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였다. 천장에 닿을 듯 창문은 위로 길게 뻗어 있었고 들어오는 햇빛이 도서실 안을 환하게 하였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책에 빛이 닿아 변색되는 일을 방지하도록 햇빛도 조명도 줄여두었지만 입구 쪽이라면 도서실보다는 독서실에 가깝도록 꾸며져 있다.
카르테는 막 입구를 지나 약속 장소로 향하였다. 자리에는 이미 두꺼운 책 한 권을 열중해서 읽고 있는 마일즈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스. 몇 번 불러본 적 없는 호칭에 열중하는 줄 알았던 그가 금방 책에서 눈을 뗀다.
“어, 왔냐?”
“마스가 지금 넘긴 페이지 수로 보아 약 1시간 20분 전에 먼저 와 있었을 것으로 추정, 저는 약속 시간에 늦었습니까?”
책을 향하고 있을 때만 해도 심드렁함에 가깝던 그의 표정은 그녀의 말에 익숙하게 찌푸려든다. 3시 약속이니까 3시 정각에 왔으면 됐지. 이건 저번에 읽던 거 마저 읽고 있던 거다. 안 늦었어. 그 말에도 카르테는 턱에 손을 올린 채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를 취하고는 말을 이었다.
“세간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오는 사람, 정각에 오는 사람, 10분 늦는 사람. 마스가 10분 먼저 오는 사람군에 속한다면 다음부턴 저도 그에 맞춰 10분 일찍 오겠습니다.”
“그럴 거면 약속 시간을 2시 50분으로 잡지 뭐 하러 3시에 잡냐. 그리고 네 정보에는 정정을 요청한다. 세간에는 그 외에도 1시간 일찍 와버리는 녀석이나 약속 시간이 되어서나 출발하는 녀석, 아예 약속을 까먹는 녀석도 있어.”
“아카데미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표본을 수집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군요. 마스는 1시간 일찍 와버리는 녀석에 속하나요?”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은 겸사겸사 일찍 온 것뿐이야. 그래서, 손에 든 게 그거냐? 고개를 끄덕이며 카르테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은 두 사람이 약속한 스터디의 첫날이었다.
「네가 날 도와라.」
그 한 마디에서부터 시작된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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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를 조회합니다. 대상 : 마일즈 번】
【검색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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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3섹터 출신. 지원부. 힐러. 팀 알타이르. 그 외에도 개별 항목으로서 기록된 데이터가 다수. 1대 부회장. 잔소리가 많음. 욱하는 성격. 모두에게 인망을 사고 있는 것으로 보임. 본인은 그 점에 대해 귀찮게 여기는 듯함. 책임감이 강함. 헌신적.
헌신의 배경은?
→난해.
1섹터에서 이능력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전체 인구의 약 1%, 혹은 그 미만. 전장의 판도를 바꿀 힘을 가진 존재인 만큼 그녀도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대화의 경험은 없었다. 때문에 지식으로만 갖고 있던 이능력자와 처음 대화를 한 것은 10섹터의 작은 섬, 아카데미에 와서였다.
「길 잃었냐?」
「지도라면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지식으로서 알고 있던 이능력자와 눈앞에 마주한 이능력자는 생각보다 이미지의 차이가 있었다. 초월적인 능력을 보이수록 결핍되는 인간성, 그러나 마일즈 번은 스스로도 표현하듯 ‘인간적인 이능력자’답게 훌륭한 사회성과 부족하지 않은 인간성을 보이며 집단에 잘 녹아들었다. 그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지 않았던 걸까?
부정, 그는 디메리트가 강한 능력이라고 표현하였지만 그가 가진 능력은 잠재력이 깊고 효용이 무궁하다고 카르테는 판단하였다. 아마도 그는 그저 자신의 결핍된 부분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거기까지 사고가 진행되었음에도 카르테에게 그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이능력자와 인간은 다른가? 누군가는 Yes라고 답한다. 인간을 초월한 능력, 선택받은 인간의 극히 일부, 어딘가에서는 신앙의 대상으로, 어딘가에서는 연구의 대상으로, 혹은 위험분자, 질투의 대상, 지구상에서 여전히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에게 멋대로 분류되고 구별되는 존재.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기준이다. 안드로이드에게 있어 헌신해야 하는 『인류』의 범주에는 이능력자도 포함되었다.
「난 인간이야. 그랬으면 좋겠고.」
긍정. 그는 인간이다. 그 자신조차 확언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카르테는, 그가 어째서 스스로를 가리킬 때에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쪽은 간단한 테스트를 위해 작성한 설문 용지입니다. 우선은 이쪽의 작성을 부탁드립니다.”
종이를 내밀자 마일즈는 눈썹을 가볍게 움직이며 감탄하였다. 오, 생각보다 본격적이네. 안드로이드니까요. 라는 재미없는 답을 하고는 사각사각 펜이 움직이는 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카르테는 눈동자를 가볍게 회전시키며 그가 작성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쁨. 빈도수는 5 정도. 선명도는 7. 카르테는 그가 자주는 아니지만 어렵지 않게 웃던 얼굴을 떠올렸다. 웃을 때면 생각보다 쾌활하게도 보였다. 짜증스러운 듯 찡그리고 있던 눈가가 유하게 풀어져 유순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가 느끼는 기쁨은 어떤 온도를 지니 감정일까. 떠올려보려던 카르테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드로이드에겐 어려운 것이다.
분노. 마찬가지의 빈도수, 마찬가지의 선명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모습은 아카데미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것을 여기서 가리키는 분노와 같은 선상에 둘 수 있을까? 지켜보던 카르테는 최근 겪었던 일을 적는 것을 보고 눈동자를 되감듯 회전시켰다.
기억하고 있다. 쟈라트의 습격을 받은 뒤의 그의 모습. 평소와 다르게 동요가 온전히 드러나 있었지. 그 때의 그는 분노하고 있었나? 동기들 사이에서 뒤죽박죽, 비죽비죽하게 솟아있던 감정들을 떠올리다 다시 고개를 젓는다. 그 때의 감정은 구별하기에는 엉망으로 뒤섞여 분류할 수 없었다.
슬픔. 조금 더 짙은 선명도. 경험 항목에 적히는 내용에 카르테의 시선은 펜에서 마일즈의 얼굴로 올라갔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래로 향하고 있던 그의 눈이 마주쳐온다.
“응? 아아, 뭐 지금도 그렇다는 건 아니야.”
“그렇군요.”
이어서 즐거움. 지금까지 중 제일 높은 빈도수에 살짝 놀라움을 표출했다. 이렇게나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나요? 그러다 이어지는 선명도, 애매한 중간에 눈동자의 크기를 되돌렸다.
“자주 느끼는 것과 선명하게 느끼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군요.”
“그런 셈이지.”
그 때까지만 해도 카르테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평범하게 써나가던 마일즈의 손이 다음 항목에서 멈췄다. 의아한 듯 다시 그의 눈을 향하자 마일즈는 조금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이 부분은 다른 녀석들에게 말하거나 하지 마라. 그 말에 카르테는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Yes. 개인 정보는 함부로 유출하지 않습니다만 보안에 조금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
이제까지 중 가장 높은 선명도를 보이는 항목이었다. 카르테의 눈은 다시 쟈라트가 습격하던 때로 돌아갔다. 그 때의 그는 분노하고 있었나? 반의 정답, 그리고 반의 오답. 사람의 피를 두려워하던 올가와는 다른 경우라고 보아야 할까.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공포를 느끼는 것인지 분명히 하고 싶다. 하지만 카르테는 찡그린 그의 표정을 보고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현 상황에서 필요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 뒤로도 마일즈는 성실하게 설문지를 작성해주었다. 그리고 설문지가 전부 채워졌을 때 카르테는 두 가지 항목에서 갸우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마스는 자신의 결핍된 부분에 대해서 크게 느낀 적이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설문 조사 결과 극히 적은 빈도수를 기록하는 것이 공통적으로 2가지, 선명도의 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최저를 찍은 동일한 감정 한 가지와, 세분화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감정이 한 가지 나왔습니다.”
결과를 그저 덤덤히 읊을 뿐임에도 마일즈의 표정은 귀찮은 듯, 혹은 대수롭지 않은 듯 찌푸리다 풀어졌다. 네 말이 맞다. 쓰다 보니 그렇게 나오긴 했는데, 그건 그냥 경험이 없을 뿐 아니냐? 특별히 내가 그 부분이 결핍되었다고는 느끼지 못하겠는데.
“18년 동안 증오라는 감정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나요?”
“어. 없어.”
“즉답이군요.”
“그렇게까지 내게 악의적이거나 불쾌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말했잖아. 평범한 인생이었다고. 굳이 따지자면 좀 혐오감을 느낄 일은 있었지만 증오는…… 역시 없는데.”
팔짱을 끼고, 검지로 팔등을 툭툭 두드린다. 제법 진지하게 기억을 되짚는 듯 하던 마일즈는 역시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스스로를 무던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감정의 굴곡이 크지 않은 편이다. 증오라고 부를 만큼 강렬한 감정은 경험이 없었다.
“나한테만 물어보는데 칼, 너는 증오가 어떤 감정인지 알고 있냐?”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을 물어보는 건 무의미합니다, 마스.”
내 결핍 감정이 뭔지 찾아준다는 녀석이. 하고 짧게 혀를 차던 마일즈는 굳이 한 번 더 묻지 않았다. 눈동자를 반시계방향으로 몇 바퀴인가 돌리고 카르테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사랑에 대해서도 판단이 애매합니다. 친어머니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나요? 사랑이라는 감정.”
또 한 번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없어. 양어머니 쪽은요? 이어지는 질문에도 그는 고민하는 기색도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없다고 답하였다
“애초에 어머니, 아─ 그러니까 양어머니와는 그렇게 친하지도 않고. 업무 관계라고 해야 하나. 나름대로 신뢰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사랑한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냐.”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거짓 판정, 그의 말은 진심이다. 대화의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는 동안 카르테는 세 번 정도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나 다름없었지만 18년의 일생을 살면서 단 한 번을 제외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보편에 속할까?
“연애적 의미의 사랑은 어떤가요?”
“해봤겠냐…….”
“해당사항 없음에 체크.”
그에게서 돌려받은 종이에 몇 가지 추가 사항을 기록해 넣으며 카르테는 눈동자를 가볍게 회전시켰다. 겨우 한 번의 스터디로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알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떠오른 언젠가의 이야기가 있었다.
“마스는 좋아한다는 표현에도 인색하였지요.”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이상한 것 같잖아. 필요한 만큼은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존재 유무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흐음. 그런가….”
느슨하게 턱을 괸 채 그는 조금 생각에 잠기다 곧 고개를 휘저었다.
“저번에도 말했다만 좋아하는 게 많지는 않아. 그래도 부족할 만큼은 아니야.”
답을 들으면서 카르테는 천천히 눈동자를 회전했다. 좋아한다와 사랑한다의 구분, 사랑한다의 세분화, 그것을 감정적으로, 혹은 뉘앙스나 감에 따라 구별할 판단력은 애석하게도 갖고 있지 않다. 때문에 카르테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지표만을 놓고 분류하였다. 그에게 존재하는 호, 그리고 애정과 존재하지 않는 오, 또한 애정을. 그리고 보편의 저울에 놓고 비교하였다.
도르륵, 다시 도르륵,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라도 날 것처럼 눈동자가 시계방향으로 회전한다. 태엽이 감기듯 몇 개의 원으로만 보이던 붉은 빛이 다시 서서히 속도를 낮추었다. 역시 의문 사항이다. 이 부분, 보다 세부적으로 들어가 분석할 것, 기록.
인간의 감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해보는 일은 이제껏 없었다. 덕분에 무작정 행동을 기록하고 분류하던 작업에 비해 이번 대담은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양질의 자료가 되어주었다. 유익하고 또한 유의미한 시간이었습니다. 인사를 하며 작성된 설문지는 파일에 잘 꽂아 넣는다.
“처음부터 50가지 항목을 전부 체크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판단하여 범위를 천천히 좁혀나갈 요량이었습니다만, 첫 시간부터 상당히 범위를 좁힐 수 있었습니다. 협조에 감사합니다.”
“애초에 도우라고 말을 꺼낸 건 나였고. 그래, 유익했다면 다행이네. 이걸로 뭘 좀 알게 된 거냐?”
“단언의 단계는 아닙니다. 또한 보다 많은 사례를 요구합니다. 즉 다양한 경험이 기반이 되지 않고서는 판단이 어려움, 입니다.”
“다양한 경험이라고 해도 말이지. 아 뭐 나도 그게 그렇게 금방 찾아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언제 이만큼 시간이 지난 걸까. 창문을 넘어 들어오던 햇살은 금빛에서 서서히 짙은 오렌지 빛깔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햇빛이 내려앉은 그의 머리칼은 평소의 갈색보다 조금 더 주홍에 가까워 보였다. 햇빛에 조금 눈을 찡그리면서 마일즈는 여전히 관망하는 듯한 태도였다.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가리키면서도 망설였지.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찾아낸다면, 그 다음에는? 그 뒤에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무엇이라 칭할까. 느릿하지만 꾸준히 회전하던 붉은 눈동자는 그쯤에서 멈추었다. 지금의 탐색은 그녀에게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녀는 그에게 협조할 뿐.
“다음에는 새로운 설문 자료를 준비해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저 마스 사랑함. 아 마스랑 이 관계에 대해 좀 더 느긋하게 풀어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나 한달짜리 뛰고 왔는데 왜 이렇게 못 한 게 많지. 역시 한 달 너무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