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타닥 위에서 아래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어딘가 심장박동과 닮아 있었다. 자장가로 삼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리듬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수마에 잠겨 몽롱하던 의식의 한 가운데로 차가운 빗방울이 톡 떨어져 잠을 깨웠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자 곤히 잠든 연인의 얼굴부터 시야에 들어왔다. 온기가 와 닿는 귓가에는 규칙적인 그의 심장박동이, 바깥을 향하는 귓가로는 그 박동을 닮은 빗소리가 들렸다. 조금 몸을 비틀어 창 쪽으로 시선을 움직이자 물방울로 얼룩진 유리 너머가 여전히 먹구름으로 새까매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아직 새벽이겠지, 하고 조금 서늘한 방의 공기로 추측을 해보았다.
꿈을 보았던 것 같다. 어떤 꿈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깨어나기 직전까지도 가슴이, 누군가가 제 심장을 움켜쥐기라도 하듯 뼈를 압박하고 숨을 조이던 것처럼 빠듯한 괴로움으로 차올랐다. 형태 없는 감정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잠깐 허우적거리는 사이 순식간에 증발되어버렸다.
아니면 저 빗줄기에 씻겨나갔는지도 모르겠다.
기억나지도 않는, 겨우 꿈에 불과한 것에 마음을 쓰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마른 눈가를 괜시리 손가락으로 더듬다가 몸을 일으켰다. 혹여나 그를 깨울까봐 움직임은 사뭇 조심스러웠다.
짙게 깔린 먹구름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서 슬슬 태양이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듯 바깥이 어렴풋하게 밝았다. 그 덕에 그의 낯빛을 보기 어렵지 않았다. 빗방울로 얼룩진 창은 어슴푸레한 빛 또한 얼룩지게 투영했다. 물그림자가 일렁이는 연인의 얼굴은 평소보다도 유독 창백해 보여 손등을 뺨 가까이에 대보았다. 그가 따뜻하다는 것쯤이야 방금 전까지도 그의 품에 있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만 그저 숨결에 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손등에 닿는 따스한 숨에 미약한 웃음을 그리고 한 번 더 조심스런 움직임을 보였다. 이불에서 벗어나 창가로 가자 빗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겨우내 언 땅을 녹이기 위한 빗줄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치곤 조금 길게 내린다 싶었다. 모처럼 온화한 계절을 맞이하여 꽃이 피나 하였는데 다시 겨울을 되돌리기라도 하려는 걸까. 맞으면 얼어버릴 것 같은 차가운 물방울에 꽃들이 피기도 전에 다 져버릴 것만 같았다.
───봄은 기대하고 있던 계절이었다.
얼마 전 심은 씨앗은 아직 싹을 틀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선 어떤 꽃이 펴? 그가 골라준 씨앗을 작은 화분에 소중히 묻으며 물어보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꽃이 필 때까지 비밀이야. 그렇게 답하였다. 씨앗만 보고서 어떤 꽃이 필지 알 수 있을 만큼의 조예는 갖추지 못했다. 언제쯤 싹이 틀까. 언제쯤 쑥쑥 자라 꽃망울을 맺을까. 그렇게 해서 피어나는 꽃은 어떤 향기를 품고 있을까.
설렘과 기다림, 그리고 그 뒤에 기다리고 있을 끝을 향한 섣부른 슬픔까지도 아직은 기대로 포장할 수 있는 이른 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내려서야.
창에 얼굴을 가까이 붙이자 담벼락을 타고 자란 푸른 잎들이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 늘어진 것이 보였다. 그 끝에 송이송이 달려있던 꽃들도 툭, 투욱, 채 만개하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져 물줄기에 쓸려나가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 쓸쓸한 기분이었다. 봄이 잘려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빗줄기가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눈을 뜨면서 사라진 줄 알았던 막연한 괴로움이, 원인 모를 슬픔이 되살아날 것만 같았다.
그렇지. 무언가 슬픈 꿈을 꾸었어.
부드럽게 질척거리던 땅 위로 빗물이 기어코 홈을 그려내, 고여 있던 물웅덩이가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슬픈 꿈……, 물줄기를 눈으로 쫓으며 어렴풋한 꿈의 궤적도 함께 더듬어갔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꿈을 꾸었던 것도 같다. 바라던 것을 지켜내지 못했던 것도 같다. 힘껏 움켜쥐려던 손에 힘이 풀려, 결국은 손 틈 새로 소중한 것이 흘러내리는 걸 막지 못했던 것도 같다.
심장에 바늘이 하나, 둘, 셋…… 이윽고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이 꽂혀나가듯 고통이 깊이 꿰뚫어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에도 박힌 바늘이 살아있음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양 괴롭혔다.
어째서 이런 꿈을 꾸고 말았을까. 지독히 슬펐던 것 같다.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지금도 떠올리는 것만으로 지끈거렸다. 하지만,
……꿈일 뿐이다.
갑자기 선명해지는 현실감에 꿈속을 더듬는 길은 그만두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서 연인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봄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소리를 내며 그칠 줄 몰랐다. 창문에 제 숨이 하얀 흔적을 그렸다. 그 위로 낙서 같은 걸 하다가 문득 걷고 싶어졌다. 오늘은 혼자 다녀오기엔 쓸쓸한데. 그렇지. 이따 그가 일어나면 같이 산책을 나가자고 할까. 하늘이 멋대로 만든 물길을 뒤쫓아 걸으며 꽃이 진 흔적을 따라가야지. 물길의 끝에 다다르면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때도 자신은 영원하지 않은 꽃에 아쉬움을 느껴버릴까.
기묘한 감상이 봄비 탓인지 꿈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답지 않은 상념을 떼어낸 건 유리창에 댄 피부가 제법 서늘해짐을 깨달으면서였다. 이 정도 한기로 추위를 느끼진 않지만, 있다가 사라지면 온기가 더욱 그리워지는 법이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빠져나간 적 없다는 양 시치미를 떼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가라앉아 있던 그의 냄새가 훅 피어오른다. 바깥 공기로 식은 피부 위로는 그의 열이 닿았다. 따뜻해……. 온기를 찾아 그에게 더 기대자 빗소리를 잠재울 듯 두근거리는 고동이 들렸다. 익숙한 리듬에 안심이 되었다. 동시에 졸음이 몰려들었다. 잠꼬대처럼 들려오는 제 이름에 응, 루. 여기 있어. 소곤소곤 답을 하고 따라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면 비가 그쳐 있을까. 그와 함께라면 어느 쪽이든 ‘좋은 아침’임에 틀림없을 테지만, 오늘은 어쩐지 더 말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맞이하는 아침은 분명 꿈속의 축축함을 전부 말려줄 만큼 따스할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크툴루나 인세인은 미지의 공포와의 조우라거나 무력한 인간이라거나 하다 보니까 괴로운 상황과 마주하기 쉬운데 그건 또 다른 어딘가의 세계선의 두 사람이고 오피셜의 두 사람은 오늘도 변함없이 평화롭다는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