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미즈쿠라 칸타
003. 09.17. TAVITAVI Travel for.미즈쿠라 칸타
──여행을 가자.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우리는 늘 여행을 가고 싶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고 붙잡혀 있고 싶지 않았다. 우릴 붙잡는 것이 단순한 장소였는지 아니면 편견 어린 시선이나 책임이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자질구레한 것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유롭고 싶었다.
26살의 치기란 것인지도 몰랐다. 기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26+26의 나잇값보다는 거기서 10년쯤 뺀, 그러니까 10대 소년소녀처럼 나뭇잎만 굴러가도 속절없이 웃음이 터지는 풋 되고 어리숙한 애새끼에 불과했으니 26살의 치기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이어서 어렸다. 함께라서 치기 어렸다.
“그래서, 이번 타비타비의 목적지는~~”
“바로바로~…어디였더라?”
“정답! 어디였더라!”
“하아~?”
황당해하는 남자에게 캠코더를 들이밀며 여자가 소리높여 웃는다. 반면 눈썹을 구깃구깃하게 찡그리다가 결국은 웃고 마는 남자의 표정 변화가 프레임 단위로 캠코더에 담겼다. 안전운전을 위한 헬멧은 차의 뒤꽁무니에 달그락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방송에 나가야 하는데 헬멧을 쓰면 얼굴이 안 보이잖아. 그게 여자의 주장이었고, 헬멧보다 내 머리가 더 단단해. 남자가 자랑스럽게 받아쳤더란다.
죽이 잘 맞는 동갑내기 친구들이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외곽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목적지는 특별히 정해지지 않았다. 굳이 고르라면 인적 드문 바닷가를 향해. 근래는 찾기 어렵지 않은 조건이었다. 플랜타리움 현상이 전세계로 퍼지면서 인류는 자연에게로 점점 영역을 돌려주는 덕이다. 조금만 문명이 닿지 않은 곳으로 나가도 사람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인류가 살지 않게 된 곳에 인류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그들이 달리는 포장도로다.
바짝 깎은 머리카락을 위로 세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마구 눌리며 남자가 액셀을 밟자 사이드카의 바퀴가 맹렬히 회전했다. 햇볕에 달궈진 아스팔트 위로 모래 먼지가 피어올랐다. 바람에 자유롭게 흩날리도록 여자는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었다. 끝으로 갈수록 묘한 자색 띠는 머리칼이 춤추듯 일렁였다.
날씨가 좋았다. 해는 선명했고 바람은 습기를 머금으면서도 불쾌하지 않았다. 더위가 한풀 꺾인 가을의 초입이었다. 춥지는 않아? 물어보거든 눈 내리던 호주보다는 훨씬 안 춥지. 웃으며 답했다. 음악 들을까? 조수석의 여자가 솜씨 좋게 카세트테이프를 넣었다. 무려 2023년 노래다. 누가 아직도 카세트테이프를 쓰냐고 하던 시대를 지나 요즘은 빈 카세트테이프에 넣고 싶은 노래를 넣는 것도 자유롭다던가.
♪ 내버려 둬 (hey), 터지게 둬 (hey) 유일한 지금일 테니
♪ 처음 온 길이라 넘어진 걸 어쩌라고?
♪ 피땀으로 (hey), 눈물로 (hey) 채운 게 미련하다고?
♪ 웃기지 좀 말고 빛나는 우릴 지켜나 봐
직사각형의 테이프 넣을 자리가 있는 이 사이드카는 남자가 중고차매장에서 발견하고 사온 것이었다. 한참 옛날 모델이었지만 내부는 새 제품으로 깨끗하게 손봐두어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확실히 요즘은 찾아볼 수 없는 레트로한 감성의 사이드카는 운치가 좋았다. 조수석의 승차감도 더할 나위 없었고. 칸타는 이런 거 참 좋아한다니까. 여자의 말에 뭐, 그렇지. 남자가 쑥스러워했던가.
캠코더 너머로 가운데가 볼록한 푸르른 수평선의 장관을 담으며 이온은 오디오가 비지 않도록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여기가 지도상으로 어디쯤이고 날씨는 어떻고 주변에는 무엇이 있는지 따위였다. 저런 건 정말 잘 한다니까. 감탄하는 칸타의 시선을 느끼고 몇 번 방긋방긋 웃으며 돌아보기도 했다.
생텀의 홍보를 위해 시작했던 [타비타비 채널]은 지금에 와서는 두 사람의 사적 채널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초기의 목적이 유명무실해진 덕이다. 그래도 채널 운영은 재밌었고 동갑내기 두 사람의 대본 없이도 빵빵 터지는 티키타카는 입소문을 타, 초반의 ‘히어로 채널이라고?’하던 관심에서 지금은 ‘아, 그 두 사람 재밌지~’ 정도의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용돈벌이가 쏠쏠한 건 덤이다.
그에 더해 자신들의 신분을 이용해 민간인은 가지 못하게 된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곳의 근황을 전하기도 했다. 단순히 플랜타리움 현상의 진행이 궁금한 사람부터 떠나온 고향의 근황을 찾는 사람, 직접 가볼 수 없는 학자들까지도 몹시 환호하여 몸이 여러 개가 아닌 것이 아쉬울 지경이었다. 그랬다면 더 많은 곳을 다녔을 텐데.
그러니 두 사람이 서로 약속한 것은 하나였다. 누군가를 위해 가지 말자. 우리를 위해 즐겁게 가자. 그러지 않았다간 금세 사명감이니 의무감이니 하는 것에 휘둘릴 게 뻔했으니. 우리는 조금 더 우리를 위해 살아도 괜찮았다.
“여기서 5분만 더 가면 주유소가 있대, 칸타.”
“기름 아직 남아 있을까?”
“있으면 좋겠다.”
기름이 있으면 조금 더 가보고, 없으면 이쯤에서 턴해서 돌아간다. 그런 약속이었다. 기름이 다 떨어진 채로 낙오되었다고 해서 군용 헬기에 구조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그야 여차하면 도보로 돌아올 정도의 능력은 될 것이다. 아마.-
참으로 대책 없는 여행이었지만 그 정도가 딱 좋았다. 인류가 우리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막막한 공포 속에서 허세 섞인 낙관을 부리기에는. 다행히 도착한 주유소에는 기름이 넉넉했다. 이 정도라면 돌아오는 길에 예비 기름 하나 없어도 여기서 다 채워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앞으로 며칠은 더 가도 되겠단 결론을 내렸다.
주유를 하고, 흙먼지 묻은 차체를 한 번 닦아주고 엔진이 쉬는 동안 먼지 쌓인 주유소 안에서 요령껏 먹을만한 것을 찾아낸다. 와, 감자칩이다. 여기 라면도 있어. 오, 통조림. 럭키잖아. 유통기한도 넉넉했다. 그야 버려진 지 기껏해야 한 달이다. 아포칼립스 재난 영화를 찍기엔 터무니없이 일렀다.
참치 통조림에 컵라면, 감자칩을 뜯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아 앉았다. 도로 아래쪽으로 보니 드문드문 지붕이 있었다. 파란 지붕, 노란 지붕, 빨간 지붕…. 당연하지만 사람은 없었다. 없어야 했다.
정면으로는 바다, 등 뒤로는 숲이 무성했다. 아직 도로를 넘어 범람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평범한 숲인 걸까.
“저 나무들은 플랜타리움에 감염된 나무일까, 아닐까.”
“그거야 지금 봐선 모르겠는데… 궁금해?”
“그건 아니고.”
우려 섞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위험에 접근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예전에는 경외심밖에 들지 않던 울창한 자연을 지금은 ‘적’으로 규정하고 긴장해야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라면이 붇기 전에 나무젓가락을 뜯어 후루룩 삼킨다. 찹스틱 잡는 법은 그에게 배웠다. 여전히 영 모양새가 나오지 않았지만 어떻게 입에 욱여넣을 정도는 됐다. 아, 맛있다. 조미료 가득한 맛이었지만 여행지에선 뭔들 맛있는 법이 아닌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갈까.”
“더 안 가고?”
“여기서 더 가면 밤엔 노숙해야 할 거 같은데. 이왕 민가가 보인 김에. 그리고…”
─저기 낚싯배가 있어.
손가락 끝에는 정말 작은 선착장과 배들이 몇 개 있었다. 그럼 오늘 저녁은 칸타가 잡아 온 생선 요리? 장난스레 묻자 나만 잡는 거냐고. 농 섞인 투덜거림이 돌아왔다. 어쨌든 내려가 보자. 다 먹은 것을 정리하고 사이드카는 주유소에 남겨둔 채 두 사람은 해변으로 향했다.
여기나 저기나 고작해야 한 달이었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순식간에 먼지 쌓이고 낡게 변하는 법이었지만 한 번 닦아내니 아직은 쓸만한 것처럼 보였다. 고깃배에 시동을 거는 사내는 마치 몇 년이나 바다에서 일해본 사람 같은 익숙함이 엿보였다. 칸타, 낚시 해 본 적 있어? 고깃배에 타본 적은? 질문에 사내는 뼈가 돋아난 뺨을 긁적이며 글쎄…. 모호한 답을 주었다. 기억엔 없는데. 그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았다.
“──그럼 지금 해보자!”
잠깐의 간극, 여자는 부러 더 밝게 웃으며 기우뚱거리는 배에 올라탔다. 두 사람분의 무게를 싣고 배가 천칭처럼 흔들렸다. 작은 배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두 사람은 거리를 두었다. 똑같은 눈높이, 조금 다른 팔 길이.
같은 나이, 같은 키, 같은 생일, 신기할 정도로 같은 것이 겹쳤다. 누가 일부러 이렇게 만든 걸까? 아니, 일부러일 리가 없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단조롭게 겹치기보다는 정교하게 어긋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로 하여금 맞물릴 수 있게. 그러나 신의 조정 없이도 두 사람은 잘 맞물렸다.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어떤 긴장이나 부담 없이 편안했고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나설 때는 서로에게 등을 맞길 만큼 든든한 신뢰가 있었다.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어깨 힘을 풀고 안도했다. 이온 나비에타에게 미즈쿠라 칸타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니 함께 더 채워나가기를 바랐다. 조각나고 비어버린 그의 구멍을 쓸쓸하지 않게 또 외롭지 않게. 더는 잃지 않기로 약속한 그의 미래에 자신의 색을 양껏 부어 넣어서.
오만과 오지랖이란 왜 같은 ‘오 씨’인지. 사소한 상념이 지난다.
-그물을 던져볼까? 낚싯대면 되려나.
-어차피 우리만 먹을 거니까 낚싯대로 충분하지.
이온은 처음 잡아보는 것이었다. 바닷가 마을에 살았으면서 상황이 여의찮아 배 한 번 타본 적 없고 낚시도 해본 적 없었다. 이거, 낚싯바늘을 어디에 꿰매? 릴을 잡고? 어설프게 낚싯대를 던져놓고는 물고기가 문 건 어떻게 알아? 언제 당기면 돼? 연이은 질문. 그러다 올 물고기도 도망가겠다. 그의 웃음소리.
바다는 잔잔했다. 큰바람도 불지 않았다. 머리 위로 끼룩거리는 갈매기들이 이곳이 아직 살아 있는 곳임을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몇 시간을 배 위에 떠 있는 동안 비행기는 한 대도 지나지 않았다. 고요한 듯 고요하지 않은 낯선 고독감이 있었다. 세계가 마치 버려진 것만 같아. 그런 감상이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정확히는 세계에 우리가 버려진 걸까. 빙하기가 찾아와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얼려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상념 속에서 낚싯대가 잠잠한 것을 응시하다 자리를 옮긴다. 툭, 기대는 건 건너편에 있던 그의 어깨. 뭐야? 미세한 긴장과 피곤해? 가서 쉴래? 염려 섞인 투.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뻘쭘한 듯 기대지 않은 손으로 뺨을 긁적이던 그가 자세를 조금 더 편하게 누그러트렸다. 기댄 머리에 무게를 싣고 키득거린다. 여기 소금 냄새 묻어난다. 제 말에 머쓱하게 확인하는 그를 만류할 땐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앞으로를 채워나가기로 약속해놓고 이미 비어버린 것을 도로 찾아올 순 없었다. 너는 너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는 너에 대해 얼마나 알까. 궁금한 것은 과거? 아니면 미래. 아늑한 친애는 풍랑 일지 않는 수면과 같았다. 그러나 이 작은 배조차도 바다를 가로지르기 위해 수면 아래로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의 안온함 아래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을까. 그것을 너는 어디까지 내게 보이고 싶을까.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하나도 알지 못한 것 같았다.
“칸타에게는 늘 기대고 어리광 부리는 것 같아.”
“갑자기?”
“갑자기.”
네게 많이 의지하고 있어. 좋아해, 칸타. 속삭임이 공기를 타고 새어 나와 바닷물에 녹아내렸다. 그 말이 그의 안에서도 용해되어 사라질까. 앙금처럼 남을까. 빨갛게 된 귀를 보고 키득거리던 이온은 제 낚싯대 끝이 까딱이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허둥지둥 낚싯대를 쥐었다. 잔잔한 수면으로 첨벙, 물보라가 일었다.
빈집 중 아무 데나 들어가 잡은 물고기를 손질하고 식사 준비를 했다. 이런 시골은 자가발전기가 있어서 작동시킬 사람만 있으면 금세 전기든 온수든 쓸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오늘은 목욕도 할 수 있겠다. 세탁기도 돌릴까? 도시를 벗어나 한참 온 주제에 사치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 보면 제법 살 만한 것 같았다. 멸망해가는 세계 속에서 태평한 낙관이다.
사위가 어둑해지도록 밤이 찾아오면 돗자리를 끌고 나와 모래밭 위에 벌러덩 누웠다. 모래알에 등이 까끌까끌했지만 그게 딱 좋았다. 그러기 위한 운치 아니던가. 가을 바닷가의 밤은 제법 쌀쌀했다. 낮엔 햇빛이 강하다 싶었는데 달궈진 모래가 식는 게 눈 깜짝할 새였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금세 도롱이 벌레처럼 담요를 돌돌 말고도 두 손은 쏙 꺼내 캠코더가 밤하늘을 촬영했다.
내일은 어디까지 가볼까. 지도를 보면 여기서 더 내려가면… 두런두런 일정을 떠들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나란히 누운 그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고 개구지게 웃는다. 26살 동갑내기 친구들의 대책 없는 무계획 여행. 과연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문득 손끝이 뼈가 도드라진 뺨에 닿았다. 느릿하게 손이 뻗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36.5도의 온기, 온도 머금지 않은 단단하고 하얀 감촉 사이를 매만지다 꾹 누른다.
“언젠가 더 늦기 전에 칸타의 고향도 가보자.”
의문 담긴 시선에 눈꼬리를 둥글게 접어 웃음으로 화답한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였다. 빛바랜 기억은 휘발되고 사소한 기억은 깜빡하고 중요도에 따라 뇌라고 하는 것이 멋대로 남길 것과 남기지 않을 것을 구분해 정리하는 것은 의지로 막아낼 수 없는 매커니즘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조금 달랐다. 머릿속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생체활동이 아니라 열심히 만든 벌집을 약탈당하듯 통째로 뜯겨나가고, 구멍 난 모래주머니처럼 틈새를 막을 새 없이 쏟아져 흘러버리는 것. 손실, 유실, 상실. 이미 잃어버린 것은 되찾는 길도 요원하다고 했다. 픽션에서처럼 추억의 장소를 방문하니 기적적으로 회복되고 말 것도 아니다.
그를 당사자보다 더 속상하고 서글프게 여겼다. 당사자가 입 밖에 내지 않은 기분까지 더듬어 두려웠을까, 외로웠을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위로든 격려든 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오만과 오지랖이 닮았단 것이다.
회복될 기억이 없음에도 굳이 방문하자고 한 것은 덧칠이라도 하자는 맹랑한 호기였다. 지나간 시간은 카세트테이프를 되감듯 돌릴 수 없지만 앞으로 기록할 여백이 우리에겐 있었다. 고향 풍경이 낯설고 자기 것 같지 않다면 낯설지 않게 새로 익숙해지면 된다. 처음 만나는 것처럼 인사하고 네 것 삼아버리자. 더는 잃지 않겠다고, 망각에 저항하겠다고 네가 말했으니까. 나비는 그의 의지를 지지할 뿐이다.
그를 애정하듯 세상을 애정하였는가. 세상을 애정하여 그에게도 공평하게 굴었나. 아니다. 특별함이 있었고 유별남이 있었다.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하죠. 그렇게까지 세상을 사랑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박애주의는 아니었다. 세상을 위해 희생할 각오 같은 것도 없다. 불고, 연민하는 세상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욕심에 비해 미력한 힘이다. 과연 구원이란 거창한 이름이 붙을만한 것인가. 고결한 정의감을 논하기엔 지금도 좀도둑 같은 짓이나 하고 있었다. 가진 자의 기만이라고 한다면 언제부터 제가 ‘가진 자’에 속했던가.
재차 말하지만 그럼에도다. 영웅HERO. 그 어울리지 않는 무게를 짊어지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겠다며 세상에 봉사하고 헌신한다. 언젠가 정말 견디지 못하게 되면 도망치겠다고, 힘들면 그만두겠다고 말하면서 지금 당장은 외면하지 못하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쩌면 미련했고 명확한 기준 같은 것도 없이 주먹구구에 엉터리였지만 진심만은 있었다. 바라는 것은 그러니까 영웅 같은 거창한 칭호가 아니라 네 이웃을 돌보기 위한 약간의 선의와 사랑, 어떤 숭고한 신성의 대상이 될만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온 나비에타는 미즈쿠라 칸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그가 그를 모르는 만큼 몰랐고 그가 말하지 않는 만큼 조금 더 몰랐다. 친애 너머에 어떤 감정의 빛깔이 감춰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 혹은 바라는지, 그도 아니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그 자신만의 무게를 견디는지조차.
그래서 언젠가 한 번 나는 네게 무엇이냐고 물어볼 뻔했다. 묻지 못했다. 그 복잡한 기분은 말로 다 풀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눈앞에 보이는 그를 안다고는 자부할 수 있었다. 그가 보여주는 신뢰라든지 친애라든지 응원이나 격려, 애정에서 비롯되는 뭇 따스한 감정들에 감싸여 안온함을 찾았다.
[나비!]
네가 불러준다면, 앞으로도 두 음절의 소리를 좇아 날갯짓하는 나비가 될 거야. 얼마든지 자유롭게 날 거야.
여행의 끝이 어떻게 날지조차 장담하지 못하고 한 치 앞의 내일을 모르는 위태로운 세계 가운데 빈 카세트테이프를 돌렸다. 흘러나오는 것은 이미 기록된 추억, 여백에는 아직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앞으로 올 시간은 함께할 수 있노라고.
나란히 쥔 손이 이정표가 되고 함께 남긴 발자취는 삶의 증명이 되어 비로소 무엇도 잃지 않게 되기를.
굉장히 예쁜 로그를 받아서 저도 그에 상응하는 답을 주고 싶어서 많이 고민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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