. 확인해 보니 언제 보낸 건지 모를 매니저의 연락과 뒤이어……
「오늘 우리 서로 힘내요(^^)v」
그가 숍에 도착했다는 연락이었다. 손안에 쥔 것을 내내 굴리던 여자는 이내 굳은 결심을 하고 걸음을 움직였다.
#.02
어떤 실패한 연애에 대한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연인에게 참 비협조적이었다. 같이 사는 건 어때요? 커플 아이템을 맞추는 건? 메시지에 답장 좀 해주면 안 돼요? 상대가 바라올 때마다 난 누구랑 같이 못 살아요. 스캔들 내고 싶어요? 아… 미안해요. 깜빡했나 봐요. 대개 이런 답. 누군가가 여자의 인생을 인터뷰 한다면 분명 묻겠지.
Q. 후회하시나요?
그리고 이렇게 답하겠지.
A. 후회한다고 뭐 달라지나요.
지독하게도 신디다운 답이었다. 스스로 그 시절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기는 했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 봤자 달라지진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의 이 감정은 지금이기에 생긴 것이다. 그러니 과거를 돌이켜 구질구질하게 굴기보다……
“하지만 사람이 이성만으로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었다면 세상의 비극이 반으로 줄었겠지.”
남자가 들었다면 “와우, 신디. 방금 딕션이 좋았어요.” 같은 칭찬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떠올리니 또 조금 열을 받는다. 아무튼 이성은 이성이고 감정은 감정, 그 탓에 이런 것도 준비한 것이 아닌가.
무엇이냐면 반지다, 반지. 커플링이라고 하는 것이다. 직접 몇 개나 되는 주얼리 샵을 추천받아서 방문도 하고, 디자이너와 어떤 디자인을 할 건지 씨름을 하고 들어갈 보석 하나까지 세심하게 골라서 받아낸 세상에 한 쌍뿐인 링이었다. 디자이너들이 모두 두 손 들 정도로 까탈스럽게 받아놓고 또 아주 마음에 차는 건 아니어서 완성된 반지를 받고도 그 앞에 서 고민했더랬다. 여자의 입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기 전까지 샵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는 후일담이 있다.
반지의 요구조건은 간단했다. 심플하지만 세련되게. 데일리 링처럼 언제든 낄 수 있는 질리지 않는 디자인으로. 그러면서 제게 어울리는 최고의 형태를. 오, 마지막이 문제였다고? 신디가 쓸 반지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왜 반지를 맞출 생각이 들었는지까지 답하면 정말 부끄럽고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고 하나하나 설명하기 번거로우면서 민망하기까지 하니까 제발 묻지 않아주길! 아무도 없는 허공에 그런 마음의 외침을 하고 여자가 문고리를 돌렸다.
#.03
“──신디?”
메이크업을 받느라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남자가 목소리만 냈다. 보지도 않고 누가 들어왔는지 어떻게 아는 거예요. 그 말을 삼킨 채 신디아 페리 캐럴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만약 이 순간이 두 사람의 로맨스 영화라면 지금 장면은 과연 어디쯤일까.
“이거 받아요. 어떻게 할지는 당신 마음대로 해요.”
여자의 마음속에선 엔딩롤이다. 여기서 딱 더 이상 대사도 없고 장면도 없으면 완벽했다. 그냥 관객들이 오! 하고 즐거운 탄성을 내지르며 후일담을 멋대로 상상하게 두면 되는 거다. 굳이 인심을 쓴다면 쿠키영상 하나쯤 넣어두면 되겠지.
오, 다만 여자에게는 대단히 불행하거나 혹은 도망칠 구석 없이 부끄럽게도 현재present는 영화 촬영 중이 아니라 논픽션의 현실이라서 이런 중요한 장면에서 필름이 끊기는 불상사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도망치지 말고 마주해야지, 신디아 캐럴. 여자의 얼굴이 삽시간에 홍당무가 되었다. 이게 뭐예요? 그런 상투적인 질문 같은 거 해오면, 이 말주변 부족한 여자는 어쩔 수 없이──
#.04
──마, 마음대로 하라고 했잖아요. 마음대로요. 나는 그냥, 주고 싶어서 줬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 ……당신만 괜찮다면 시상식에도 끼고 갈까 해요. 별로, 안 껴도 상관없지만 이제와서 우리가 이런 걸 맞춘다고 해서 대단히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당신 생각은 달라요?
왜냐고 물어도, 그냥…… 정말 꼭 대답해야 해요?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요? 그래요. 아, 알아서 맘대로 생각해요. ──분명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는데, 바보 올리버!
사람들이 자꾸 사귀냐고 물어보는데 슬슬 적당히 돌려 대답하기도 성가셔진 것뿐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별로 뭐… 숨길만한 사이인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대놓고 공개 연애한다는 선언 같은 건 유치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런 형태로…… 물론 당신이 하고 싶다면 나도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건데요. 아잇, 그만 웃어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그……
#.05
결국 남자의 눈앞에서 스스로 약지손가락을 채웠다. 영롱한 금색의 링이 반짝인다. 남자의 손가락 치수는 어떻게 알았냐는 아마추어 같은 질문은 받지 않겠다. 그에게 손을 쫙 펴 보인 채 신디는 어렵사리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걸로 조금 더 당당히, ㄴ, 날 좋아해도 된다는 거예요. 그거면 됐어요. 알았죠?”
더 사랑해주면 좋겠다는 크리스마스의 소원은 산타클로스에게 맡겨버리고 마는 반쪽짜리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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