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ail de l'aurore amène l'or
영상편집실은 언제나 어두컴컴했다. 그야 화면을 보고 작업해야 하는 직종 상 화면보다 밝은 방이란 존재할 리 없는 명제다. 누구였더라. 우스갯소리로 “PD님, 이러다 저 시력 떨어지면 산재 되나요?” 물어봤다가 된통 깨졌다던가. 다른 직원은 또 “산재 신청할 거면 시력보다 간접흡연이나 해주시죠.” 했다던가.
그래도 과거에 비해 요즘은 편집실 흡연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형편이 나았다. 직장 동료의 간접흡연을 방지하기 위해? 아니다. 담배 연기가 사람보다 비싼 편집실 장비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작부터 꿈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다. 본론으로 돌아가 이들이 여기 모인 이유를 보자. 오늘의 테마는 [HERO], 24세기 최고의 직업으로 꼽히는 히어로 공익광고 편집이 현재 이곳에 떨어진 임무였다. “그럼 어디 처음부터 재생해 봐.” 손짓에 재생 버튼이 탁, 눌린다.
<영웅은 언제나 여러분 곁에! 히어로 출동 신고는 국번 없이 7979>
[존재만으로 든든하죠. 언제나 저희 시민들을 지켜주는 느낌?]
[무슨 일이 생겨도 히어로가 와줄 걸 아니까 안심이에요!]
[뭔 씨 어설픈 xx들이 개나 소나 히어로라고 설ㅊ…]
다급한 정지버튼을 끝으로 내부가 쥐 죽은 듯 고요해진다. 적막을 깬 건 라이터가 점화하는 소리였다.
“트롤링 죽이네. 어떤 머저리가 이거 편집 안 하고 그대로 넣었어?”
PD의 입에 담배가 물리지만 아무도 여기가 금연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에 화면이 가려지고 모두가 눈치만 보던 중, 한 명이 재빠르게 “방금 장면 자르고 다음 넘어가!” 외쳤다. 그제야 잔뜩 경직되어 있던 어깨들이 하나, 둘 내려간다.
더 혼낼 건 없었다. 그래서 이다음에 오는 게 뭐라고? 아, 히어로 24시. 오케이. 저거 수정하는 동안 그거나 틀어봐. 지시가 떨어지자 화면이 전환된다. 그러니까 바로, 밀착 취재 다큐멘터리였다. 24시간 동안 히어로의 근무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요지의.
또 이상한 게 나오면 어쩌지,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화면에 꽂힌다. 커다란 모니터에 비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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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HOURs – 히어로 편 : 뽀또의 하루]
하나, 둘, 셋, 신호와 함께 흰머리와 분홍머리 두 사람이 카메라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히어로 기관 ‘뽀또’에 소속해 있는~” 입을 맞추어 멘트를 외치다가 분홍머리 쪽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친애하는 당신 곁에 언제나 함께하는 ‘몽셸’이랍니다.”
“아, 앞으로 더 성장할 히어로 ‘시드’입니다!”
──역시 저 코드네임을 잘못 지은 게 아닐까요. 아니면 기관 선택을 잘못했다든지. 그야, 저 빼고 다들 과지 이름인데 저만 혼자서 시드…….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머리를 감싸 쥐는 백발의 청년은 이제 갓 성인이 되었을까 싶은 풋풋한 인상이었는데 마침 명찰을 보니 「수습: 시드」라고 적혀 있는 것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스카우트 됐나보다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청년의 곁에서 그의 등을 도닥이며 위로해주는 여성은 나이는 청년과 비슷해 보였지만 분위기가 부쩍 어른스러웠는데 그야 이 동네 R시에서는 모르는 시민이 없을 정도로 알려진 4년차 히어로이니 능숙함이 묻어나는 것도 그럴 만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복을 입고 씩씩하게 달렸는데 지금은 히어로 코스튬이라는 걸 제대로 챙겨 입고 다니니 어른들 입장에선 자식이 다 자란 것만 같을까.
“그럼 시드 씨. 오늘 우리가 어쩌다 『24HOURs』를 촬영하게 되었는지부터 시청자분들께 설명해드릴까요?”
“앗, 네. 저기, 그러니까…… 평소 히어로의 하루를 궁금해하시는 분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드리면서, 저희의 일상을 공개함으로써 여러분께 보다 친근한, 이웃 같은 히어로를 표방하고자 프로그램을 기획하였으며……”
“그렇게 대본만 보고 말하지 말구요~”
그, 그치만요. 에… 아니, 몽셸 씨. 금세 울상을 짓는 청년을 대신해 여자가 카메라를 제 쪽으로 죽 당겼다. 그러지 말고 우선 움직여볼까요? 저희 부서부터 차근차근 소개해드릴게요. 그때까지도 현관에 있던 두 사람은 주변에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1층 로비에는 층별 안내와 구조도 따위가 있었는데 이를 가리키는 동안에도 여자는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저희 사무실은 총 6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왜 6층이냐면 승객용 엘리베이터 의무 설치가 6층 이상이거든요. 그래서 서장님이 무조건 6층은 하라고 하셔서…….”
아나운서라도 된 것처럼 물 흐르듯 설명하는 동안 남자는 간간이 뜨악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는데 가령 이런 이유다.
“그런 거 막 말해도 되나요? 그, 그보다 이렇게 내부를 다 공개해버리다 빌런들에게 위험해지면…….”
“어머. 하지만 사무실 건물은 원래도 견학 신청만 하면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는걸요. 마침 잘 얘기해주셨어요. 시드 씨. 여러분! 『히어로 기관 뽀또』의 견학을 희망하신다면 아래 번호로 전화, 혹은 메일 남겨주세요~”
편집과정에서 자막이 들어갈 걸 아는 능숙한 손짓이었다. 허공을 가리키는 여자를 힐끔힐끔하다 청년도 조금 부끄러운 낯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따라 가리켰다. 참 잘했어요! 빼먹지 않고 칭찬이 뒤따른다.
“후후. 이제까지 빌런들의 사무실 습격이 없던 일은 아니지만 다~ 방비가 되어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무슨 일이 생기면 시드 씨도 나서주실 테고요. 그렇죠?”
“넷? 저, 저요? 제가요? 아.”
청년의 얼굴 위로 맞다. 나도 히어로지…. 라는 표정이 스쳐 지났다. 자막을 달 것도 없는 얼굴이다.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눈을 굴리던 청년은 6초쯤 늦게─바로 답이 나왔어야지!─“네, 네! 저도… 힘내겠습니다!”하고 기합이 잔뜩 들어간 답을 주었다. 여자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떠들다 보면 어느덧 두 사람의 사무실 앞이었다. 막 내부를 오픈하기 전, 여자가 “잠시만요.”하고 청년을 만류한다. 어정쩡하게 손잡이에 올려둔 손을 잽싸게 거둔 청년이 차렷 자세를 하고 대신에 흰 장갑으로 곱게 덮인 손이 어디서 꺼낸 것인지 스케치북을 펼쳤다. 스케치북의 표지에는 [What? 이능력의 성립과 5차 혁명기]라고 적혀 있었는데 수제로 보였다.
“여기서 잠깐, 저희 부서 설명에 앞서서 고루한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모두 아시는 바지만 ‘이능력의 발현’이라는 경이로운 일이 최초로 발생한 날로부터 편의상 인류의 역사는 5차 혁명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정의해요. 이능력이란 정말 각양각색이어서 자기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반드시 그 사람에게 알맞은 능력을 안겨주진 않았는데요……”
예를 들어 바로 옆에서 학생처럼 경청 중인 청년의 경우, 처음 깨우쳤던 이능력은 소박하게도 식물을 생장시키는 능력. 잭과 콩나무처럼 커다랗게 키우는 것도 아니고 과수원을 하는 가업을 잇기에 적당히 좋을 수준이었다. 그나마 청년의 집안이 농가였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이능력과 전혀 무관한 직업을 택했을 것이다.
설명하는 당사자로 말하자면 무역회사 사장님 딸이라는 거창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발현된 이능력은 한마디로 말해서 ‘테라피’, 현대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정신건강센터를 차린다면 대성했겠으나 역시나 가업과는 무관하다.
하물며 누군가는 평생동안 이능력의 발현 조건도 모른다는 사람들 간의 부조리와 불평등 사이에서, 마침내 세계는 긴 합의를 거쳐 「이능력자에 관한 법률 328차 개정안」을 내놓는다. 이 세계법은 모든 사람들이 이능력과 상관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보장하였고, 그때부터 이능력이란 사람들의 수많은 개성 중 일부로 자리 잡게 된다. ‘사이킥 하이(Psychic High)’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내며 모두가 특별한 나에 취했던 혼란한 시기가 그렇게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이능력이란 때론 기적처럼 압도적인 개성을 뽐냈다. 그 누군가가 반드시 능력을 선하고 올바르게만 사용하지 않았다. 사이킥 하이가 지나간 뒤에도 이능력을 악용하는 악당은 존재했고 필연적으로 그 대척점에 서는 이들이 나타났다. 픽션 속 히어로와 빌런이 하나의 직업으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빌런을 직업으로 인정해도 될지는 여전히 논의 중인 사안이다─.
히어로와 빌런의 등장이 세상에 거국적인 변화를 가져오진 않았다. 악은 전염병처럼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그들과 다투는 현대의 히어로란 넓게 보자면 경찰관이나 소방관이 하던 특수경력직의 연장이었다. 일은 고되고 대우는 좋지 않으며 규제는 너무나 많다.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영웅이라는 명예 정도. 히어로 기관이 기를 쓰고 신입 대원을 영입하려고 애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있다.
“──그래서 저희 생활안전과에서는 시민 여러분의 일상을 지켜드리기 위해 24시간 근무조로 활동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출동할 수 있도록 늘 대기하고 있답니다. 24시간 대기를 한다는 건 물론 쉽지 않지만… 그만큼 여러분과 더 가까워질 수 있어서 보람을 느껴요. 언제나 여러분 곁에 저희가 있음을 알아주세요.”
그런데도 선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마음에는 어떤 신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부드럽게 미소 짓는 여자의 얼굴에는 이능력을 쓰지 않고도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이런 게 바로 히어로의 귀감이라는 양 온화하면서 단단하다. 카메라 앞인 걸 잊고 남자의 표정은 몽롱해진다. 저 반짝이는 미소가 그를 이끌었다. 그 역시 이 길에 오르고 싶다고, 사람들에게 주저 없이 손 뻗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꿈꾸게 했다.
“그럼, 지금부터 저희의 24시간을 보러 가볼까요? 히어로 꿈나무 여러분과 함께 출발~”
핫, 정신을 되찾은 청년이 서둘러 그녀의 곁을 따른다. 조금 전 홀린 듯하던 표정은 옅은 홍조만 남기고 사라졌지만 대신 이제 다른 걱정이 그려져 있었다.
‘설명은 엄청 유익했지만 이거 전부 편집되는 거 아닐까? ……저, 저는 열심히 들었어요. 몽셸 씨!’
무엇하나 참 쉽지 않은 히어로의 길이었다.
이어지는 촬영은 신고 접수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편집자들의 역량을 시험하는 시시콜콜한 구간이었다. 사무실 내부를 구경하고 탕비실을 자랑한다. 안에는 다양한 과자들과 차와 커피 등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서로 좋아하는 과자가 무엇인지 말하거나 얼마 전에 구입한 얼음 정수기를 뽐내기도 했다.
미리 냉침해둔 홍차를 카메라맨을 비롯한 주변 스태프들에게도 한 잔씩 건네기도 했다. 탄산수에 오래 우려낸 그것은 진한 홍차향과 톡 쏘는 탄산의 조합이 중독성을 자아냈다. 이거 맛있네요. 스태프의 반사적인 칭찬에 볼우물이 패도록 여자가 수줍게 웃었다.
“24시간 근무에서 제일 힘든 건 역시 졸음과의 싸움이라서요. 다양한 졸음방지책을 준비해두는데, 전 홍차가 가장 좋았어요. 진하게 우려서 우유를 타면 밤엔 속이 든든하기도 하고. 가뜩이나 저는 페널티 때문에…, 앗. 죄송해요. 이 부분은 편집해주시겠어요?”
편집이요? 아, 네. 그럴게요. 스태프의 대답에 여자가 휴 가슴을 쓸어내린다. 괜히 더 안절부절못하는 건 제 전용의 녹색 컵을 든 남자 쪽이었다. 이능력의 페널티가 무엇인지 밝혀지는 건 리스크가 큰데 카메라에선 편집된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서 말해버려서 괜찮은 걸까.
걱정하는 모습에 여자의 손이 컵을 든 손을 감싸고 작게 토닥거린다. 미안해요, 괜찮을 거예요. 그 다정한 온기에 허리가 쭈뼛 선 청년은 그새 허둥대며 말을 돌렸다. 페널티에서 화제를 바꾸기 위함이기도 했다.
“……저, 저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차 맛 같은 건 잘 모르고… 있었는데요. 그냥, 저, 주는 대로 다 마시는 편이었고. 그런데 에…, 몽셸 씨 덕분에 차 종류가 이렇게 많고 또 맛있단 것도 알게 돼서 감사하고 있어요. 쉬는 날에는 몽셸 씨의 차를 마시지 못해서 아쉬울 정도…….”
열심히 말을 늘어놓던 청년의 얼굴에 작은 낭패감이 서렸다. 말할수록 정말 재미없는 이야기 같았다. 괜히 궁금하지도 않은 걸 혼자 떠든 건 아닐까? 그보다 어디서 멈춰야 할지 모르겠는데 어떡하지. 브레이크를 당길 줄 모르는 기차처럼 연기만 내뿜었다. 머리 위로 김이 오르는 것 같았다. 기다렸다는 듯 짓궂은 질문이 스케치북에 적힌다.
[두 분은 무슨 사이세요?]
“엣? 사, 사이. 아, 아, 아무 사이도…!?”
딸꾹. 놀라는 청년 옆으로 온화한 목소리가 끼어든다.
“평범하게 직장 동료 사이랍니다. 보다시피 시드 씨가 아직 저희 기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도와드리고 있어요.”
사적인 질문은 여기까지 해주세요. 여자의 두 손이 엑스자를 그린 직후, 좋은 타이밍에 경보음이 울렸다. 경보음의 컬러는 그린. 단순 민원이다.
“신고가 들어오면 접수처에서 신고 내용에 따라서 적절한 알림을 주세요. 지금처럼 촌각을 다투지 않고, 특별한 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땐 그린. 장비를 갖춰야 하는 일은 블루, 서둘러야 할 땐 옐로, 그리고 위기 경보 1급의 레드까지 이어진답니다. 자, 그럼 저희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렛츠 고~ 리본머리 히어로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그 뒤로는 제법 바쁜 시간이었다. 처음 들어온 신고, [하수구에 열쇠를 떨어트렸어요.]부터 시작해서 길 잃은 어르신을 집까지 바래다 드리기, 나무에서 못 내려오는 고양이 구조하기, 식당에서 발생한 분쟁을 수습하러 갔다가 점심을 얻어먹고 나오기도 하고 배달 실수로 밀가루 포대가 길에서 터진 걸 치우기도 했다.
이런 게 정말… 히어로의 일? 분명 그런 자막이 들어가고 말 거라고 의외로 이 방송의 애청자인 청년이 편집 방향성을 짐작하는 동안에도 옆에서는 오디오가 비는 일이 없도록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시드 씨의 이능력은 사이코키네시스, 즉 염동력이에요. 굉장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서 시드 씨가 저희 부서에 와준 뒤로는 얼마나 든든하고 또 멋진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이 생기든 해결해주는 만능열쇠 시드 씨~ 와아아.”
“그, 그렇게 대단할 것까진…….”
또다시 청년이 목덜미부터 푹 익어 고개를 숙인다. 여자는 그런 청년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거 보세요. 시드 씨 능력으론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고, 정말 굉장하죠! 이런 대단한 인재가 저희 생활안전과에 있다니까요. 칭찬을 들을수록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대로 쥐구멍에라도 들어갔으면.
사람 한 명을 칭찬으로 흐물흐물 녹여버리면서도 여자는 그의 능력이 우리 부서에 있기엔 아깝다든지 사실은 더 큰 부서로 가야 한다든지 같은 말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게 고마웠다. 정말이지 고맙고 기뻐, 차마 쥐구멍에 숨지는 못한 채 남자는 발갛게 달아오른 귀만 만지작거렸다.
이곳에 있어도 된다고 당신이 가르쳐주었다.
“그… 저도 여기가 좋아요. 생활안전과.”
그래서 간신히 한 마디, 진심을 전했다.
──본래 히어로가 될 꿈 같은 건 없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야 솔직히 그런 꿈을 꿔본 적 없는 애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조금 자라고부터 빠르게 주제 파악을 했다. 제가 그런 대단한 영웅의 그릇은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건 두 번째 이능력이 발현되고 나서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생각이었다.
식물을 생장시키는 게 고작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비일상이 남자를 덮쳤다. 갑자기 나타난 여우, 갑자기 떠오른 몸, 방 안의 모든 물건과 자기 자신까지도 띄우고 진정되지 않는 힘을 가라앉히느라 애쓰던 순간의 기억. 새파랗게 질려 여우를 붙잡고 울먹였다. 제 눈물마저 거꾸로 떠올라 천장을 향하는 걸 보며 이건 진짜 아니라고, 안 된다고 제발 진정해달라고 어디에 빌어야 할지 모른 채 빌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조금만 더 진정이 늦었으면 그들의 집마저 떠오르고 말았을 것이라 했다. 실제로 집터가 움직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남자에게는 걸맞지 않은 너무 큰 힘이었다. 왜 이런 힘이 제게 온 것일까. 이런 건 좀 더, 그릇이 큰 사람에게 가야 할 힘이 아닌가. 이만한 힘은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두렵기도 했다. 바라는 건 소박하고 평범한 삶이었는데.
그래서 처음 히어로 기관에서 스카우트를 나왔을 때는 질겁을 하고 도망쳤다.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히어로가 되는 것도 무리였지만 그 힘으로 빌런과 싸우라니 크나큰 무리였다.
[무엇이 그렇게 무리예요?]
그랬는데… 언제였더라. 끈질기게 권유하고 찾아온 끝에 이유를 물어봐 주던 다정한 목소리가 있었다. 꼴사납게 등을 말고 웅크린 청년은 제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은 채 웅얼거리며 답했다.
[싸운다는 거 자체가, 저한테는 무리고. ……솔직히 무서워요.]
[어떤 게요?]
[……잘, 해내지 못할까 봐. 지키지 못할까 봐. 저는… 겁쟁이인데, 저 하나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면서 남을… 어떻게, 지키겠어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나약하고 볼품없는 모습뿐이겠지만 단적으로 말해도 결국 나오는 말은 거기서 거기였다. 두려움, 부담감, 책임에서의 회피 따위다. 역시 히어로 같은 것은 할 수 없었다. 거절해야 맞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장갑 낀 작은 손이 등을 두드려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주노 씨 마음 어딘가에는 남을 돕고 싶어 하는 상냥함도, 잘해보고 싶은 의지도 있는 것 같아요.]
아니라면 당신의 여우가 이렇게 당신 곁을 떠나지 않고 응원할 리 없잖아요. 사실은 저희를 완전히 뿌리치고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도 이렇게 붙잡혀준 것도요. 조곤조곤하게 속삭여오는 목소리가 ‘그런 걸까…?’하고 저도 확신하지 못하는 제 마음에 봄바람처럼 스며들었다.
[저는요, 대단한 영웅이 될 만한 힘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능력을 발휘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 이 길을 선택했어요. 제 덕분에 안심하고 웃는 얼굴을 해주는 사람들이 좋아서, 뿌듯해서요.]
이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싱그러운 과일빛 입술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예찬할 때마다, 하늘과 바다를 한자리에 모은 푸른 눈동자가 세상을 비추며 반짝일 때마다, 그녀가 보고 듣고 말하는 세상이 어떻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다.
당신이 바라보는 것처럼 나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무언가 달라질까. 조금 솔깃했다. 그 미소를 따라 웃고 싶었다.
불순한 의도가 아주 아니었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날로 과수원집 아들 주노는 히어로 시드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대빌범죄대응반 같은 곳에 들어갈 순 없어서 저를 스카우트 하러 와준 이와 같은 생활안전과를 택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부서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반드시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덜했고 사람들의 소소하면서도 당연한 일상을 도울 때마다, 감사 인사를 들을 때마다 뿌듯함이라는 것이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 허리를 곧게 펴도록 해주었다. 언젠가는 그도 당당하게 스스로를 히어로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 몽셸 씨. 여기, 차 드세요.”
“으응…. 고마워요, 주ㄴ…, 앗차차. 시드 씨.”
내내 주의하던 여자도 무심코 호칭을 실수할 뻔했다. 제 뺨을 챱 두드리는 그녀의 눈에 졸음이 엿보였다.
어느덧 24시간 중에 19시간을 지나 야심한 새벽이었다. 1시간 전 취객의 수습을 마치고 돌아온 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오늘 출동은 이것으로 끝이길 바랐다.
원래부터 밤에 약하고 잠에 약한 여자는 사실 24시간 교대 근무를 힘들어하는 편이었다. 미성년일 당시에는 그래서 방과 후부터 저녁까지만 활동하는 파트 타임 근무였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생활안전과에 왔다.
[왜 굳이… 이 부서를 택한 거예요?]
[제 능력을 쓸 수 있는 제일 적합한 곳이라고 느꼈거든요.]
밤은 특히나 외롭고 쓸쓸하고, 불안이 파고들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그녀가 생활안전과로 온 뒤 정말로 다양한 사건사고들이 원만히 풀렸다. 어둠이 부추겨오는 나쁜 감정들을 감싸 보듬어주는 포근한 테라피 쿠션은 사람들이 새벽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러니까 조금 피곤해도, 이겨낼 수 있어요.
바람처럼 무사히 지나갈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어둠은 그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간 울리던 경보음과 차원이 다른 위급한 소리가 건물을 울렸다. 반짝이는 신호등은 붉은색. 코드 레드다. 불이 한 번 반짝이는 순간 졸음 가득한 눈이 말끔하게 떠졌다.
“출동해요, 시드 씨!”
“네, 넷. 가요…!”
목적지는 H 빌딩. 빌런이 불꽃놀이를 터트리며 건물을 부수고 테러를 일삼고 있다는 제보였다. 긴장감에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는 남자 옆에서 여자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금 같은 일이 발생할 경우, 24시간 근무조인 저희가 먼저 현장에 가고 그 뒤 다른 분들이 출동해서 함께 수습하거나 배턴터치를 하거나 해요.”
이런 때 가장 빨리 출동할 수 있도록 대기하는 게 두 사람과, 또 다른 부서의 당직 대원들 역할이었다. 빌딩 꼭대기에서 빌런을 상대하는 역할을 대빌런범죄대응반의 당직이 맡는 동안 두 사람은 시민들의 대피를 유도하고 접근을 막고 2차 피해를 방지해야 했다.
현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능숙하게 대피유도등을 켜고 확성기를 울리며 시민들의 안전을 지켰다. 머리 위 하늘에서는 불꽃이 터지고 벼락이 떨어지며 영화 속 화려한 특수효과처럼 보이는 것들이 난무했는데, 멀리서 보면 멋있을지 모르는 저것들이 바로 코앞에서 펼쳐질 때면 제 생명을 위협하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 두 사람은 시민들의 안전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앗, 윽.”
“시드 씨, 괜찮아요??”
“네…에. …버틸, 수 있… 버텨볼, 게요.”
머리 위로 건물 파편이 계속해 떨어졌다. 작은 것도 큰 것도 섞여 있었다. 그 파편들을 막아내는 게 그의 염동력이다. 어깨 위에 나타난 여우가 실눈을 번쩍 뜨고 드넓게 얇은 막을 펼쳐 사람들을 보호했다.
그사이 크고 작은 푹신한 쿠션들이 대피하는 사람들의 품에 끼워지거나 머리 위로 달라붙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공포와 불안이 사람들 사이에 번져 패닉을 일으키지 않도록 모두의 심적 안정을 돕는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는데도 사람들의 마음은 놀랍도록 평온하여 모두가 대피 유도를 잘 따라주었다.
머리 위에서 펼쳐지는 기인열전 같은 상황을 드물게도 노려보며 여자는 여전히 저를 쫓는 카메라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생활안전과는 잠시 공백이 생기고 말아요. 그래서 빌런의 테러가 정말 나쁜 거랍니다. 그로 인해 어쩌면, 정말 도움이 필요한 순간을 놓쳐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저는 무고한 이들을 휘말리게 하는 저들의 행위에, 어떤 이유가 있다 한들 받아들일 수 없어요.
대빌런대응팀이 건물 꼭대기에서 쾅, 콰광, 이라든지 피융 슝, 이라든지 치직, 쿵! 같은 경이로운 소리를 내는 동안 건물 아래에선 소시민의 잰걸음이 바쁘게 이어졌다. 영화에서 조명되는 것은 필히 저 꼭대기일 테지만 우리네 삶이란 카메라 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불꽃이 피어오르고 불씨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갔다. 캄캄한 밤하늘을 잿빛 연기가 가려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다. 생각보다 우리 세상은 달과 별의 빛만으로도 충분히 밝았던 것인지 연기가 가려버림으로써 이렇게나 어두워져 버리다니. 보이지 않을 때야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는 것만 같았다.
동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를 내고 그들을 안전지대로 인도해 보급품을 나눠주었다. 한여름이었지만 긴장한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것은 따뜻한 차였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차 마무리를 지어갔다. 시끄럽다고 민원이 들어오지 말아야 할 텐데요. 우스갯소리를 할 여유도 생겼다. 민원이…, 빌런에게 들어가는 일은 없겠죠. 받아칠 줄 알게 된 건 극히 최근이었다.
“언니, 우리 언제 집 가요?”
“조금만 더 있으면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아, 테러 확인서를 발급해줄 테니까 오늘은 지각해도 혼나지 않을 수 있는데~”
“진짜요? 그래도 돼요?”
“응, 진짜요~ 돌아가면 우리 같이 햇님이 높이높이 뜰 때까지 늦잠 자기로 해요.”
동그란 강아지 쿠션을 안은 아이가 빠진 이를 히- 드러내며 웃는다. 그래도 점심시간에는 갈래요. 애들에게 자랑할 거예요. 히어로를 봤다고요! 해맑은 목소리야말로 이 일을 계속해나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사후 처리와 시민의 안전 귀가를 맡아줄 교대자들이 오고 나서야 두 사람은 본부로 복귀할 수 있었다. 복귀하는 동안 여자의 품에는 폭신폭신한 코끼리 인형이, 남자에게는 하얀 누에 같은 인형이 안겨 있었는데 능력을 과도하게 쓴 탓인지 흐물흐물해진 남자는 허공에 뜬 인형에 반쯤 엎드린 채로 터벅터벅 걸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더 참아요~”
“에셸 씨도……. 으으….”
그의 페널티였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코피. 지금은 두통 벌칙을 품에 안은 인형이 덜어주고 있어 덜했지만 본부로 돌아가면 두루마리 휴지를 둘둘 뜯어 코를 누르겠지. 유니폼에 피 묻히면 안 되는데, 피는 세탁이 잘 안된다고. 중얼거리는 남자 옆에서 여자는 기묘하게도 피로감이 없는지 말똥말똥한 눈이었다. 그러나 그게 더 걱정이었다. 저 눈은 지금도 여전히 이능력을 멈추지 못한 채 정신력을 깎아 유지 중이라는 뜻이다.
별수 없는 노릇이다. 이유 중 하나는 남자의 페널티를 덜어주기 위함이었고 또 하나는,
“아. 어느새 동이 텄네요.”
“우와. 시간이 벌써…. 이제 퇴근 시간까지 10분 남았어요.”
다시금 돌아온 히어로 기관 뽀또의 현관 앞. 길거리에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며 출근과 등교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전날의 소란은 까맣게 모르고 각자의 일상을 영위한다. 바로 저런 모습을 지키고 싶었어요. 중얼거리며 자동문을 터치하고 건물의 문턱을 넘는 순간, 인형이 펑! 사라지고 동시에 여자가 쓰러졌다. 정확히는 쓰러지려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 남자가 번쩍 안아 들었다.
무게가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몸짓이었다. 저는 코피를 뚝뚝 떨어트리면서 그보다는 피가 옷에 묻지 않는 일에만 주의를 기울이며 남자는 익숙하게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저 잠들었을 뿐임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한 듯 한숨을 뱉는다.
스태프들이 당황하는 사이 모자에서 튀어나온 여우가 남자의 코에 손수건을 띄웠다. 몽셸이 건네주려 했던 듯 손에 쥐고 있던 분홍색의 물건이었다. 앗, 이거 피 묻혀버리면……. 중얼거리던 청년은 이미 묻어버린 걸 어쩔 수 없단 듯, 면목 없이 굴다가 품에 안은 상대를 카메라로부터 가리듯 어설프게 꾸벅 인사했다.
“그, 그럼 『24HOURs - 히어로 편』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 어. 여, 여러분의 일상에 언제나 함께하는 히어로! 였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 자리에 카메라맨을 우뚝 세워둔 채 허둥지둥 안쪽으로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한참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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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두 분 페널티라고 하더라고요. 기밀사항이어서 편집해달라고 기관의 요청을 받았는데, 어떤 방향으로 편집할지 PD님 보여드리려고─. 설명이 뒤따른다. 1차적으로 카메라 짜깁기만 적당히 된 영상을 주의 깊게 보던 PD는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턱을 잠시 문지르며 벌칙 부분은 조금이라도 낌새가 보이는 건 앞뒤까지 세심하게 잘라내라고 하며 추가로 한 마디 덧붙였다.
“저기 마지막 부분은 각도 잘 조절해서 인사만 예쁘게 남기고, 자막 하나 넣자. 그러니까… 《뽀또는 사내 연애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같은 거.”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린 건 누가 먼저였을까. 적어도 한둘은 아니었는지 네, 알겠습니다. 답하면서 여기저기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한번 분위기가 풀어지자 모두 의견이 활발해졌는데 넣고 싶은 BGM이라든지 화면에 띄울 효과며 자막이며 하고 싶은 게 다들 많아 보였다.
그들의 공통된 마음가짐은 한 가지, ‘이 방송을 멋지게 띄우고 싶다’. 염원이 통했는지 이후 방영된 히어로 편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켜 뽀또에 지원하는 이능력자들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몽셸과 시드의 팬이 증가하면서 한동안 본부 앞으로 선물과 팬레터가 따라붙었다고 한다.
멋진 히어로가 되고 싶긴 했지만 이것과는 좀 다른 것 같다며 남자만이 고뇌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호칭에서 경칭이 사라지게 되기까지는 아직 미래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지키는 새벽이 있어 우리의 아침은 오늘도 찬란히 눈부셨다.
제목인 [Travail de l'aurore amène l'or]은 프랑스 속담이에요. [새벽 일은 황금을 가져온다.]라고.
24시간 새벽을 달리는 히어로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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