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입김을 내뱉자 창가에 하얀 김이 서렸다. 그 위로 뽀득뽀득 낙서를 한다. 하트를 그렸다가 그의 이름을 적었다가 아, 뒤에서 그가 오는 기색에 후다닥 소매 끝으로 지워버렸다. 다시 깨끗해진 창 너머로는 까만 하늘로부터 송이송이 떨어지는 함박눈이 있었다.
언제나 겨울인 이 지역은 눈구름이 없어도 눈을 쏟아내는 마법이라도 걸렸는지 별빛과 눈이 한 풍경에 담겨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후, 숨을 내쉬자 다시 창에 김이 서린다. 이번에는 창에 웃는 얼굴을 그려 넣자 그녀의 뒤에 앉은 그가 팔을 뻗어 껴안아왔다.
“오늘 중으로 마차가 오는 건 무리래.”
“역시? 그럼 이제 어쩌지. 꼼짝없이 여기서 해 뜰 때까지 있어야 하나.”
“저쪽에서 임시 숙소를 제공해준다던데.”
어떻게 할래? 물어보면서도 그는 별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허리에 단단히 두 팔을 감고는 조금 더 몸을 붙이고 뺨에 입 맞춘다. 저기, 아직 다른 손님들도 있는데. 목소리에 투덜거림을 담으며 에슬리는 그의 입술이 닿은 곳부터 붉어지려는 기색을 애써 숨겼다. 그는 능청스럽게 으응? 하고 웃을 뿐이었다.
함께 오로라를 보러 가기로 한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고향이기도 한 엘버, 그 중에서도 두 사람 다 가본 적 없는 먼 북쪽 끝까지 향했다. 이런 오지, 아무도 없을 줄 알았지만 어디서든 인간은 악착같이 살 구멍을 찾는지 막상 도착한 땅은 옹기종기 모인 작은 촌락에 번듯한 관광책이 있었다. 조금 아연하게 안내를 따라서 오로라를 보기 가장 좋은 곳이라며 흰 산을 올랐다. 그리고───,
“오로라, 예뻤지.”
눈에 새겨버릴 듯 넋을 놓고 보았다. 가타부타 미사여구를 붙이기보다는 순수하게 나온 감상에 어깨에 기댄 그의 고개가 동의를 표하며 끄덕여진다. 무어라 더 형용하기 어려운 빛의 향연이었다. 머릿속까지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를 견딜 가치가 충분한. 마법이 아니라는 점이 더 놀라웠다. 꼭 빛이 춤을 추는 것만 같았는데.
루, 마법으로 저런 것도 할 수 있어? 마법만능주의와 같은 그녀의 질문에 그는 글쎄, 하고 말꼬리를 늘려 답했다. 해본 적 없어서 모르겠어. 덧붙은 답에는 그럼 해달라고 할까, 아니면 다음에 또 보러 오자고 할까. 그녀도 고민하느라 대답이 길어졌다.
소소한 트러블은 그 다음이었다. 눈 내리는 산은 기질이 변덕스럽다더니, 갑작스레 눈 폭풍이 찾아온 것이다. 방금 전까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아름다웠던 풍경은 순식간에 이 세상을 떠나게 해버릴 듯 무서운 것으로 돌변하였다. 차라리 변이종의 상대가 낫지. 자연 앞에선 그녀도 별 수 없다고 그를 꼭 붙잡은 채 폭풍이 가시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눈 폭풍은 끝났지만 문제는 그 덕에 마중 나오기로 한 마차들의 발이 묶여버린 일이다. 임시 숙소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다 에슬리는 고개를 저었다. 전보다 나아졌다 해도 사람이 모이는 곳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 허름한 역에서 밤을 지새우는 게 낫지. 에슬리의 말에 루는 그래, 그러자. 선뜻 승낙해주었다. 이곳에 남겠단 두 사람의 말에 가이드는 잠시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기다리는 다른 손님들 덕에 장작이며 먹을 것이며를 허둥지둥 일러주고 떠나갔다.
“이제 단 둘이네.”
“응, 둘이야.”
역 안은 조용했다. 그렇게 따뜻하진 않았다. 아무리 가운데 화롯불이 있다지만 극지방의 밤을 견디기엔 연약하기만 했다. 그래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춥진 않았다. 두 사람 다 체온이 높은 편이란 것과, 그런 두 사람이 꼭 붙어 있다는 것으로. 담요를 겹겹이 두르고 화롯불에 물을 끓여 찻잎을 우렸다. 물이 끓으며 피어오르는 수증기 덕에 다시 뿌옇게 된 창문을 닦고 모든 소리를 잡아먹어버릴 듯 세상을 고요하게 덮는 눈을 구경하였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세상에 둘만 남겨진 것 같아.”
그래서 좋네. 그녀의 뒷말에 정수리 위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그래서 좋아. 동의에 만족하며 에슬리는 머리를 그에게 기대었다. 두근두근하고 심장이 뛰는 소리가 전해졌다. 다른 잡음은 저 새하얀 눈에 전부 먹혀버리는 가운데 오직 그의 숨소리와 그녀의 숨소리, 그리고 고동소리만이 남았다. 이 세상에서 저희 둘이 살아있다는 증거만이 또렷한 기분이었다. 함께 살아가자고 한 약속의 무게만이 남은 것 같았다.
사랑이 차오르는 건 아주 작은 불씨만으로도 충분했다. 문득 이 순간이 더없이 애틋해진 에슬리는 그에게 기댄 채 슬쩍 턱을 들어 입술이 닿는 곳에 잔 키스를 남겼다. 사랑해, 루. 속삭임은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행동에 껴안은 팔에 꾹하고 조금 더 힘이 들어간다. 맞부딪쳐오는 입술에 행복도 함께 채우며 에슬리는 입꼬리를 허물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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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꿈을, 꿨어.”
잠깐 어리둥절할 뻔했다. 잠든 새에 집에 돌아온 건가, 하고. 아마 눈 뜨자마자 그녀를 녹여버릴 듯 찐하게 내리쬐는 태양빛,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몸에 새겨버릴 듯 강하게 자기주장을 해오는 저 여름의 태양만 아니었어도 꿈과 현실을 혼동하였을 것이다.
바로 옆에는 아직 눈이 감긴 그가 있었다. 그의 팔이 겹쳐진 곳이 체온과 체온의 맞닿음으로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른다. 꿈속에선 이렇게 꼭 달라붙어도 조금 부족할 만큼 추웠는데, 지금은 덥네. 생각을 하며 에슬리는 일으켰던 몸을 다시 풀썩 뉘었다. 그리고 꼬물꼬물 움직여 그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더워….”
제가 파고든 주제에 투덜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그가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잠꼬대 같은 웅얼거림을 한다. 더 자라고 그를 토닥거리며 에슬리도 한 번 더 잠을 청하기로 하였다. 꿈속의 시원함이 이 더위를 잠깐 이겨주길 바라였다.
지구 반대편은 지금 겨울이겠죠. 언젠가 오로라를 보러 가기로 약속한 것 같은데 다녀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