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차이가 나는 줄 모르는 채였다. 말라서 더 길게 보이는 팔다리 덕에 한참 큰 것 같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면 눈높이는 엇비슷하였고 손을 내밀어 맞잡으면 아이답게 따뜻한 체온이 제 손에 알맞게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찻잔을 쥐던 섬세한 손가락, 이마를 덮는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그 틈새로 보이던 순하고 다정한 빛. 동갑내기의 잘 웃던 그 아이. 그렇게 나란할 줄로만 알았다.
쭉 어린 아이인 채로는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꼬박꼬박 정중한 존대를 구사하고 수줍은 빛으로 뺨을 물들이고 조용한 목소리를 내던 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눈이 따라갈 수 없는 높이에 우뚝 서버렸다. 제 손을 모두 덮고도 남을 만큼 자란 손발, 더욱 길쭉해진 팔다리. 단정하게 다듬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깊은 푸름蒼. 겨울은 추워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잔병을 치르던 아이가 한겨울의 눈밭에서 웃게 되었다.
강해졌다. 많이 자랐다. 순하던 눈매는 여전히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함이 담겼고 온화하게 들리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던 아이. 얼른 자라서 하고 싶은 게, 이루어야 할 것이 생긴 아이, 그리하여 더 이상 아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자라버린.
닮았다고 느꼈던 아이는 달라졌다. 보폭이 달라지고 거리가 벌어졌다. 따스한 양손에 감싸여 시선을 들다가 문득 실감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라길 거부하던 그녀와 다르다. 그는 계속해서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더 앞으로. 더 멀리, 넓은 곳으로. 꼭 그 자신이 하늘인 것처럼.
응? 하고 눈이 마주치면 바로 응시하는 시선에 눈꼬리를 휜다. 그러면 돌아오는 푸스스한 웃음소리는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채여서 향수를 느꼈다. 시선 속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가 담은 그가 있었다. 옛날의 작았던 아이부터 눈앞의 그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선.
괜찮지 않음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아이가 있었다.
행복해지길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하던 아이가 있었다.
바다를 돌려주겠다고, 그렇게 해서 행복을 돌려주겠다고 말하던 아이가 있었다.
그로 인해 괜찮지 않음을 말할 수 있던 순간이 있었다. 미래를 꿈꾸었던 날이 있었다. 돌아올 행복을 그리며 잠들던 밤이 있었다. 흔들리면서도 걸어가려고 내딛던 발이 있었다.
지금은,
──그의 가까이로 가면 그늘이 드리우는 것만 같았다. 싫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호를 받는 기분이었지. 그림자와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져 하나의 큰 그림자가 되어 안도를 느꼈다.
-그러니 곁에 머물러. 내가 너의 곁에 있는 것처럼.
힘이 실린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의 말은 언제나 그녀의 마음에 파문을 그린다. 떨리고 흔들리게 한다. 괜찮지 않음을 숨길 수 없게.
아직 강해지지 못한 탓이다. 무뎌지지 못한 탓이다.
괜찮지 않았던 그 시절부터 미래는 기대되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었지.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과거의 바람은 결국 지키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다.
불안은 병과 같다. 온전히 안도하지 못하는 건 오로지 저의 문제다. 고인 물 위로 던져지는 파문, 쌓이는 돌, 넘실넘실 차올라 언제 담긴 병이 깨질지, 물이 쏟아질지 모르는 기분. 세이라는 때문에 택한다. 차라리 아무도 제게 돌을 쌓지 못하도록 멀리, 또 깊이. 그것이 강해지는 것이라 믿으려 한다. 무뎌져 괜찮아지는 길이라 믿었다.
조물거리는 손길에 상념에서 벗어난다. 눈을 깜빡이고 올려다보면 무어가 그리 신기한 걸까. 겹쳤던 손의 위치를 뒤바꿔 그의 손이 폭 덮어오며 혼자 재미나단 듯 웃는 얼굴을 그렸다. 또 이렇게 가까이에서, 도통 익숙해질 줄을 모르는 것이다. 아리사 군은 왜 아무렇지 않은 거죠. 의아함 반, 토라짐 반이다. 미안해. 반응이 귀여워서 그만. 하고 돌아오는 사과에 못 이기는 척 눈을 흘기다 풀면 이제 안 그럴게. 라고 말하지만 또 할 것을 알았다.
“제가 어서 아리사 군 앞에서 떨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요.”
마음이 잔잔해져야 할 텐데요. 손에 손이 겹치고 뺨이 폭 가려진다. 좁아진 시야로 온통 그만 보였다. 좁혀지지 않을 눈높이, 좁혀지지 않을 보폭, 그것 말고도 많은 여러 당연히 달라진 것. 그 사이에 아직 여전한 것. 익숙함과 낯섦 사이에서 세이라는 천천히 다시 괜찮아지는 법을 익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