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내려앉은 배경을 바탕으로 창가에 두 개의 꽃병이 놓여 있다. 한쪽 꽃병 안을 채운 건 물안개가 떠오르는 옅은 청회색의 안개꽃, 그리고 사이로 해님처럼 노랗게 피어 있는 민들레, 한 자리에 모여서 피기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것 같았지만 꼭 그 위로 햇살을 부숴 그 가루를 뿌려놓은 듯 생기를 머금고 반짝반짝한 빛을 보이는 꽃다발이 처음부터 이렇게 한 쌍으로 존재했던 양 잘 어울렸다.
반대쪽 끝에는 오늘 막 꺾어온 꽃을 장식해두었다. 이슬을 머금어 싱그러운 빛과 함께 풀내음이 묻어났다. 이쪽은 이름이 뭐였지. 분명 그 자리에서 물어봤는데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꽃이란 게 종류란 얼마나 다양하고 생긴 건 또 얼마나 비슷한지.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아직 멀었다. 이따 또 식물사전을 뒤져봐야지.
꽃은 아주 예전부터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좋아해? 응, 좋아해. 예쁘잖아. 그러나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는 사막 한 가운데에 푹 빠진 발처럼 어딘가 버석거리곤 했다. 어디가 예뻐? 어떤 걸 좋아해? 누군가 물어봤다면 분명 말문이 막히고 말았을 것이다.
대답하라고 하면 못할 건 없었지만 그렇게까지 대답해야 해? 그게 의문이었다. 좋아하는 일에는 에너지가 필요했고 그 때의 자신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그러모으기만도 급급해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을 쉽게 놓아버리곤 했다. 매달리고 갈구하고 욕심을 부리는 일이 힘겨웠다.
재화는 유한하다. 특히나 제게 주어진 것은 한참 적어서, 늘 언제 손에 쥔 것들이 틈새로 흘러내려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과 체념으로 범벅되어 애초부터 힘주어 잡지 않았다. 언제든 놓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도록.
사실은 아주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지나고 나서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나고 나서? 아니, 여전히 겁을 안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런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 위치까지 왔다.
꽃으로 이야기를 되돌린다. 꽃은 좋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아름다워. 하지만 너무 약해. 금세 피었다가 금세 져버려. 어째서 예쁜 건 오래 가지 못하는 걸까. ──불안하게.
내가 이걸 좋아해도 괜찮은 걸까. 금세 져버리고 말 것에 마음을 주어도 될까.
나는 또 잃지 않을까.
무엇을?무언가를 소중히 하는 마음을.
「다음 해의 같은 계절에 다시 꽃을 피우는 걸 볼 수 있다는 것도 좋지 않아?」
다음 해에도 루와 함께 꽃을 볼 수 있을까. 이런 말 하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고 슬픈 표정을 짓게 하고 말까. 그치만 생각해버리고 말아.
창문을 활짝 열자 하늘의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반겨주었다. 봄의 밤은 공기가 제법 차가웠지만 이 정도가 딱 좋았다. 오늘도 아주 새까맣고 맑은 밤이었다. 빨려 들어갈 듯한 드넓은 하늘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별이 빛나서, 그렇지. 별이라면 꽃처럼 져버릴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 떠올렸다.
두 손을 모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밀어본다. 그러면 손 안으로 별들이 뿌리는 반짝이가 모일 것만 같았다. 무언가 쌓이진 않을까 기대를 품었다. 정말 쌓이진 않았지만, 대신에 이제는 말하는 법을 안다.
“루의 마법이라면 내려줄 수 있어? 이 손 위로 올려줄 수 있어? 저 하늘의 별들을.”
등을 돌리면 그가 있었다. 눈앞에 그가 서 있는 것부터 때론 놀랍다는 걸 그는 알까? 다가오는 그를 향해 손을 내민다. 그는 터무니없는 제 요구에 무어라 답을 해줄까. 곤란한 듯 굴까. 아니면 언젠가 함께 손을 잡고 밤하늘을 걸었던 때와 같이 기쁨이라는 마법을 선물해줄까.
그와 사랑을 하게 된지 헤아려 반년이 넘었다. 하루가 행복하면 때론 하루가 두려워졌다. 지금 누리는 이 감정의 다음을 알 수가 없었다. 욕심내는 법을 배우고 어리광 부리는 법을 배우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우고 옆자리를 나누었다.
그 하루하루가 마냥 신기하고 새롭고 낯설고, 그만큼 기쁘다가도 종종 오싹해지고 말았다.
“있지, 루. 나는 오늘도 루를 사랑하고 있어. 아마 내일도, 모레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 마음에 영원이란 말을 붙이기엔 무서운 것 같아.”
영원히 지지 않는단 꽃을 품에 안고도 불안했다. 영원이란 감각은 뭐야?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언제 끝나? 앞으로도 계속이라면 언제까지? 세상에 정말 그런 게 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달리기란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방심했다가 예고도 없이 길이 끝나면? 그 잘려나간 길 앞에서 난 어떻게 해야 해.
“그러니까 영원 대신 별이 빛나지 않을 때까지만 사랑해줘.”
저 멀리에 언젠가 끝날 길을 바라보며 안심하고 걸을 수 있게.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조금 일렁거렸다. 이렇게 불안하고 겁 많은 나라도 괜찮을까?
“그렇게 약속해줄 수 있어?”
문득 머리 위가 밝아진다고 느끼며 고개를 들자 하늘에서부터 반짝반짝하게 별무리가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흐른다. 사르르 소리를 내며 손바닥 위로 부드럽게 쌓이는 그것들은 아주 입자가 고운 모래와 같아, 하지만 신기하게도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일 없이 소복하게 산을 이루었다.
정말 손에 별을 가둔 것만 같았다. 감히 영원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이 순간엔 잠깐 믿어버릴 것도 같은. 그래서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신기해. 이 불안까지도 사랑이라고 이름 붙여버리는 게. 깜빡깜빡하게 반짝이는 별을 두고 영원까지의 길이를 가늠하는 게.
“나약하고 불안하고 미숙하고…… 이런 사람이지만, 이런 사랑이지만 그래서 더욱 혼자서는 안 되는 걸까. 있잖아, 루. 언제부턴가 내가 굉장히 약해진 것만 같아. 이제 더는 혼자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그러니까 오늘도 내게 들려줘. 혼자가 아님을. 곁에 있음을.
오늘의 약속을 해줘. 그러면 나는 또 웃을 수 있을 거야. 당신 앞에서만 보이는 가장 환하고 밝은 미소를 또 선물해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