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의 로그는 coc 시나리오 vivi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플레이 할 예정이 있는 분은 열람하지 말아주세요.
: 시나요리 아리사
전구의 불빛이 깜빡인다. 혹시 밤이 찾아와도 전부가 어둠에 가라앉지 않도록 켜둔 옅은 조명에 세이라는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깨어났다. 동그란 전구의 은은한 빛 덕분에 어렴풋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바깥은 아직 해 뜨기 전의 새벽인 것 같았다. 해 뜨기 전, 검은 장막에 가려진 공기는 여름이 물러갔다는 실감이 들도록 서늘하고 조금 축축했다.
드러난 맨 어깨가 싸늘했다. 목을 움츠리며 이불 안으로 다시 파고들면 따뜻한 공기가 그녀를 감싸주었다. 이불 아래, 체온과 체온이 맞닿을 듯 조심스러운 거리, 온기는 그 틈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있었다. 밤을 지새우고도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은 채였다. 혹시 놓았다간 물거품처럼 사라지기라도 할까봐, 아직 그런 불안을 품고 있을까.
잡힌 손 위로 한 번 더 손을 올려 그의 손을 반대로 감싸본다. 기도하는 듯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게 맞았다. 신에게 감사를 올려야 했다.
───비가 그쳤다.
가을장마라 하였던가. 며칠을 쉬지 않고 내리던 비가 그쳤다. 창밖은 고요했다. 지금은 그저 어둡지만 곧 있으면 해가 뜨겠지. 먹구름이 가시고 아주 오랜만이란 듯 새파란 하늘을 보일 것이다. 창의 안쪽으론 규칙적으로 들리는 숨소리가 둘, 이어 고동소리가 둘, 그 외에 다른 소리는 필요하지 않단 듯 고요했다. 해가 뜨면 이곳도 빛이 들어차겠지. 그러면 그도 눈을 뜰까. 이번에야말로 미소로 인사해줄 수 있겠지. 좋은 아침, 하고.
맞이하지 못할 줄로만 알았던 내일이었다. 그랬는데 찾아온 내일이다. 새로운 오늘이다. 세이라는 이 순간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맞잡은 손에서 번지는 온기에 안도하는 건 그만이 아니다. 그녀 또한 그리기만 하던, 차마 욕심내지 못했던 내일을 맞이한 것이 실감나지 않아 그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아리사 군은 치사해요. 함께 가라앉아주기로 해놓고. 결국은 또 저를 끌어올렸네요.”
섬세하게 구부려진 손끝에 뺨을 문지르며 소곤거린다.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 순간이 기뻤다. 그래서 몇 번을 더 중얼거렸다. 아리사 군, 아리사 군…. 아리사 군.
“바다에 빠져 잠기려던 저를 뭍으로 데려왔어요. 이제 저는 이 손을 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요. 안 그러면 또 주저앉고 말테니까요.”
언제나 언제나 그는 이렇다. 시나요리 아리사는 세탄 세이라를 일어나게 하고 걷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함께 걸어 나가도록.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옆에서 지켜보도록.
───그러니 그를 잃었을 때에 세이라가 주저앉아, 일어날 의지를 갖지 못한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꼭 오늘과 같은 새벽이었다. 오빠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듣고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 우산을 들고 새벽거리를 나갔다. 그러다 물웅덩이를 붉게 물들이며 잠긴 그를 발견했다. 그 순간의 기억은 아직도 아찔하고 괴로운 것이었다. 어째서, 왜, 누구도 주지 않는 답을 찾아 맨 땅에서 허우적거리던 시간이었다.
뭍에 나와 혼자 살기엔 약한 그녀다. 사람(人)이란 글자는 서로 기대어 선 두 사람의 모양이라 하였던가. 그를 지탱하고 그에게 지탱되고 그렇게 나란히 서야지만 두 다리를 갖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러니 세이라가 자신과 그를 두고 치환한 것 또한 정해진 수순이었다. 어쩌면 그는 속상해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생보다 그의 생이 더욱 가치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3년이란 시간은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은 3년을 전부 선명히 기억하는 게 아니었다. 어제와 오늘이 같았고,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란 걸 알았기에 하루와 이틀에 구분이 없었다. 다만 방을, 복도를, 서재를 자꾸만 채워나가는 알록달록한 털실의 공예품을 보며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아득히 느꼈다.
신기하지. 언젠가는 이렇게 살리라 생각하던 것이었는데. 언젠가 목소리가 영영 나오지 않게 되면, 더 이상 앨리스가 아니게 되면, 모두의 곁을 떠나 바다의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혼자 품던 계획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인데.
이렇게 지독한 기분에 잠길 줄은 몰랐다.
“많이 외로웠어요. 보고 싶었어요. 그리웠고,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 ……이미 한 번 억지를 부린 건데도 욕심이 났지요. 아리사 군을 부르고 싶었어요.”
사람은 바람으로 살아간다. 욕심을 품고 바람을 안고 그렇게 해서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간다. 3년 간 세이라는 살아있음에도 살아있지 않았고 그럼에도 살아있었다. 어중간한 바람이 불순물처럼 마음에 남아 괴롭던 나날이었다.
그런 때 그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아리사 군을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면, 그 다음은 물거품이 되어도 좋아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조금 다를까. 아리사 군을 한 번만 더 만나고 이제 물거품이 될게요. 그래, 이쪽이 더 맞다. 이 이상 혼자 외로워하고 싶지 않았다. 끝을, 끝 다음에 올 쉼을 바랐다. ……라고 그녀 자신마저도 속이려 했다.
같은 침대 위에 올라 보낸 마지막 밤에 움켜쥐어진 손가락, 누군가 잡아주는 감각에 이미 무뎌졌다 믿은 마음이 아팠다. 차갑고 딱딱해진 줄 알았던 마음에 온기가 스며 일깨웠다. 실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세이라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저는, 당신이 바랄 때에 당신을 욕심내고 싶어요. 제가 바라서 욕심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스스로 바라는 대로 해주세요.」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는 돌아가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를 찾을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때의 그는 함께 가라앉자고 해주었을까.
어째서 끝내 그녀의 입에서 바람을 뱉어내도록 만들었을까.
지독한 감정이었다. 같이 죽어달라고 고했다.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행복이었다. 그와 함께 가라앉을 수 있다니, 그 때에 느낀 안도와 기쁨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자정을 알리는 열두 번의 종소리가 모두 끝나고도 맞잡은 손이 녹아내리지도, 눈물이 물거품이 되어 부서져 내리지도 않았을 때 가장 먼저 슬픔을 느꼈다. 방금 전의 선택이 얼마나 슬픈 것이었는지 그제야 실감이 들었다.
“3년 사이 말이죠. 어딘가 아주 이상해진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에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잘려나간 줄로만 알았던 삶에, 갑자기 연장선이 생겨서… 제 앞에 놓인 길이 어색하고 낯설기도 해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또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
서서히 아침이 밝아온다. 먹구름도 어둠도 가신 새벽하늘이 따스한 노란 빛으로 밝혀지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은 상냥한 빛을 멍하니 응시하다 문득 옆자리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아직 조금 감긴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기억보다 짙은 빛깔의, 그럼에도 여전히 맑은 하늘을 연상케 하는 푸름이 그녀에게 닿고 있었다.
“……좋은 아침.”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함께 맞잡은 손에 힘이 가해진다. 마치 여기 있는 게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듯한 작은 몸짓에 세이라는 빙그레 입꼬리를 당기며 따라서 그의 손을 잡았다.
입술 끝이 살짝 떨리면서 공기가 몸 안쪽에서부터 바깥으로 내돌아간다. 들어줄 사람을 두고 내는 목소리는 오랜만이라 아직 어색함이 남아 있었지만, 그 어색함조차도 애틋이 여기며 세이라는 온화하게 답하였다.
“좋은 아침, 아리사 군.”
소리를 낸다. 소리가 닿는다. 소리가 돌아온다. 한 때는 잃어버렸던 당연함을 되찾았다. 메아리처럼 주고받은 인사에 소소한 벅참을, 그리고 안도를 느낀다. 앞으로도 몇 번이든 거듭될 인사였다.