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하며 루가 가져온 건 다이어리였다. 매일매일 질문이 하나씩 있는, 두 사람이 함께 쓰는 다이어리. 페이지를 한 장 넘기면 새로운 질문이 있어서 두 사람이 각자 질문에 대한 답을 적으면 된다고 했다.
헤에, 재밌겠다.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글씨 서툴러도 놀리면 안 돼. 그녀의 말에 루는 물론이야. 하고 웃어주었다.
질문 하나에 답은 두 개. 그 밑으로 조금 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보기도 한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다이어리에 적힌 그의 말을 보는 건 신선하고 새삼스러워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다이어리를 놓아둔 탁자 앞을 서성이며 왔다 갔다 해버렸다.
다이어리를 넘기고 있으면 오래 전 주고받았던 편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니면 교환 일기. 목소리가 아닌 문장으로 접하는 그는 또 다른 면이 보였다. 가령 글씨체가 어떻다거나, 옆에 어떤 낙서를 그려 넣는지 따위.
사랑해. 적힌 문장은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애틋해져 글자 위를 손가락으로 한참 문질렀다. 이 말을 적을 때의 루는 어떤 표정을 지었어? 보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고, 반대로 눈을 감고 상상하게 만들기도 했다.
『오늘 밤 통화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오늘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야 당연히 루겠지. 애인이랑 적는 다이어리인데 여기 설마 다른 사람 이름이 나올까. 아, 하지만 이유가 있어 가족이나 친구를 떠올리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나는 루지만.’
하지만 그냥 루라고 적는 건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에슬리의 머릿속에 스친 건 실전화기였다. 언제였더라, 그런 장난감도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들을 당시엔 장난감이네. 하고 넘겼던 게 이럴 때 떠오를 줄은 몰랐다.
「있지, 루. 이따가 밤에 옆방에서 해봐도 돼?」
끄적끄적. 다이어리에 적어놓고 실과 종이컵을 찾았다. 2층 공간에선 찾기 어려워 1층까지 내려갔다 와야 했다. 그 다음엔 종이컵을 뚫고 안에 실을 잇고, 완성된 전화기는 아주 엉성하고 간단한, 딱 실전화기만큼의 모양이었다.
“뭐 이거면 됐지.”
혼자서는 잘 되는지 시험해볼 수 없는 게 유일한 단점이었다. 하지만 절대 둘이서 해야 한다는 게 반대로 맘에 들기도 했다. 그는 다이어리를 읽었을까? 페이지를 열자 유려한 글씨체로 담긴 문장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언제였더라. 지나치게 흘려 쓴 나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그의 메모를 들고 가 읽어달라고 한 적이 있었지. 그 때의 멋쩍어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에슬리는 혼자 웃었다. 그 뒤로 그녀에게 줄 때는 제대로 읽을 수 있게 써주었지.
「창문 밖에 고개를 뺀 채 종이컵에 대고 소근거려볼까?」
그의 다이어리를 확인할 즈음엔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손님방으로 달려가 창문을 활짝 열고 걸터앉아 옆방의 창문을 톡톡 두드린다. 곧이어 옆방의 창문이 열리고 그녀를 발견한 그는 보자마자 눈살부터 찌푸려왔다. 금방이라도 아래로 떨어질 듯 대롱대롱하게 위험한 그녀의 자세 탓이겠지.
괜찮아, 괜찮아.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지지만 챠콜은 떨어지지 않으니까. 16세 왈가닥 시절의 말투를 하고 에슬리는 그에게 전화기의 한쪽을 내밀었다. 그리고 실이 팽팽히 당겨지며 그가 종이컵에 귀를 갖다 대자마자 제일 먼저 속삭여주었다.
“좋은 밤, 루. 있지, 오늘도 사랑한다고 말했어? ……사랑해.”
밤의 마력이라는 걸까. 어떤 분위기나 무드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 말이 흘러나왔다. 자기가 낸 소리에 혼자 놀라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면 이번엔 그녀 쪽에서 종이컵에 귀를 붙인다. 실을 타고 전해질 소리는, 진동은, 얼마나 또 달콤하게 이 밤을 적셔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