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올리버
11월 30일에서 12월 1일로 넘어가는 밤, 수많은 파티 플래너가 새벽잠을 줄여가며 온 뉴욕을 하룻밤 사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바꾸는 마법을 부리는 그날의 자정보다 조금 이른 심야 22시. 뉴욕 연예인들은 다 여기 모여 산다는 소문이 자자한 맨해튼 콘도의 한 유닛에서 현재 최고 주가를 올리고 있는 두 사람이 모여 있었다.
“얼른 와요, 올리버. 곧 시작한다고요.”
“아하하. 금방 갈게요. 신디가 절 이렇게 애타게 찾다니 좀 신선한 기분이네요.”
“무슨 뜻이에요, 그 말?”
“그야……”
말꼬리를 늘리며 올리버는 답 대신 맥주 두 병을 테이블에 올렸다. 주위에는 나초나 팝콘,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얹은 브라우니 등 순 신디 취향이다. 영화 보면서 간식거리를 먹지 않는 편인 그의 취향도 반영된 테이블이지만 예감컨대 여기 있는 간식들은 1/3도 비우지 못하고 남겨질 것이다. 그의 연인은 입이 짧았기에.
녹기 전에 아이스크림부터 먹어요. 올리버가 스푼을 입에 가져가자 순순히 받아먹으면서도 신디는 꼬투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야?”
“아, 시작한다. 신디, 앞에 봐야죠.”
“…….”
그새 토라진 연인은 건배도 없이 맥주병을 입에 댔다. 하는 수 없이 올리버가 멋대로 그녀의 병에 제 것을 부딪쳤다. 유리가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화면은 ‘LA LA LAND’의 막이 올랐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TV 상영이었지만 오늘이 조금 특별하다면 드디어 미공개 녹화분과 함께 메이킹 필름이 추가되었단 점이다. 오늘의 주목 여부에 따라 메이킹 필름이 추가된 극장 재개봉도 염두에 둔다고 했다. 연말 시상식이 머지않은 만큼 마케팅의 일환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라고 말했듯 지금도 변함없이 정체된 도로 위의 뮤지컬을 좋아하는 올리버는 금세 오프닝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아침은 다시 돌아오고 또 다른 태양은 뜰 테니까~”
잘 만든 작품, 관객들의 사랑, 상을 기대하냐고 하면 물론 기대하면서도 하지만 이제와 상 하나, 두 개에 연연하지 않게 된 두 사람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이야기기도 했다. 그러니 신디도 호들갑스럽게 올리버를 부를 땐 언제고 그새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초만 집어 먹겠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야…… 당신은 이제 지겹다고 했잖아요, 너무 많이 보고 들었다고. 촬영 때부터 시작해서 편집하면서, 최종 상영에 시사회, 무대인사……. 그래 놓고 오늘 굳이 이걸 구실삼아 그를 집에 부른 이유를 올리버가 모를 리도 없었다. 소중히 해주는 것이다, 그와의 시간을.
시선을 느낀 것처럼 어깨에 머리가 기대왔다. 온기와 무게가 함께하는 가운데 화면으로 태양을 향하는 차들의 뒤통수를 보며 메이킹 필름이 천천히 흘렀다. 간간이 영화를 보면서 신디는 sns의 반응을 더 구경하는 것 같았다. 인터넷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에요? 질문에 이젠 대꾸도 해오지 않았다. 잔소리라 이거지……. 남자의 고개가 슬쩍 기운다. 무슨 이야기들 하고 있어요?
“보상 심리에 대해서 토론이 벌어지네요. 흥미로워요.”
“메이킹 필름이 한 번 더 라라랜드에 대한 관심에 불을 지피긴 했군요.”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 많은 영화니까요. 또, 생각하는 지점이 서로 다를 것도 많고. 영화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말에 신디는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이 영화광. 당신도 이런 작품 만들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 그는 뭐라고 답했을까?
“아, 이거 봐요. 다들 궁금해서 난리가 났어요.”
“응? 뭐에요?”
「뭘 하고 왔냐고요? 음……, 그건…… 올리버에게 물어보세요.」
-절대 키스하고 왔다에 내 10년 알페서력을 걸겠어. -그런 거 걸면 신빙성 올라가잖아(ㅋㅋㅋㅋ) -둘이 진짜 사궈? -픽셀단위로 확대해봤는데 키스 안 함 ㅅㄱ~ -그걸 또 보고 왔냐ㅋㅋㅋㅋㅋㅋ -뭘로 알 수 있어요??? -ㄱㄷ 둘이 얼굴 좀 빨갛지 않음? 뭐 한 거야 빨리 말 좀 해봐 -부라더 다메요! 콰쾅ㅇ쾅콰오 |
실시간으로 글들이 휙휙 지나간다. 얼굴 빨갰어요? 하고 화면으로 눈을 돌려봤자 이미 장면은 다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sns는 그 한 장면으로 불타고 있었다. 이거 진짜 다들 궁금한가 봐요. 어쩌지, 나중에 인터뷰에서 또 물어보면? 남자의 가슴에 기댄 채 여자가 천진하게 묻는다.
음, 또 물어보면─ 소극장의 하늘도 양껏 날아다니는데 신디를 날게 하는 건 일도 아니죠. ……라고 하면 재수 없다고 할 건가요? 질문에 질문이 돌아왔다. 재수 없을 것까진 아니었는데 당신 뒷말에 재고 좀 해봐야겠어요. 짓궂게 답하다 신디가 노림수를 바꾸었다.
“있었던 일 그대로 설명하는 건요? 당신이 나를 대기실로 데려가서, 번쩍 들어가 테이블에 앉혀둔 채로…… 내 무릎에 팔을 올리고 여우같이 쳐다봤다고요.”
“여우 같았어요? 저는 정말 순수하게 신디를 도와주려고 그랬던 건데.”
“어우~ 뻔뻔해라.”
그렇지만 굉장히 효과적이기도 했죠. 그날의 일을 다시 떠올리면 꼭 대본을 이해 못해서 NG를 내던 것만은 아니었다. 올리버와 마주 보고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하는 게 어딘지 낯간지러워서, 미아를 연기해야 하는데 자꾸 다른 생각이 더 들어서 충분히 몰입하지 못했다. 그런 때에 그가 내린 처방이 얼마나 굉장했는지, 이걸 인터뷰에 다 실을 수야 없지.
「신디아, 그러니까……」
신디아라고 부르는 건 반칙이라고 한 번쯤 말해둘까. 어쩐지 그 부름 앞에선 속수무책이 되어서. 무릎 위를 눌러오는 무게, 그의 온기, 다정하게 응시해오는 시선. 왜 그렇게 쳐다봐요. 중얼거리는 입술을 그가 키스로 막았다.
「당신이랑 함께 있을 때마다 전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에요. 세바스찬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요. 너무 소중하고 좋아해서, 마음만은 정말 하늘을 날고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그걸 영화를 통해 표현하다니 얼마나 멋져요.」
네, 네. 감독님. 투덜거렸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했다. 그의 마음도. 당신도 세바스찬이랑 같아요? 당장에 날개가 돋아나 날 것 같아요? 토라진 채로 묻자 그는 마냥 해맑게 그럼요! 하고 답해왔다. 바보, 진짜 바보.
「올리버에겐 날개보다 깃털이 꽂힌 모자와 가죽구두가 더 어울리겠어요.」
그리곤 그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입맞추고 나왔다. 무척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봐야 10분 남짓. 대기실을 나와서도 티 하나 안 냈다. 이게 바로 30대의 여유로움이란 걸까. 그런데도 그게, 오히려 그래서 더 그 짧은 순간이 서로 엇갈려 호텔방에서 만나던 때보다도 훨씬 연애하던 실감을 주었다면 어떨까. 신기하기도 하지.
두 사람을 보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말하던 스태프들을 기억한다. 대부분이 촬영을 마치도록 두 사람이 사귀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연애를 한다면 세상에 요란하게 이 사람을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다녀야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지도 않았다.
둘만 알면 충분했다. 당신과 나.
어느덧 영화가 마무리를 향하고 있었다. 인터뷰도 막바지에 이른다. 『Q. 영화의 결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질문이 흐르고 화면 너머 두 사람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sns 화면도 다시 갱신속도가 오르고 있었다.
-뭐야뭔데 개의미심장함ㅅㅂ ‘그건 제가 미아가 아니라 신디아에게 최선을 선택을 했기 때문에’라니 공개연애선언?? -그렇게 봐도 무방하다고 본다 -라라랜드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거대한 렌페리 세계관 ㅋㅎㅋㅋㅎㅋ -어차피 메이킹 필름이면 그 배우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는 거니까 ㄱㅊ지 않나? -좋아서 하는 말이야;; -신디 표정 봐... ‘좋아하는 마음만으론 안 됐다’니 내 머릿속 망상회로가 불탄다 -신디가 올리버 보려고 영국 갔단 말 찌라시 아녔음?? |
난리 난 화면은 슬슬 꺼버린다. 대신 그의 손을 찾아 만지작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망설여질 때 그녀는 늘 그렇게 시간을 들였다. 그럴 때면 올리버도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기다려주었다. 미지근해진 맥주를 다시 쥐고 신디는 슬쩍 그에게 시선을 흘렸다.
“나도 작품 질문 하나 해도 돼요?”
“이거 따지자면 오프 더 레코드인가요. 물론이에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음, 사실 연기하면서도 대본에서 궁금했던 건데요. 세바스찬은 서운하지 않았을까요? 둘이 영원히 사랑하기로 약속해놓고, 자기는 미아가 남겨준 셉스를 로고로 선택하고 미아를 잊지 않는데 정작 상대는 다른 남자와 행복해져버렸잖아요.”
세바스찬은 계속해서 미아를 사랑해오던 게 아니었을까요. 나라면, 굉장히 서운했을 것 같아. 신디의 말에 올리버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어요. 어차피 살아가는 건 전부 누군가와 함께 만들어가는 거잖아요. 만났다 헤어지고 또 만나기도 하는.”
──애초에 셉이 언젠가 미아가 와주기를, 알아주기를, 그리고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 로고를 택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그때 그 사람과 함께 지었지, 그때 참 좋았지. 그때 꿈꾸던 마음이 아름다웠지, 하면서…… 따지자면 그 시절의 추억이죠!
쾌활한 목소리를 나초 대신 씹어 삼키며 맥주로 넘긴다. 그의 말이 알 듯 모를 듯 했다. 시선이 맞닿을 때마다 올리버는 웃어주었다. 그럼 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진다.
“미아와 함께 있을 때, 순수히 무언가를 꿈꾸던 자신에 대한 추억? 행복한 미아의 현재를 본 순간 셉도 어떠한 완결을 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군요.”
당신도 그랬어요? 극장 안에서 나와 재회했을 때, 아니 사실은 훨씬 더 이전에 당신은 이미 과거의 나를 추억의 한 페이지에 넣어놓고 그땐 그랬지, 하고 지나간 삶으로 삼기만 했을까. 그걸로 당신의 삶은 충분했을까.
지금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있으면서 신디는 때때로, 아니면 그보다 자주 10년 전 과거를 떠올렸다. 그 시절의 자신을 후회하는 건지, 혹은 그 시절이 이미 아무렇지도 않아진 당신을 서운해하는 건지, 당신에게 미안한 건지 아니면 또 다른 감정인 건지. 어느 쪽이든 그처럼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어서.
이런 말 해 봤자 영화와 우리 일을 동일시 하지 말란 답이 돌아오겠지. 신디 역시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저, 마음에 걸린 작은 가시처럼 내내 신경이 쓰일 뿐이다.
“사랑이 전부가 아니니까요. 그 사람의 삶에는 사랑하는 재즈가 있고 꿈을 이룬 카페가 있고 사랑했던 추억이 있고, 그 모든 게 합쳐져 한 사람의 삶이 완성되는 거겠죠.”
“바로 그거예요.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에요?”
왜 그런 표정이냐고 물어봐도, 어떤 표정이길래요? 물어보진 못하고 슬쩍 소파 위로 두 무릎을 올렸다. 그 위에 턱을 괸다. 지금도 당신의 삶은 나 없어도 행복할 것 같다고, 그게 서운하다고 하면 미친 소리 같지 않을까. 그렇다고 저 역시 사랑이 전부인 것도 아니면서.
당신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은 걸까, 아니면 당신의 안에 내가 더 자리 잡길 바라는 걸까. 그게 어떤 욕심인지 모르겠다.
──당신은 사랑을 하면 하늘을 날 것 같다고 했는데, 난 자꾸만 추락할 것 같아요. 이상하기도 하지. 무릎에 괴던 고개를 조금 더 기울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당신에게 최악인 난 보여주고 싶지 않아.
묻고 싶은 듯 닿아오는 시선에 신디는 빙그레 웃었다.
“연말 시상식에서 입을 드레스의 가봉을 마쳤다고 해요. 다음에 시착하러 가볼 건데…… 당신도 봐줘요.”
오늘은 다른 말 하고 싶어서 부른 게 아니니까 이해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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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요? 작중에서 미아는 사랑한다는 말을 세바스찬에게 딱 두 번 해요. 한 번은 ‘사랑해요’, 한 번은…… ‘정말로 사랑했어요.’, 그 말이 참 어려운가 봐요.”
그런데 나도, 그 말이 왜 그렇게 잘 안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자연스럽게 하려고 하면 말해야 한단 생각이 안 나고, 의식해서 말하려고 하면요. 왠지…… 그 말이 무겁고 중요한 건지, 그냥 쑥스러울 뿐인지 목에 걸린 것처럼 잘 나오지 않아요. 내가 정말 당신에게 그런 말을 전해도 되는 건지 자신이 없는지, 좋아한다는 말과 사랑한단 말에는 무슨 차이가 있길래 말이죠. 당신이라면 알까요?
“그래서……”
말하기 어려운 민망한 기분에 응시해오는 시선을 마주하지도 못한 채, 여자는 꾸물거리다가 살며시 그의 손깍지를 찾아 꼈다. 시선은 여전히 그의 무릎가. 지금이 촬영 중이었다면 NG가 났을 만한 장면이다. ‘카메라에 표정이 잡히지 않잖아!’ 감독의 호통이 들린다. 그래도 눈을 질끈 감은 채 여자가 말했다.
“──크리스마스에 뭐 해요? ……별일 없으면, …나랑…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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