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루
해질녘 너머, 별이 빛나는 우리의 밤
: 루 모겐스
※ 이하의 글은 오퓸님의 coc 시나리오 「해질녘과 저무는 너」의 플레이를 바탕으로 쓰였으며 해당 시나리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
원문 시나리오 : https://opium-poppy.postype.com/post/1686187
“…있잖아, 에슬리.”
붉은 태양을 등지고 그가 이쪽을 돌아본다. 그의 웃는 얼굴은 익숙하고 익숙한 만큼 그녀에게 안도를 주는 것이었지만 이 때의 미소는 그렇지 못했다. 어떤 미소였을까.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건 내뱉을 뒷말에 그녀는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를 죽여줄래?”
봐. 그렇지?
아연한 그녀와 그의 사이를 비집고 바람이 한 줄 불었다. 온화한 봄이라고 여긴 계절이 돌연 한없이 잔혹하고 스산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배제하고 그가 무언가 결정했다.
그게 그녀를 슬프게 했다.
* * *
─
언제나처럼 출장을 마치고 이트바테르로 돌아온 길이었다. 그녀가 제국군의 정기사로서 변방의 변이종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도, 장기 임무를 마치면 이트바테르의 연인의 곁으로 돌아와 느긋하게 빈둥거리는 것도 이제는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의 한 부분이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서둘러야 했다.
일주일이나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와. 그는 단순히 공방 일이 바빴을 뿐이라고 웃어넘겼지만 정말인지 아닌지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아, 에슬리.”
“루! 다녀왔어.”
“어서 와.”
여기저기 눈으로 꼼꼼히 확인을 하자 머리 위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출장에서 돌아온 건 넌데 확인할 대상이 다르지 않아?”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딜 보니 평소의 그여서 안도하려 했지만, 마주친 시선에서 이쪽에 집중하지 못하는 기색에 다시 기묘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일은 오랜만이니까 데이트 할까?” 그래서 들려오는 말에 그저 좋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면 그가 말해주겠지. 내일도, 모레도, 시간은 있으니까. 마음을 두드리는 불안함을 애써 모른 척 했다.
찾아온 새 아침은 맑았다. 어느덧 새벽 공기조차 더 이상 싸늘하지 않게 느껴지는 완연한 봄이었다. 데이트에 들떠 아침부터 부산스레 준비를 하고 에슬리는 그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나와서도 여전히 그는 어딘가 멍해보였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에 빠지는 그가 조금 불만스러웠을까. 혹은 신경이 쓰였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그시 살펴보자 돌아오는 건 해사한 미소였다.
“피곤한 건 아니고? 요즘 공방 바빴다면서.”
“딱히 피곤한 건 아닌데~…? 먼저 제안한 건 나인걸.”
“흐음…, 뭐 그럼 됐어.”
아직은 말해주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나중에 다시 물어봐야지. 급할 건 없었다. 지금 그녀는 이렇게 그의 손을 잡고 있으니까. 석연치 않은 기분을 지우며 에슬리는 그를 캔들 파는 곳으로 이끌었다.
못 보던 가게인데, 그 사이에 생긴 걸까? 가게 앞에 늘어선 가판대에는 동그랗고 네모나고 심플한 디자인의 캔들이 놓여 있었다. 하나 집어서 냄새를 맡자 이곳에 오는 동안 몇 번이나 맡은 향이었다.
“이거 봐, 루. 라일락 향이래.”
이 시기에 피는 꽃이라고 들었어. 덧붙이며 길 위의 풍경을 떠올렸다. 나무마다 옅은 색, 진한 색, 자색으로 송이송이 피어나서 짙은 향기로 존재감을 뽐내던 꽃이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향을 뿌리는구나. 감탄을 하며 지나쳤지. 그도 향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여왔다.
“내일은 네가 라일락꽃을 꺾어오게 되려나?”
“참, 화병 비어있겠네. 응. 그럼 내일은 라일락 찾아볼게.”
이트바테르에 머무는 동안, 그의 방의 꽃병을 매일 새롭게 채우는 건 그녀의 일과 중 하나였다. 날이 갈수록 일러지는 새벽빛을 밟으며 산책을 하고, 산책길에 보이는 꽃을 꺾어서는 화병을 채운다. 그가 깨어나면 일어나 꽃의 이름을 묻는다. 그런 사소한 일과.
사소하고 행복한 일과다. 떠올리곤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를 그리다 에슬리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캔들을 사려고 했지.
“루는 좋아하는 냄새 같은 거 있어?”
“나는… 흐음… 역시 허브 향 쪽일까? 에슬리는 어떤 향이 좋아? 찾아볼게.”
허브 향인가. 역시 그렇구나 하고 수긍한다. 그의 냄새는 멀리서도 선명하게 찾을 수 있었다. 책 냄새, 박하 향, 그의 체취가 뒤섞인 그만의 냄새. 그녀가 좋아하는 향의 질문을 받자마자 떠올린 것도 그의 냄새였다.
“난 몸에 냄새 같은 거 묻히면 안 되지만, 고르라면…… 이쪽?”
제일 좋아하는 향, 아니면 유일하게 좋아하는 향. 옷자락에 코를 박자 머리 위로 즐거운 웃음소리가 흘렀다. 고양이처럼 그러네. 그가 고양이 취급을 하는 건 익숙했다. 그런 취급 할 거면 좀 더 예뻐해 주기나 해. 투덜거리며 조금 더 부비적거렸을까. 그에게 감싸이고 나서야 아, 그렇지. 많이 그리웠던 거야. 뒤늦은 자각이 들었다.
그가 없을 때는 떠올리지 않는 일이었다.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없는 사람을 생각하거나, 생각하며 그리워하거나 하며 감정의 소모를 할 바에야 어서 그의 곁으로 돌아가는 게 효율적이지. 그렇게 옆자리에 안착하고 나서야 차츰차츰 자각이 밀려들었다. 바닷물이 발끝부터 적시며 서서히 차오르는 것처럼 그가 옆에 있음을 실감하고 그를 많이 그리워했음을 실감하고, 푹 젖어드는 감정에 순순히 몸을 맡기고 그에게 기대었다.
“……맨날.”
맨날 그리운 것 같아. 라고 속내를 털어놓는 대신 그의 손끝에 쪽 소리를 남겼다. 아직도 애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건 조금 서툰 일이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노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되돌아오는 그의 애정으로 알아차린다. 뺨에 닿은 키스와 함께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그녀가 잘 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이것도 그리워서? 내 입장에선 즐겁긴 하지만, 오늘 하루 동안 그리움이 가시도록 노력해야겠네.”
애정이 묻어나는 말에 귓가부터 목 뒤로 열이 번졌다. 뜨끈뜨끈한 그곳을 손으로 괜히 문질러 주무르고는 그와 함께 가게를 나왔다.
시간은 아직도 일렀다. 점점 길어지는 낮이 부족했던 두 사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알려주듯 햇님이 머리 위에서 눈부셨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그가 안내해준 카페였다. 자주 들르는 공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위층의 카페로 한 면이 유리로 되어 정경이 예쁜 곳이었다. 이런 데가 있었구나, 감탄을 하며 그가 갖다 준 초콜릿 라테를 휘적였다.
그러다 또 발견하였다. 그의 시선이 어딘지 멍한 것을.
“……예쁘네, 그치?”
의미심장하다고 느끼는 건 그녀가 예민한 걸까. 아니, 그가 이상한 거다. 여전히 그는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콕 찌르고 싶었고 안을 휘젓고 싶었다. 하지만 그 스스로 말해주지 않는다면…, 애써 묻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대신 라테를 더 휘저었다. 진한 갈색의 음료가 컵 안에서 소용돌이를 친다.
“이번에 다녀온 출장은 어땠어? 어제는 정신없어서 얘기를 못 들었네.”
“이제까지랑 그다지 다르지 않아. 서쪽 끝이든 동쪽 끝이든, 이상 기후가 점점 짙어진다는 거랑 변이종이 날뛴다는 거랑.”
말을 돌리려는 기색에 순순히 넘어가 화제를 바꿔주었다. 바꾼 화제 또한 그러나, 가벼운 이야기는 되지 못했다.
“일하는 것도 더 힘들어졌겠네?”
은근하게 들려오는 말투에 담긴 속내는 읽어내지 못할 게 아니었다. 그녀가 읽어낸 것을 그 또한 알았다.
“난 걱정이 돼. 네가 아픈 것도 위험한 것도 싫어. 그로 인해 내가 흔들리게 될 것을 아니까 더더욱.”
사귀기 전에는 나누지 않던 주제였다. 아마 나름의 선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언제였더라. 지나가는 듯한 투로 제국군은 언제까지 할 건지 물어왔지. 처음 한 번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게 몇 번인가의 부상, 거듭되는 부재, 벌어지는 공백과 그 틈새로 쌓이는 걱정이 뒤섞여 어느 순간 하나의 메시지가 되어 날아왔다.
“루가 나로 인해 흔들리는 건 조금 바라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로 인해서 이런 표정 짓게 만드는 건 나도 싫어. ……그러니까 그만 둔 뒤가, 겁나지 않게 되면.”
───이제 와서 그의 불안과 걱정을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진 않는다. 다만 이해하면서도 그의 불안을 지워주기엔 제 불안이 남았을 뿐이었다. 제국군을 그만둔 에슬리 챠콜에게 무엇이 남느냐, 하는. 한 곳으로 마땅하지 않은 제 거주지처럼 아직도 그녀는 발밑이 위태로운 것만 같았다. 영원이 두렵다고 언젠가 그에게 고백하던 날처럼.
그의 불안을 그녀가 알 듯, 그녀의 불안을 그도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털어놓는 두려움에 내가 너를 안심시켜줘야 하는데. 그의 눈이 애석함을, 이어서 대신이라는 듯 짓궂은 표정을 자아냈다. 그래서 에슬리 또한 부러 낸 웃음소리로 넘겼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거지? 루가, 곤란하거나 문제가 생기거나, 무엇이든 혼자서 감당하지 못할 일도,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도 이야기 해주면 좋겠어.”
여기서도 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이따가, 너와 많은 것들을 한 뒤에. 그렇게 넘겼다.
그럼에도 에슬리는 믿고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가 말하는 뒤의 뒤가 또 있을 거라고.
「──나를 죽여줄래?」
믿음은 그러나, 그의 등 뒤로 펼쳐지는 석양과 함께 순식간에 화르르 불타버렸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이 잿더미로 변한 믿음을 흩날린다. 눈앞이 그것들을 따라 잿빛으로 번지는 듯한 착시가 스쳤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무책임한 부탁이라 정말 미안.”
사과를 들으려는 게 아냐. 내가 궁금한 건, 사과 같은 게 아니라──,
“네가 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의 입에서 끝내 철회는 나오지 않았다.
─
저무는 해를 등진 그의 표정은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저곳에 선 것일까. 시선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저 또한 눈앞이 멍해져 그를 똑바로 보지도,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뻐끔거리는 입술이 뭍에 올라온 물고기 같았다. 그의 말이 그녀에게서 숨을 앗아간 것만 같았다. 이상하지. 이런 그녀를 앞에 두고 홀로 초연하고 평온한 그가.
“……해가 다 지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조금 더 같이 있을래? 아, 그렇지. 조금 걸어가면 식물원이 있어. 거기서 잠깐 시간을 보내자.”
어째서 웃을 수 있는 걸까. 어째서 태연하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그와 겨우 한 발짝 떨어져 있을 뿐인데 마치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내게 괴로운 일이 당신에게는 괴롭지 않아? 나만이 괴로운 걸까.
“해가 지고 나면 어떻게 되는데? 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한다고 하면 그 다음은? 이런 얘기 해놓고 태연하게 식물원 같은 델 돌아다닐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 때에도 내가 죽고 싶다면, 아마도. ……그건 상상하기 쉽지 않아?”
상상하고 싶지 않아.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마. 함께 살아가자고 한 약속은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머릿속으로 의문이 끊이지 않고 떠올랐다. 잊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말했다. 이런 방법밖에 모르겠어. 루가 바라서 죽으려고 해? 왜 이유는 말해주지 못해? 이상해. 무서워. 그녀가 모르는 사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겨버린 것일까.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난 사이. 멀어졌던 사이에.
가슴이 지끈거렸다. 어째서, 왜,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생채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통증이 심장으로 스며든다. 언제든 그녀에게 아픔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건 그뿐이다. 그에게서 아픔을 배운다.
내가 옆에 없었던 탓이야. 그의 곁에 있어주었어야 했는데. 지켜주었어야 했는데. ──어째서 그가 이런 말을 꺼냈을까. 생각하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린 이유는 자책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자꾸만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
“식물원, 가지 않을 거야? 그럼 나 혼자서라도 가볼까.”
그가 곁에서 사라지는 아주 무서운 상상이.
혼자라는 단어에 움찔해서 벌어졌던 거리를 한 발짝 다시 채운다. 떠나는 건 싫어. 멀어지는 게 싫어. 머뭇거리다 그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여전히 시선은 들 수 없었다. 그와 얼굴을 맞대는 순간 상상이 눈앞에 벌어질 것만 같았다. 다만 맞잡아오는 온기에 아직 내 손을 잡아주는구나. 안도해버렸다.
“…같이 가줄래? 나, 에슬리랑 더 같이 있고 싶으니까.”
말과 함께 그의 손에 조금 더 힘이 실린다. 귓가로 작게 토해내는 숨소리가 들렸다. 지금 그는 무슨 기분일까. 묻지도 답하지도 못하고 그의 곁을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서로 말도 없이 식물원으로 향하였다.
식물원은 생각보다 더 커다란 곳이었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소리를 내고 있어서 잠시 또 괴리를 느꼈다. 행복한 저곳과 지금 제가 선 곳, 어느 쪽이 현실일까. 내부는 습한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소리 사이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구나. 거대한 식물원이 유지되려면 수로도 필요하겠지. 밀림이나 정글에 들어선 것 같았다.
습한 곳은 익숙하지 않았다. 괜히 목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그녀가 이제까지 보낸 환경은 어느 쪽이냐 하면 오히려 지독하게 건조한 곳으로, 입만 뻥끗해도 입안이 말라 버석버석해지는 곳이어서 도리어 이렇게 축축하고 습한, 물속을 헤엄치는 듯한 곳은 서먹했다.
여긴 축복 받은 곳이네. 그런 비뚤어진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제껏 그녀가 받아온 사랑 또한 이와 같았는지 모른다. 과분한 그의 사랑에 푹 잠겨서 괜찮다고, 익숙해져도 된다고, 그 말에 마음을 놓으려 했던 게 잘못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녀가 발 딛고 살아갈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한 번의 호흡에 한 컵의 수분을 앗아가던 그 퍽퍽하고 마른 삶으로, 그만 동화에서 깨어나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덜 아플 것 같았다. 조급한 비관이었을까. 그러면서도 잡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모순되고 또 나약하기도 하지. 그를 향한 원망과 불안과 기대와 체념과 미련과 수많은 감정들이 질척하게 엉켜든다. 명쾌하지 않은 것은 질색이다. 그러나 질색인 그 안에 스스로 발을 밀어 넣고 만다.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자 키 작은 나무들이 옹기종기 귀엽게 꾸며진 곳이 나왔다. 관상용의 나무들을 주로 기르는 걸까. 이런 귀한 나무들은 볼 일이 별로 없다. 생소한 것들을 눈으로 밟으며 그에게 질문을 하였다. 물어볼 것이 아주 많았다. 무엇보다 알고 싶었다. 그가 자신과의 약속을 포기하면서까지 죽음에 이르려 한 이유를.
“연락 안 되는 일주일 간 뭐 하면서 보냈어?”
“주변을 정리했어. 나와 관련된 사람들이 내가 죽어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일부러 나를 찾지 않은 채 혼자서 끌어안을 셈이었구나.
“너에게만은 이제서야… 뭔가를 말하게 됐지만. 거기에 대해선 또,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못 하겠네. …오히려 너라서 망설이게 된 걸까.”
“루가 죽어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나는 어떻게 정리해줄 셈이었어?”
한쪽 발이 진탕에 들어간다. 얼룩덜룩한 감정이 발밑부터 스멀스멀 타고 올랐다. 정제되지 않고 날카롭게 벼려진 말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래, 정곡이네.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았어. 너만은. ……어떤 방법을 써도 너에게만은 내가 남을 것 같았어.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없지.”
모를 리 없으면서. 왜 내게 그런 말을 한 거야. 그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 게 싫었다. 다른 한 발도 진탕에 집어넣는다.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누구의 목소리? 나의? 그를 빼앗기지 마. 누구에게도, 죽음에게조차. 그의 손을 조금 당긴다. 이쪽을 봐. 나를 봐.
“그럴 땐 말이야. 죽여 달라는 말 대신 다른 말을 해주면 돼. 차라리 루가 그 말을 해주었다면 기뻤을 거야.”
안쪽은 멋대로 검고 질척한 빛으로 칠해지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목소리는 감정 없이 흘러나왔다. 평온하게, 어떠한 높낮이도 없이, 그럼에도 마치 유혹하듯이 속삭여든다. 가늘게 뜬 눈동자로 찡그린 미소가 보였다.
“…어떤 말? 죽여 달라는 말 대신, 어떤 다른 말을 했어야 했지. 차라리 널 속였어야 했을까?”
그게 아냐. 알고 있잖아. 제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마음을 찌르는 것이 선명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빛처럼 형태 없는 날카로운 것이 그를 푹푹 찔러들었다. 거기에 웃는 제가 있었다. 미소가 사라지는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어루만지다 발돋움을 하였다.
입맞춤이 스쳤다. 뱀의 혀가 닿았다 떨어진다.
“루, 죽을 거야? 내가 죽이지 않아도.”
당신이 죽으면 내가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조금 전까지 괴로운 듯 일그러지던 그의 얼굴이 일순에 차분해진다.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바닥을 긁어내는 듯 들렸다. 그 때마다 감추려들던 시선 아래로 쓰디쓴 빛이 스몄다.
“……그렇다면, 같이 죽어달라고 하는 편이 나았어?”
“루가 없는 세상에 내가 혼자 남아서 살길 바라?”
그녀의 말을 듣고 슬퍼하는 그가 기뻤다. 흔들리는 그를 보며 도리어 견고해졌다. 얇은 입술이 달싹거리며 말을 삼켜드는 걸 응시했다. 깜빡이지도 않고 향하는 그녀의 시선을 아주 조금 비끼며 뺨을 만지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커다란 손이 목을 감쌌다. 손바닥으로 고동을 전했다. 두근, 두근. 그의 손 안에 들어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의 바람이, 욕망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게 얼마나 많은지 그를 통해 배운다. 결국 모든 소리를 갈무리하고 온기가 떨어진다. 앞서가는 그에게서 조그맣게 흘러나온 건 무수히 많은 그의 바람 중 하나였다.
“──네가 죽기를 바란 건 아닌데.”
그래서 에슬리는 그의 다른 많은 바람들을 잡았다.
“하지만 루가 죽기를 바란다면 결국 같은 말이 될 거야.”
─
혼자 남길 바라? 그 말에 싫어하는 그가 기뻤다.
같이 죽어줄 거야? 끄덕이는 그녀를 기뻐해주었다.
이 관계는 보통의 것일까. 글쎄, 중요한 건 이 관계가 둘만의 것이라는 것. 아무도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끼어들게 두지 않을 셈이었다. 그가 바라고 그녀가 욕심내고, 그렇게 해서 서로를 향해 뻗어진 손을 다른 누군가가 떼어놓는 걸 에슬리는 용납할 수 없었다.
허락하지 않아, 아무에게도. 이 슬픔도 고통도 원망도, 그에게 줄 것이야. 그리고 그에게 받을 것이야.
……하지만 기묘하지. 에슬리는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기억이 있다. 신이라는 작자의 손에 놀아나, 마치 끈에 매달린 인형처럼 멋대로 움직여지던 기억이.
눈앞의 나무로 만든 조형물들은 그 불쾌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떤 거대한 존재를 표현하고자 발버둥친 그 조형물에, 식물원을 걷는 내내 느꼈던 기시감이 차례차례 조각을 맞추었다.
어째서 그녀의 연인은 갑자기 죽으려는 마음이 들었을까. 그의 죽음이 그에게 가져다 줄 것은, 죽음을 택해 그가 벗어나고자 하려는 것은.
「영생」
이곳에 오는 길에 본 영생원의 설명을 떠올렸다. 제 맘에 드는 인간에게 멋대로 영생을 선물하여, 곁에 둔다…라. 혹시 영생을 얻기 위해선 한 번 죽어야 하는 걸까. 그러고 나서 부활하여 신의 낙원에 불려간다는 걸까. 그래서 혹시 죽고 싶은 충동에───…… 어쩐지 조용하다 싶어 고개를 들자 그가 조형물 앞에서 홀린 듯 그것을 보고 있었다. 조형물에, 아니 조형물이 표현하려고 한 위대한 존재에 이끌리듯 그의 시선이 빨려든다.
그의 자의라 해서 납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자의가 아니라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숭배하고 싶기라도 했어?”
그녀를 두고 다른 것에 몰두하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불쾌해 그를 당겼다. 그가 멋쩍은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끌린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숭배가 아니면, 사랑에 빠지기라도 했어?”
“내가 다른 무언가에 사랑에 빠질 리가 없잖아.”
반문하는 그의 표정은 미묘한 빛이었다. 서운했던 걸까. 혹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스스로의 행동을 떠올린 걸까. 그의 말에 거짓은 섞여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섞여 있지 않을 테지.
그러나 그녀에겐 부정조차 거짓말 같았다. 믿을 수 없었다. 제 구구절절한 불신을 설명할 의지도 들지 않을 만큼. 입을 다물어버린 그녀를 앞에 두고 그가 답답한 듯 앓는 소리를 낸다.
“내가 사랑하는 건 너 뿐이야. 다른 것을 향하는, 다른 감정과 헷갈릴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글쎄. …나도 그렇게 믿고 싶어.”
“믿고 싶다면 믿어주지 않을래? 네가 내 사랑을 의심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싫은데….”
믿고 싶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면, 나만을 사랑한다면 어째서 내 손을 놓으려 하는 거야? 숭배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그를 위해 왜 죽으려 하고 있어? 루의 사랑은 어떤 거지? 어떤 것이기에 내게 죽여 달라는 말을 해? 믿고 싶어. 믿게 해주면 좋겠어.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그냥, 무서워. 루의 사랑을, 생각하는 일이.”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생각할수록 두려워지고 말아.
그의 사랑을 의심하면서도 그의 손을 놓지 못하는 스스로가 우습다. 그녀를 절망으로 잡아끌려는 듯 지독하게 발목을 붙잡아오는 불안이란 손과, 실낱같이 붙잡은 사랑한다는 그의 말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사이에도 두 사람은 식물원을 걸었다. 어쩌면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불안을 덜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대신 움직인다. 그것은 잠시나마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기에 좋은 일이었다.
바람과 달리 식물원은 에슬리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속삭이고 전달하려는 것 같았다. 그녀가 생각하기를 멈추게 두지 않았다.
‘생애에 닥쳐올 위험과 고통을 입에 물어 삼킨다면 [축복]을 뱉어낼 수 있다.’
무엇을 삼키고 무엇을 뱉으란 걸까. 위험과 고통을 감내하는 것으로 축복받게 된다는 걸까. 식물원이 전하는 모든 메시지가 에슬리는 그저 불쾌하기만 했다. 모두 그녀에게서 루를 데려가려는 것만 같았다.
“삼켜내, 삼켜내, 삼켜내!”
“굳이 뱉을 이유가 없잖아!”
시끄러워.
신경질적으로 호수의 물을 쳐낸다. 무엇을 삼키란 거야, 고통을? 축복을? 무엇을 뱉어내면 되지? 그래봤자 모든 것이 당신의 안배일 테지. 처음부터 먹이지 않았으면 좋잖아. 빌어먹을 신의 농간.
그 사이에도 그는 시간을 가늠하듯 몇 번이나 하늘을 힐끔거리며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가끔은 어색하게 목덜미를 문지르고 주먹을 쥐락펴락하기도 하며 의식이 다른 곳으로 쏠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여유 없는 그의 모습에 또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어떻게 하고 싶어? 정말로 나랑 같이 죽을 거야? …내 사랑에 확신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신 따위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도, 그와 함께하는 행복도. 그녀의 삶을 이루는 그의 어느 것 하나도.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그녀와 같은 마음일 때, 같은 생각을 품어줄 때뿐이다. 그의 생각을 알 수 없게 된 지금의 그녀는 도저히 강할 수 없었다.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샌다.
“어째서 루는, 나를 두고 죽겠단 생각을 해버렸을까. 죽음이 루에게 가져다주는 게 뭐야? 아니면,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있어? 나는 루, …당신이 나를 떼어놓고 죽음을 택하려고 한 게, ……슬픈 것 같아. …응, 괴롭고, 또 슬퍼. 그래서 믿을 수 없게 됐어.”
정자에 걸터앉아 그와 그 뒤로 펼쳐지는 풍경을 응시하였다. 조금 지친 것도 같았다. 그를 좋아한다.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길 바란다. 그러나 그도 같은 마음일까? 믿어도 될까? 만일 그의 생각과 그녀의 생각이 다르다면 그녀는 무엇을 믿고 힘내야 할까. 어떻게 강해질 수 있을까.
“……그렇겠지. 애초에 내가,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너를 사랑했다면, 죽음을 바라지도 않았을 테니. 그럼에도 믿어보지 않겠냐는 거였어. 내 선택과, 네 선택을 위해서. ……하지만 어려운 일이겠지. 난 너한테 막연하고 바보 같은 말 밖에 못 하는구나. 나는… 왜 이렇게 약해졌을까.”
뻗어오는 그의 손길에 가만히 눈을 감는다. 부드럽게 피부 위를 쓸어오는 손은 변함없이 따뜻했지만 위로를 얻을 수는 없었다.
“약해도 괜찮아. 그런 루를 사랑해. 하지만, 말해주지 않는 건 역시 속상해.”
그가 약할 때에 그의 몫까지 강해지려 했다. 그러나 지금은 힘이 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그의 손을 붙잡아 기대는 정도였다. 따스하던 손이 멀어진다.
그가 한 걸음 물러난다.
“……내 마음을 자꾸 억지해서 미안해. 그치만, 역시 나는 너를 사랑해. 나의 유일로서. 믿어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이해할 수 없는 일만 하고 있는데도…… 진심은 여전히 이기적이네.”
그래서 그를 따라 일어났다. 결국 그를 쫓을 수밖에 없는 그녀다.
믿지 못하겠다는 그녀를 앞에 두고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가 괴로웠다. 그의 말을 듣는 게 괴로웠다. 그러면서도 그 말에 일어나버리고 마는 건, 그의 말처럼 제 진심 또한 이기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루의 말이, 믿을 수 없으면서도 기뻐. 그만큼 슬퍼서 듣고 싶지 않은데, 듣고 싶어.”
이상하고 비뚤어도 이기적이어도 설사 그릇되어 있다 하더라도 부정하지 못하는 진심이었다.
─
정자를 엄어 카페를 지나 함께 박하차를 손에 쥐고 표본관에 들어섰다. 슬슬 식물원에서 들를 곳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그곳에서 에슬리는 식물원에 들어서 처음으로 푸른 꽃을 보았다. 하필 유일하게 존재하는 푸른 꽃이 장미라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다. 꽃에 조예가 깊진 않지만 그녀도 파란색의 장미만큼은 자연적으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불가능, 혹은 기적이라 한다던가.
두 사람에게도 기적 같은 걸 바랄 수 있을까. ……기적도 신이 주는 것이라면 바랄 게 아니겠지. 마른 냄새로 가득한 표본관 안에서 유일하게 생기를 머금은 꽃을 관찰하고 있자 그가 다가왔다.
“이 식물원의 주인, 파란 꽃은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오히려 너무 아껴서 이렇게 귀하게 보관해두는 건가.”
그러나 그는 장미를 시야에 다 담기도 전에 멈추지 않는 기침으로 주춤하고 물러났다. 미안, 알러지 때문에. 입가를 덮으며 그가 어색하게 멀어진다. 그녀가 알기로는 없던 증상이다. 그것도 오직 푸른 장미만을 대상으로? 저 장미가 무언가 특별한 걸까. 난처한 기색으로 나가서 기다리겠다는 그를 뒤로 하고 조금 더 유리관을 살피던 에슬리는 관 옆면에 붙은 캡션을 발견하였다.
「생애」 완벽하지 않기에 도리어 아름다운 것. ……그렇다면 가시가 없는 장미는 신이 바라는 완벽한, 영생의 자격이 있는 장미인 걸까.
지금의 그에겐 가시가 있을까, 없을까.
밖에서 기다리던 그에게 다가가 고집스럽게 손을 쥐고 다음으로 향하였다. 다음으로, 더 다음으로. 그렇게 향하면 무언가 알 수 있게 될까. 알게 되면 그 다음은? 그를 납득해버리기라도 할까. 천장을 올려다보면 유리로 된 돔이 보였다. 반짝반짝하고 얇은 유리창 위로 뉘엿뉘엿하게 길고 붉은 해의 꼬리가 덮였다. 저 꼬리가 모두 감겨 사라지면, 그도 사라질까? 식물원을 도는 이 여정이 그녀에게, 그리고 그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고작해야 해가 완전히 지기 전까지의 유예? 그렇게 생각하면 걸음을 멈춰버리고 싶기도 했다.
손에서 느껴지는 그의 생생한 온기가, 손바닥 너머로 희미하게 전해지는 맥박이, 하나하나 애틋하고 소중하게만 느껴진다. 동시에 애틋하고 소중하기에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힘주어 잡으면 어떻게 될까. 부서질까? 그럼 반대로 깨질 듯 구겨질 듯 살며시 쥐고 있으면? 그랬다간 놓칠지도 몰라.
……소중한 것을 소중히 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소중히 한다는 마음만으로는 어쩌지 못할 만큼.
그는 어째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든 걸까.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와 걸음을 나란히 하는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유가, 이유라고 말하는 변명이 필요했다.
그가, 함께 살아가기로 한 약속을 저버린 타당한 이유를.
그녀의 손을 놓아버린 채 죽으려고 한 이유를.
생각할수록 고통스러운 일이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얼마나 쉽게 바뀌는지 에슬리는 모르지 않았다. 영원 같은 것은 없다. 사람의 감정이란 얼마든지 변덕스러울 수 있고 유통기한도 있다. 그러니까 언제나 행복 너머에 불안이 있었고 기쁨 아래에 두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내일은 아직 괜찮아. 그렇게 하루를, 다시 다음 하루를 위태롭게 이어나갔다. 그렇게 쌓아올리는 내일의 너머에 어쩌면 영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을 뻔했다. ……믿을 뻔했다.
금이 간 믿음이 아프다. 아파서, 괴로워서, 에슬리는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으려 했다. 영생? 누군가 루에게 영생을 준다고 했어? 영원한 삶을 부여 받아 신의 장식품이 되는 길을 피하기 위해 죽으려고 하고 있어?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될까.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조금 덜 아파도 되는 걸까.
잡은 손에 깍지를 끼고 천천히 침엽수원의 안을 걸었다. 이곳은 익숙한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잣나무, 섬잣나무, 피라밋은행나무, 구상나무, 나무에 걸린 이름표들은 생소한 게 더 많았지만 형태는 곧잘 보던 거다. 사시사철 눈이 멎지 않던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있지, 루. 가시밭길이 아닌 인생은 어떤 걸까. 고통이 없으면 고통스럽지 않은 삶을 알지 못해. 아무런 흠 없는 그것을 두고 완벽이라고 한다면 내겐 굉장히 서먹하고 먼 이야기일 거야. ……루는 말야, 영생이나 완벽 같은 거, 관심 있어?”
있지, 루. 나만 이곳에 그리움을 느끼고 있을까? 함께 걸음을 맞추며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답을 들려주는 목소리는 조금 지친 것도 같았다. 어쩌면 그녀보다 더 오랜 시간, 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했던 것처럼.
“감정도, 관계도, 목적도. 시간이 유한하기에 의미가 깊어지는 것들인데. 내 삶은 무한한 채로 내가 가진 것들만 점차 끝나간다면… 그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생각하기엔 아주… 슬프고, 외롭고, 공허한 기분일 거야. 그런 게 완벽이라면 역시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이어 그는 느릿한 미소를 그려보였다. 영생이나 완벽을 나에게 대입하고 싶냐는 뜻이라면… 직전에 한 말로 대답을 대신할 수 있겠네.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에 진저리와 같은 느낌도 엿볼 수 있던 것 같다.
“루의 대답을 신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네.”
“그렇지. 신이란 족속들은 모두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는 그것을 베풂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우리들 나름으로, 그냥… 완벽하지 않은 삶이라도. 의미를 알고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우리들끼리만. 그렇게…”
그의 생각이 그녀의 추측과 다른 것은 기뻤지만 그의 본심과 신의 농간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그러면 어째서, ……당신이 바라는 건 무엇이야?
그 때였다. 나무뿌리에라도 걸린 것인지 그가 비틀거리다 손바닥으로 거친 나무 기둥을 쓸었다. 살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축축한 나무 냄새 사이로 피 냄새가 섞인다. 괜찮아? 하고 허둥대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통증이 없는 몸이라도 상처는 상처다. 어서 치료를…… 그런 에슬리의 생각이 무색하게 눈앞에서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그의 마법이 아니었다. 이 광경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 않다.
그녀에게서 숨기려는 듯 주머니에 손을 감추는 그의 표정에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속이 울렁거려. 심장이 불안하게 뛴다. 이미 늦었어? 신이 당신을 가졌어? 나에게서 빼앗아? 멋대로, 또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는…… 그저 무력하게.
“큭!”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차오르는 불쾌를 견디지 못하고 나무를 발로 찬다. 쿵, 소리가 나며 나뭇잎이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신은 참 잔인하지.”
숨기기를 포기하였는지 체념 섞인 그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끓는 감정을 부추겼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짐작하는 것과 직접 목격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그 때까지의 비참함이나 슬픔, 불안, 두려움, 그런 감정들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대신 그 자리에 거센 분노만 남는다. 할 수만 있다면 식물원을 이대로 무너트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 식물원은 뭐야? 그 신을 모시는 사원이라도 돼? 여길 무너트리면 그도 조금은 불쾌해할까? 어떻게 하면 이 빌어먹을 신을 엿 먹일 수 있을까. 차라리 분노한 신이 나를 죽여 버리기라도 하도록. 발버둥치는 나를 보며 또 머리 위에서 웃고 있어? 이런 나를 보는 게 당신은 재밌는 거야?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정처를 잃은 걸음으로 수원 안을 배회하였다. 그러다 결국 나무에 이마를 박고는 그대로 기댄 채 힘겹게 숨을 삼켰다. 내뱉는 숨 사이로 상소리가 엉켰다. 그런 그녀의 어깨 너머로 조심스런 기척이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에슬리. …미안해.”
그의 사과를 듣는 게 더 견딜 수 없었다. 사과에 섞인 인정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미안해하는 그를 보는 게 더 속상해서, 어깨 위로 닿는 따스한 숨결에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돌려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사과하지 마. 루가,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 정말……, 루가 사과할 게 아냐. 하나도.”
어떻게 해야 할까. 필사적으로 생각하려 하면서도 생각보다 먼저 좌절감과 무력감이 발목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주저앉히려 했다. 절망이 등골을 타고 올라와선 머리를 누르는 것 같았다. 그 오싹하면서도 익숙한 감각에서 벗어나고자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무너질 것만 같은 그녀를 이번엔 그가 두 팔로 지지해 더욱 깊이 안아주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처했더라도,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건… 역시 내 마음이 강했더라면 괜찮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네가 있는데도 이렇게나 죽고 싶다니, 정말 이상해.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찌푸리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들끓던 감정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이상해,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에게 겨우 제가 느낀 위화감을 인정받았다. 그도 같은 위화감을 안고 있다는 것만으로 에슬리는 무너지려던 다리에 힘을 주었다.
껴안은 품은 여전히 이렇게 따뜻했다.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약한 루도, 괜찮다고 했는걸. 루가 약할 때엔 내가 힘을 내면 되니까. 루는 내 곁에서,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있어주면 좋겠어.”
“네가 무너지지 않도록.”
약한 건 책망할 게 아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고 있다. 무르고 쉽게 변하고 때론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늘, 새롭게 바라는 것이다. 내일 조금 더 견고해지길, 내일도 변함없길.
“루가 만약 정말 죽길 바란다면, 그게 루의 본의라면 말야. 들어주려고 했어. 나를 두고 죽으려는 루와는 같이 살아갈 수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닌 것 같아. 나는 루에게 죽지 말라고, 살아달라고 매달리고 싶어.”
내 손을 놓아버리려는 당신을 내가 어떻게 붙잡을까. 나를 놓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하던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지만 그게 당신의 본의가 아니라면 말이지. 실은 당신 안의 진심이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면. 옷자락을 쥐고 그의 품 안에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장 좋아하는 향, 그의 냄새, 이것은 내 것이야.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아. 설령 상대가 신이라도.
“에슬리, 난 여전히 죽고 싶어. 그렇지만… 그렇게 말해주는 너라서 사랑해. 내가 죽지 않기를, 함께 있기를 바라주는 너라서.”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그녀 또한 힘주어 안았다. 그가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응. 나는 여전히 약하고, 죽음을 바라고 있지만. 살아달라고 해줘. 욕심을 내줘. 내가 사실은 정말 살고 싶었다고, 너와 함께이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깨달을 수 있도록.”
웃어주었다. 욕심내달라고 해주었다. 그러니까,
“나도 사랑해. 그리고 루의 말도, 의심하지 않아. 내가 루를 잃지 않도록 해줘. 욕심내도 괜찮다고, 이 진심이 이기적인 것이라 해도 내 이기심으로 당신을 살렸을 때에 또 한 번 함께 살아가자는 말을 들을 수 있게 해줘.”
내일을 위한 새 약속을 할 수 있길. 바람을 갖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간절함은 언제나 변함없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이 간절함을 누구에게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게 가시밭길을 깔고 내 것을 앗아가려는 신에게? 가당치도 않지. 그렇다면 누구를 붙잡고 염원해야 할까.
그의 손에 깍지를 끼고 손가락과 손가락이 서로 얽혀드는 감각을 하나하나 선명히 새기며 조심스럽게 힘을 주었다. 신도 믿지 않는 그녀가 무언가를 바라고 염원하며 기도할 상대가 있다면, 지금 이 손의 주인뿐일 것이다.
─
식물원에 들어설 때부터 잡았던 손은 마지막 장소로 향하면서도 여전했다. 나누는 체온이 함께 있자는 약속을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 유예도 이제 끝이었다. 그는 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죽고 싶단 충동에 시달릴까. 그녀에게 죽여 달라는 말을 하다가 울 것 같은 표정이 될까. 그녀는……, 그를 죽여야만 할까.
그렇게는 두지 않을 것이다. 결코, 절대로 그를 죽게 두지 않을 것이다. 의지만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란 걸 알면서도 에슬리는 의지를 다졌다.
장미원으로 들어가자 형형색색의 장미들이 생기를 가득 품고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어디로 시선을 두어도 화려한 드레스들이 춤을 추는 무도회장이 따로 없었다.
장미들의 무도회장에 사람은, 관객은 기묘하게도 두 사람뿐이었다. 분명 입구를 들어설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어울려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곧 폐장 시간이라 그런 걸까.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춤을 추는 장미들의 발소리는 인간이 듣기엔 너무나 섬세한 소리여서 덕분에 고요한 장미원을 함께 걸었다.
장미는 화려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대신이라는 듯 향은 거의 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만큼 향을 지운 것일까. 바람이 불 때마다 치맛자락이 나풀거리는 마냥 흔들흔들한 장미들을 응시하던 에슬리는 적, 백, 흑, 자, 홍…… 그 사이의 청을 발견하였다.
「생애」 그렇게 팻말이 꽂힌 장미는 여전히 뾰족한 가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가시는 불완전함을, 생애의 고통을 상징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완벽을 이루려는 그에게 가시란 어떤 존재일까. ──불필요한?
알러지인가. 그렇게 말하며 몇 번 기침을 하던 그의 모습이 기억에 스친다. 전에는 없던 이상한 증세, 파란 장미를 앞에 두고는 유독 심해졌었지. 그 거부반응이 장미가 아닌 가시에서 벌어지는 것이라면? 하지만 아직도 조금 헷갈리는 일이었다. 그의 안에 가시가 남아 있어서 지금의 그는 ‘불완전’한 것인지, 그가 가시 없는 파란 장미가 되기 위해 가시를 거부하는 것인지.
“루, 있지. 장미 가시 같은 거 삼킨 적 있어?”
“가시? 아니? 그런 걸 먹을 일이 없지.”
그렇다면 역시 거부하는 쪽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그에게 가시를 주어야 할지 여전히 조금 미궁이었다. 삼키게 하라는 말에 확신을 갖지 못한 쪽이기도 하다. 시험 삼아 그의 손등에 가시를 슥 찔러보자 그는 그저 멎지 않는 기침과 함께 괴로워할 뿐이었다.
“에슬리? 왜 그래? 설명해줄 수 있어? 아니, 일단 나가서… 괜찮지?”
“아, 응.”
해가 빠르게 저물고 있었다. 이미 머리 위는 어둠이 깔려들었다. 그가 초조한 만큼 그녀 또한 초조했다. 어쩌면 이것으로 그를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 서둘러야 해. 어서.
그와 함께 식물원을 나와, 강변의 다리에 올랐다. 저물어가는 태양, 깔리는 어둠과 남은 빛, 주홍빛으로 넘실거리는 강물 위에 그와 나란히 선다. 지나치게 선명한 빛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잊지 마. 내일이 되면 다시 찾아올게. 그렇게 태양이 미련을 강물에 씻어 내리려는 것만 같았다.
“에슬리, 날 죽여줄 거야?”
눈앞의 그도 그랬다. 웃는 얼굴 너머로 괴로움이 뚝뚝 흘러넘쳤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괴로움이, 충동에 반하는 미련이, 강물을 물들일 것만 같았다.
그의 안에 있는 그의 진심은 지금쯤 어떤 색을 하고 있을까. 흐릿한 시선을 마주하고 손짓으로 가까이 와달라고 부른다. 의아함을 안고 그가 가까이 오면, 장미에서 떼어낸 가시를 제 입술에 물어 그를 당겼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 한 번만이 아니었다. 그가, 제 죽음을 입에 담을 때마다 그런 못된 소리는 나오지 못하게 할 거라고 몇 번이나 입을 막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내 하지 못했다. 손을 잡는 것 이상으로 그에게 무언가를 하기가 괴로웠다.
루가 많이 미웠어. 원망했어. 그래서 키스도 하고 싶지 않았어. ───지금은 아냐.
왕자님에게 걸린 나쁜 마법은 키스로 풀릴 수 있을까? 동화책에서는 늘 그렇게 풀렸는데. 사과를 잘못 삼킨 공주님도, 물레에 손가락이 찔린 공주님도, 목소리를 잃은 공주님도, 모두모두. 루도 구해낼 수 있을까? 나는 절대로, 루를 죽게 두고 싶지 않아.
입술을 맞대고 그의 벌어진 틈으로 가시를 밀어 넣는다. 신중하고, 또 조심스럽게. 그가 기침으로 뱉어내기도 전에 입안을 다치지 않도록 천천히, 목 안쪽까지 파고들어 그에게 가시를 넘기게 했다. 혓바닥 아래를 꾹 눌러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감았던 팔을 풀고 떨어진다.
장미는 향이 나지 않는다. 가시는 아무런 맛도 나지 않았다. 그럼 혀끝에 감도는 이 맛은 그의 맛일까. 혀를 굴리며 에슬리는 조심스레 그의 반응을 살폈다.
가시가 넘어가고 나서야 그녀와 떨어져, 그는 제 목덜미를 만지며 연신 기침을 하였다. 단순한 알러지 반응보다는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오는지 허리를 숙이고 강물을 향해 토해낼 듯 턱 막힌 기침이 이어졌다. 그러다 입안에서 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후두둑 강물로 떨어진 건, 파란 장미 꽃잎이었다.
후두둑, 후두둑…….
주홍빛으로 물든 강물 위로 새파란 장미 잎이 둥실둥실 떠내려간다. 장미 잎이 녹아들 듯 강물은 점차 점차 파랗고 까만빛으로 바뀌어갔다.
수평선 끝에 걸려 있던 해가 마침내 다 저물었단 의미다.
한참을 기침하던 그는 허리를 펴자마자 저문 해에 당황하며 입안에 남았던 가시로 손가락을 찔렀다. 당연하게도 손가락 끝에 붉은 핏방울이 맺히고 ……아무는 일은 없었다. 그 현상을 목도하고도 잠시 눈을 의심하듯 멍하니 있던 루는 이윽고 겨우, 에슬리를 바라보며 우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에슬리, 내가 너한테 죽여 달라고 했었지? 취소한다고 하면, 아니… 그냥 내가 잠깐 미쳤었던 것 같다고 하면, 역시 화내려나?”
그 모든 광경을 숨까지 멈춘 채 지켜보던 에슬리는 어딘지 혼날 걱정을 하듯 난처한 미소를 그린 그 앞에서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고요한 다리 위로 기쁨과 안도 섞인 높은 웃음소리가 번진다. 그녀의 목소리에 흔들리듯 어느새 장미꽃잎을 전부 삼킨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겨우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안도할 수 있었다. 이 웃음으로 이제껏 짓누르고 발목을 당기던 모든 질척한 것들을 털어낸 에슬리는 가벼워진 몸으로 애틋함과 애정을 담아 그에게 달려갔다. 달려가 그 품을 힘껏 껴안았다.
“화는 나중에, …좀 더 생각해볼게. 낼지, 말지. ……지금은 그것보다 안아줘. …꽉 안아줘.”
“……응, 에슬리.”
대답과 함께 강하고 단단한 힘이 그녀를 푹 감싸 안았다. 허리에 감긴 팔은 그녀를 제 품에 가두는 데 스스럼이 없었고 그렇게 해서 나누는 온기는 안도를 가져다주었다. 아주 당연한 것이면서 잠시 불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되찾은 것이었다. 그의 애정과 그녀의 애정이 오롯이 맞물려 하나가 된다. 맞닿은 심장이 같은 박동을 전해준다.
그에게 잠기는 이 순간이 꿈만 같아 에슬리는 조금 더 그 품에 파고들었다. 그의 냄새를 맡았다. 하루가 무척 길었던 것만 같지. 잠시나마 영원히 오늘이 끝나지 않기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바랄 수 있게 되었다. 내일을. 그와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무슨 이유에서든간에 너에게는 잔인한 말을 해서 미안해.”
사과에 고개를 젓지는 않았다. 잔인한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어서 위로해달라고 마주한 시선을 응시하였다. 눈동자에 비치는 그의 표정에는 언제나 그리던 애정이 깃들어 있어서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이마에, 눈꺼풀에, 입술에 차례차례 그의 온기가 스친다.
“다시는 너한테 이런 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이런 이유로 죽음을 결심하지 않겠다고도. 혹여 내가 그렇게 말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믿지 말아달라고도… 다시 한 번 너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다짐할게.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너와 함께 있어서 나는 오늘도 행복해. 사랑해, 에슬리.”
시야 가득 구김 없는 그의 미소가 차오른다. 환하게 웃는 그의 너머로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달이 떠오르고 별이 반짝인다. 하늘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언젠가 저 별도 빛이 끝나는 날이 오겠지.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응당 찾아오는 끝이다. 그 끝이 때론 쓸쓸하게도, 서글프게도 느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것들은 오늘에 충실하고 내일을 기대하는 게 아닐까? 언젠가 찾아올 끝 앞에서 웃을 수 있도록.
두 사람도 언젠가는 끝을 맞이하겠지. 찾아올 끝 앞에서 울지 웃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알 수 없기에 기대를 하고 희망을 품는다. 두 사람이 함께 맞이할 끝이 결코 덧없이 않으리라 믿는 것이다.
머리 위로 천천히 돌아가는 밤하늘을 이고 에슬리는 그를 따라 환하게 웃었다.
“사랑해, 루. 루의 그 말이 오늘의 내 행복이야. 그러니까 내일이 오거든 또 다시 말해줘. 내일치의 행복을 안겨줘.”
그렇게 해서 매일매일 사랑을 나누자. 별의 빛이 다하는 날까지.
제목 고민했는데 가시 입맞춤으로 할까도 했는데 제목부터 스포를 해버리면 안 되니까. 그래서 제목... 한참 고민했어요(못 짓는 사람)
그보다 늘 시나리오 제목이 예뻐서 굳이 새 제목을 지어야 하나도 싶지만, 그 시나리오를 플레이 한 우리의 이야기니까.
삽입된 음악은 실제 플레이 중에 들었던 음악입니다. 마침 앞에서 캔들 샀네. 서로 의도하지 않았는데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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