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주노

45) 홀리데이 블루스

천가유 2024. 12. 31. 21:31

For. 주노

더보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가 다가오면 에셸 달링은 종종 꿈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그때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꿈이란 게 으레 그렇듯 깨어나면 순식간에 기억이 휘발되어 꿈속에서 느꼈던 여운만이 가슴 깊이 남았다. 설렘, 들뜸, 기대와 흥분. 꿈속의 그녀는 언제나 큼지막한 가방을 메고 첫발을 디딘다. 그러면 꿈 너머로……

 

Holiday blues

 

이전까지의 연말은 어떻게 보내왔더라. 내년에 보자며 직장 동료들과 인사를 남기고 친구들을 만나고, 밤에는 가족이 모여 맛있는 식사를 하고, 불켜미의 촛불이 겨울바람에 일렁이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감싸며 함께 해돋이를 보기도 했다. 특별히 정해진 계획이 있진 않았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보내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크나큰 인생의 전환점을 한번 거친 뒤에도 그 명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연말을 함께 보낼 사람이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그리고 올해도 같을 뿐이다. 3년 연속 빛나는 영예의 수상자, 에셸 달링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연인, 주노다.

그래서요. 관동에서 올해 처음 오신 부장님이 전통주를 굉장히 좋아하셔서요.”

아하하, 그거 무척 힘들었을 것 같아요.”

다음날까지 술냄새가 폴폴이었다니까요. 넋두리를 하다가 주노는요? 어땠어요? 질문에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덥수룩하게 덮은 남자는 자기 머리를 슥슥 매만지며 어땠더라. 잠시 말을 끌었다.

포켓몬 중에는냄새에 예민한 녀석도 많고, 전날 잘못 마시거나 했다가 다음날 미움받아버리는 일도 있어서. 조심, 하는 편이에요.”

브리더들도 어지간히 술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지만 서로간에 암묵적으로, 다음날 예약 명단을 보고 날짜를 잡거나. 그렇게까지 마시지 않아도 되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마시는 게 직장이었다고 남자의 고개도 잠시 푹 껶였다. 신기해라! 저와는 전혀 다른 직장 환경이 재미나단 듯 여자의 웃음소리가 높이 들렸다.

과음한 다음날 카리가 도와주진 않아요? 몇 년을 보았으면서도 또 기대에 차 물어보자 전혀요. 숙인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오히려 비몽사몽인 트레이너를 향해 멜로의 물대포를 일부러 부추기지 않으면 다행이지. 덧붙여 지금 고자질 중인 포켓몬들은 추운 날씨일수록 살아나는 녀석들답게 밖에서 눈 미끄럼틀을 타는 중이다.

마시가 싸라기눈을 날려주자 마고와 바나링이 함께 뒤로 고꾸라져 데굴데굴 굴렀다. 꼬리의 불꽃이 눈을 녹인 자리가 이글루의 입구처럼 동그랗게 구멍이 생겼다. 바나링이 구멍으로 까꿍 놀이를 하자 포켓몬들의 흥분한 울음소리가 창 너머로 선명했다. 사이 좋은 모습에 보는 트레이너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저 아이들을 데리고 라이지방 전체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니. 오늘따라 유난히 꿈만 같은 기분이다. 바로 며칠 뒤가 그날이기 때문일까. 연말은 소중한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 그리고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는 날.

13, 그날이 다가올수록 에셸 달링은 점점 선명해지는 꿈속을 걸었다. 현실에서도 메 본 적 없는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꿈길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나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쓸쓸해져 혼자 목적지도 없이 여행 가방을 쌌다. 꾸역꾸역 가방을 싸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짐을 제자리에 두길 수 차례. 소위 말하는 홀리데이 블루스(Holiday blues)라는 모양이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받은 페이퍼 인센트가 도자기로 된 굴뚝에서 연기를 뿜었다. 어딘지 조금 쌉싸름한 향이 새하얀 연기와 함께 실내를 몽롱하게 채웠다. 연기가 이렇게 나는데 눈이 하나도 따갑지 않아요. 신기해 손을 뻗자 당연하게도 잡히는 것은 없었다.

아름다운 추억은 때로, 같은 값의 상실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지금이 이렇게 행복한데도 과거의 즐거움이 문득 아쉬움에 부채질을 했다. 그날 같은 기분을 또 느낄 수 있을까.

쓸쓸함을 달래듯 빈손으로 연인의 손을 살그머니 쥐자 금세 맞잡아오는 따뜻하고 단단한 손길에 뺨이 허물어진다. 당신이 여기에 있어요.

올 한 해, 주노에겐 어떤 해였나요?”

, 갑자기요. 우물쭈물하는 주노에게 네, 갑자기요~ 싱글벙글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일생일대의 질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청년이 축 내려간 눈썹을 깊이 찡그린다. 무엇을 그렇게 고민하는 걸까.

으음.…… …, 죄송해요! 고민 너무 길었죠."

그렇게 심각한 문제예요?”

얼른 고개를 젓고 오해를 풀려는 듯 허둥지둥 답이 들렸다.

뭔가 나빴다거나 심심해서라거나 같은 이유는 아니고올 한해도 즐거운 일이 참 많았거든요. 고마운 일도요어렵고 슬픈 일도 물론 있었지만그래도 괜찮았어요.”

그렇게 크지도 않고 억세지도 않은 음성이 고요한 작은 공간을 채워나갔다. 에셸이 좋아하는 목소리다. ‘그래도 괜찮았어요.’ 들려올 때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소리 내지 않은 뒷말도 있었다. ‘당신이 있어서요.’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어깨에 살며시 이마를 부볐다. , 하고 둥근 어깨 끝에 입술을 눌렀다. 그가 작게 움찔거렸을까.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까 좋았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어서. 너무 간단히 말하는 건 아닐까, 엄청 고민해버렸는데…… 결국은 이것밖에 생각 안 나네요. 좋았어요. 에셸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요……

──에셸은요?

돌아오는 질문에 답을 주기에 앞서 입술이 먼저 닿아버렸다면 어떨까. 놀랄까, 아니면 익숙하게 받아줄까. 반응을 보기도 전에 먼저 눈 감고 말았다. 그래도 괜찮다. 돌아오는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근육이 붙은 팔이 허리를 꾹 끌어안아 당겼다. 맞댄 입술이 길게 휘었다. 벽난로의 온기보다 더 따뜻한 것으로 품이 채워진다.

저희 꼭 같은 생각을 했어요. 그게 기뻐서, ……행복해서요. 이유를 하나하나 열거할 것도 없었다. 한마디면 충분했다.

저도요.”

감았던 눈을 뜨자 수줍게 들뜬 연인의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콧잔등과 두 눈덩이에 쪼듯 입맞추자 그에게서 나직한 신음이 새 나왔다.

당신이 있어서요, 올해도 참 행복했어요. 고마워요, 주노.”

목울대를 울리며 앓는 소리 위를 덮듯 또 쪼옥. 귓가로 새해를 맞이하는 카운트다운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줄어드는 숫자에 맞추듯 한 번, 두 번, 키스가 눈송이처럼 연이었다. 이유를 궁금해할까? 당신이 애틋해서요. 대답을 행동으로 대신했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요. 말로 하지 않아도 그에게 닿길 바랐다.

여행을 떠나던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에셸은 꿈을 꾸었다. 한발, 한발, 꿈을 따라 걸으면 푸른 언덕이, 눈 덮인 산이, 열차가, 바다가, 따뜻한 빛무리 속 등대가, 추억이 끊임없이 파노라마 쳤다. 그러다 꿈속의 필름이 끝나버리거든 먹먹한 상실감이 마음을 바닷물처럼 짜게 적셨다. 그날이 지나면 마법에서 풀린 듯 곧 괜찮아질 거면서, 참 이상해.

며칠 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질 푸름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때론 견딜 수 없는 순간도 있는 법이었다. 당신은 그런 기분 느낀 적 없나요? 궁금해요. 당신 안의 푸름이. 오늘따라 유난히 그에게 붙는다고 자각도 없이 잔 안으로 맺힌 물방울이 기분을 눅눅게 하듯 그를 꼭 껴안았다.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순간에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해요. 그리고 한 해가 시작하는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좋은 일과 힘든 일, 슬픈 일과 기쁜 일 사이에 당신이 있어서……,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주노가 알아주면 좋겠어요. 속삭이는 순간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해피 뉴 이어! 새로운 한 해를 축복하는 인사말이 여기저기서 쉼 없이 몰려왔다. 새해에는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막연한 낙관, 흥분과 들뜸, 내일을 향하는 기대. 여행을 떠날 날이 하루 더 가까워졌어요, 주노. 당신은 3년 전 오늘, 무얼 하며 보내고 있었나요? 그 이야기를 들려줄래요? 그리고 함께 떠날 준비를 해주세요.

머지않아 사라질 푸름이었다. 그 기분을 거스르는 대신 푸른 눈동자가 말갛게 휘었다.

해피 뉴 이어! ……올해도 더 많이 좋아할게요.”

홀리데이 블루스, 아니. 저와 함께 춤을 춰주셔도 좋아요. 그러니 여행의 끝에 또 손잡아주세요.

 

 


올해의 연말은 제법 우울하고 힘들고 기분이 가라앉기 쉬운 시기였는데, 어둠 뒤에는 새벽이 밝아오듯 어서 요지경이 나아지면 좋겠네요.

별개로 해설: 역시 가장 즐겁고 좋았던 순간은 그날이 다가올수록 쓸쓸하고 그리운 추억과 회한을 같이 주는 듯. 오다이바 메모리얼처럼.(오타쿠)

TMI2) 쓰다보니 '댄싱 투 나잇'(by. 뮤지컬 '이터니티)이 좀 떠올랐어요. 블루스와 블루스(스윙댄스) 같은 스펠링 쓰다니 재미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